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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팩트)일 수 밖에 없는 북한 초기역사 증언 1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41 2022-02-10 21:09:12
※   사실 북한 역사나 사실등은 전문가라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추상적이고 예측,~일것이다.등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미화,우상화의 북한측 의견이나 주장을 그대로 믿기도 어려운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글은 북한 수뇌부,핵심층,고위층이었던 
한 사람이 당시 직접 보고 들은 사실들의 이야기다.

1945년 부터 1958년경 까지의 북한의 역사~특히, 북한의 문화,예술인등의 삶,숙청등의 내용이 많다.  

분명한건 적어도 여기 글의 내용은 100% 팩트 라고 자부하며 또 믿어도 된다고 확신한다.

●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 '정*진'씨의 증언 내용

◇ 전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 정*진씨 - 증언

■   12년전 쯤 92세인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 정*진 씨가 주인공이다.

아마 2022년인 지금은 사망했을것이다.


◇  어진「양반」홍명희,

◇ 가난한 인민들 안타까워한 최승희,

◇「순수문학가」로 몰려 고민하던 이태준

◇  홍명희의 병간호 받다 숨진 이광수


『소련군의 웅기·나진·청진 해방 전투에 참여한 조선인은 나 하나… 1945년 9월19일 입북한 김일성이 내게 한 첫마디는「김성주입니다」 였다』

20세 때 카자흐로 강제이주, 소련군으로 대일전 치러, 문예총 부위원장, 문화선전성 제1부상 등 역임

○   파란의 한 세기를 살아서..

2010년 쯤 92세인 그의 삶은 기구했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태어났다. 어린 그에게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해주며 항일 의식을 길러 주던 아버지는 그가 스무 살이던 1937년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 「인민의 적」으로 몰려 총살됐다.


1937년 추수를 앞둔 가을 한인들은 짐짝처럼 화물열차에 태워져 수만리 밖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됐다. 불모의 땅으로 향하는 화물열차 안에서 그는 친구들을 부둥켜안고 파인 김동환 시를 읊었다.

  <벽은 말할 줄 모르고

  나는 할 말을 못 하니

  종일 두 벙어리

  마주 앉았으나

  죽었음인가 살았음인가?!

  하늘과 땅도 이렇게 있다간

  소낙도 울고 벼락도 치거늘

  때만 오면 때만 오면 하고

  나는 다만 빈 주먹만

  쥐었다 폈다…> (「손톱으로 새긴 노래」)

1945년 8월, 그는 소련 해군 (육전대·해병대) 대원으로 북한에 상륙했다. 북한에 진주하는 소련군의 최선봉이었다.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웅기·나진·청진을 해방시키고 났을 때, 그의 부대원은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한 달 후, 그는 상부의 명령으로 귀국하는 「김일성 장군」을 영접했다. 「김일성 장군」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그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차관 자리까지 올랐다.

여기서 그는 홍명희
·이태준·최승희·김순남 등 내로라하는 북한의 문화예술인들과 사귈 수 있었다.

북한 땅을 밟은 지 12년 후, 김일성의 소련파 숙청에 내몰린 그는 다시 추방자가 되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갔다. 그는 여기서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소련제국의 붕괴를 지켜보았고,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1953년 6월 문화선전성 간부들과 함께. 앞줄 오른쪽이 정*진, 그 옆이 허정숙 문화선전상.


정*진, 정율, 정 유리 다닐로비치



그의 이름은 정*진. 러시아 이름은 정 유리 다닐로비치, 북한에서의 이름은 정률(정율)이었다.

2010년경 나이 92세인 그를 만난 것은 지난 6월 말 서울 이태원 해밀턴 호텔에서였다. 그는 「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 학술대회 및 고려인 예술가 초청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 그를 만난 것은 6·25 당시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
(부상·차관)이던 그의 입을 통해 납북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편집장으로부터 그를 만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92세 노인을 인터뷰 하라니, 골치 아프게 됐다」고 생각했다. 말귀가 어둡고, 옛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 희미한 목소리로 중언부언하는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진 옹이 모습을 나타냈을 때, 깜짝 놀랐다. 키가 큰 그는 허리가 약간 굽었지만 건강해 보였다. 말은 또박또박했고, 논리정연했다. 기억력이 좋았다. 아무리 높게 보아도 70대 초반 이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인터뷰 자리에는 정*진 옹을 초청한 우정권 단국대 교수, 한춘섭 성남문화원장이 함께 했다. 시조시인 인 '한 원장'은 정*진 옹에게 월북 시조시인인 조운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찾아왔다.


한 
원장이 『시조시인 조운 선생을 아시느냐?』고 물었다. 정 옹은 『잘 알고 있습니다.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했다.


한 원장이 『조운 선생은 한국에서는 거의 잊혀졌지만, 월북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렸을 것』이라고 말하자, "정 옹"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지금도 그분이 1급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을 통해 처음으로 시조를 접했는데, 참 좋았습니다. 자주 찾아 뵙고 시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조를 봉건잔재쯤으로 여기는 북한의 분위기 속에서 그분은 늘 「시조에 대한 관심이 너무 없다」고 서운해하셨죠. 그분은 북한 유일의 시조시인이었습니다』




한 원장은 정 옹에게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문학인들과 시조 문학 교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정 옹의 대답은 쌀쌀맞다 싶을 정도로 단호했다.


『그건 꿈입니다. 허웅배(허진) 선생이 소련 시절 시조시집을 낸 적이 있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후 고려인 사회에서 시조문학은 맥이 끊겼습니다. 우리말로 문학작품을 창작하고 감상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거의 사라진 마당에 시조를 전파하고 교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정 옹의 말 속에는 슬픔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잊혀져 가는 언어」로, 결국은 자손들로부터 「잊혀질」 시작을 하고 있는 「잊혀진 세대」의 비애가…. 그의 증언을 토대로 그의 일생을 정리해 보았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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