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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팩트)일 수 밖에 없는 북한 초기역사 증언 4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63 2022-02-23 12:10:45
04편


소년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항일 정신을 물려받았고, 이광수(李光洙)·김동환(金東煥)·이상화(李相和) 등의 작품을 통해 조국애를 길러 왔던 그로서는 「조국해방전쟁」에 참여한 조선인이 자기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조선에는 이렇게도 투사가 없다는 말인가?」


8월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청진 전투는 계속됐다.

전투는 8월18일에서야 끝났다. 당초 60명이던 부대원은 31명으로 줄어 있었다.

■   청진형무소 정치범 석방



레오노프 대위는 부대내의 유일한 조선인인 그에게 청진형무소의 정치범들을 석방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레오노프 대위, 소련군 25군단 정치부 장교와 함께 차를 타고 청진형무소로 간 그는 간수로부터 형무소 열쇠를 넘겨받아 첫 번째 감방의 문을 열었다. 정치범들이 「만세」를 부르며 쏟아져 나왔다.


이로써 그의 「조선해방전쟁」은 끝났다. 그때 그의 계급은 특무상사였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김일성(
金日成)이 창건한 조선인민혁명군 예하 오백룡 부대가 치열한 전투 끝에 웅기를 해방시켰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처음으로 해방시킨 도시라는 의미에서 웅기를 「선봉」으로 개칭했다. 정*진은 이러한 북한의 주장을 단호하게 일축했다.


『나는 웅기는 물론, 나진·청진에서 단 한 사람의 인민혁명군도, 항일투사도, 혁명가도 전장
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전투에 참전한 조선인은 나 한 사람뿐이었소. 우리 부대가 피를 흘리며 청진에서 싸우고 있을 때, 김일성이나 오백룡은 하바로프스크 인근 왜트스코예 마을에 주둔한 소련군 88정찰여단 막사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  《 여기서 '정*진' 씨가 잘못알고 있었던게 그가 생각한건 부분적인거고 대일전(조선해방전쟁)에 참가한 전체적인 전투 및 상황을 잘 몰랐다.  실은 '김일성'이 그 당시 웨트스코예에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오백룡 부대는 실제로 조선해방전쟁= 대일전에 분명히 참가한건 사실이다.
나중에 정*진 씨도 인정하고 사실을 인정함. 》

● 여기서 정*진 씨는 이 글의 주인공이며 사정상 이름 가운데 글자를 * 처리함


~~이어서  

어떻게 소련군 88여단 예하 일개 조선인 부대가 하루아침에 '조선인민혁명군'이 돼서 8월9일부터 만주 일대와 북한 웅기·나진·청진·어대진을 해방시킨단 말입니까? 아무리 역사와 백성을 속이려 해도 거짓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내가 북한에 있던 195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金日成)은 「내가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가 북한을 해방시켰다」는 얘기는 감히 꺼내지 못했습니다』



◇   입북하는 김일성(金日成)을 영접




정*진은 전장에서 만나지 못했던 김일성(金日成)을 그해 9월19일 원산항에서 만났다. 그날은 마침 추석이었다. 당시 그는 원산시 교육부 차장으로 정률(鄭律)(률()이라는 이름은 그의 러시아 이름 「유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회고다.





『그 전날 소련군 정치부에서 부르더니, 「내일 김일성(金日成) 장군이 들어온다. 나가서 영접하도록 하라」고 하더군요.




다음날 푸가초프호가 원산항에 들어왔습니다. 저는(정*진) 원산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태성수, 원산시당 조직부장 한일무, 시 상공부장 박병섭 등과 함께 마중을 나갔습니다. 소련군사령부 측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련군 군복 가슴에 적기 훈장을 단 젊은 대위가 내리면서 「김성주입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는 아침식사 뒤 원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추석놀이를 참관한 후 저녁에 기차편으로 평양으로 갔습니다.




소련군 정치부로 돌아가 「일행 중에 김일성(金日成) 장군은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김성주 대위가 바로 김일성(金日成) 장군이오」라고 하더군요.




전설적인 항일 영웅 김일성(金日成) 장군이라면 풍채가 당당하고 연륜이 있는 분일 줄 알았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허웅배(허진)가 은밀히 「진짜 김일성(金日成) 장군」이 누구인지 수소문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김일성(金日成) 장군」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후일 그는 문화선전성 제1부상으로 있으면서 업무상 김일성(金日成)과 자주 만났지만, 인간적인 교류는 없었다. 그의 회고다.

『허정숙 문화선전상이 자주 앓아서, 제1부상이던 제가 그를 대신해서 김일성(金日成)을 자주 만났습니다. 공무상 만난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그를 잘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정율(鄭律)(정*진)이 일을 잘한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는 얘기는 남을 통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소설가 한설야(
韓雪野)는 범죄작갱

 

 



1945년 9월, 원산시 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위원장인 시인 박경수가 그를 찾아왔다. 박경수를 통해 그는 당시 원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구상 시인' 등을 만났다.




1946년 초 박경수는 그에게 해방 경축 시집을 내자고 제안했다. 박경수가 사업추진과 편집을 맡고, 정*진이 발행책임을 맡았다. 그는 박경수의 부탁으로 웅기 전투를 회고한 「웅기항! 눈물에 젖은 나의 발자취」라는 시를 게재했다.




몇 달 후 시집이 나왔다. 시집의 제목은 「응향」이었다. 모두들 만족스러워했다. 구상 시인은 「시와 삶의 노트」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북한의 정황 속에서는 가장 문화적 생산을 한 셈이어서(그 시집의 외장만으로 치면 현재 서울 출판계에 내놓아도 호화로운 축에 든다) 동인들 중에는 서창훈과 같은 공산당 간부도 있었고 정율(鄭律)(정*진)이라는 우리 2세 소련군 장교도 있었으나 이 시집의 출간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던 판인데 얼마 안 가서 날벼락이 떨어졌던 것이다>




「날벼락」의 원인은 바로 구상 시인이 쓴 「여명도」라는 시였다. 평양에서 검열원들이 들이닥쳤다. 당시 북한 문단의 거물이었던 김사량·송영 등 네 명이었다. 송영 등은 이 시가 『북조선 현실에 대한 회의적·공상적·퇴폐적·도피적·절망적·반동적 경향을 가졌다』고 비판했다. 시집 「응향」에 대해서는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자아 비판에 직면한 구상 시인은 월남했다. 정*진(鄭*進)은 1989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구상 시인과 재회했다.





1946년 7월 정*진(
鄭*進)은 함남 인민위원회 교육부 차장으로 임명됐다. 근무지는 함흥이었다. 여기서 그는 작가 한설야(韓雪野)를 만났다.




『함께 점심식사를 했는데, 첫인상은 좋았습니다.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945년 12월경인 것 같은데 그가 쓴 김일성(
金日成)에 관한 세 편의 논문을 신문에서 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이 논설들을 읽으면서 그가 '김일성(金日成) 장군'을 잘 아는 분이라고 생각했고, 만나서 김일성(金日成)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 한설야(韓雪野)는 김일성(金日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군요. 「이건 아부, 아첨이 아닌갯 하는 생각에 씁쓸했습니다.


금일성(金日成)에 대해 쓴 논설과 전기 등이 김일성(金日成)의 눈에 들어 한설야(韓雪野)는 나중에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재능이 뛰어난 이태준(李泰俊)·임화(林和)·김남천(金南天) 같은 문인들이나 작곡가 김순남(金順男) 등을 시기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1950~1960년대에 걸쳐 북한 문화계에서 가장 막강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이 숙청당해 비참하게 죽는 것을 방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김동환(
金東煥)이나 이광수(李光洙) 선생 같은 납북 문인들을 충분히 구할 수 있었지만, 그들을 구명하러 애쓰기는커녕, 그들에 대한 비판에 앞장섰습니다.




나중에 그는 숙청당해 원산에서 쓸쓸하게 죽었다고 하더군요. 이는 응당한 천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많은 문화예술인들을 희생시킨 「범죄작갯로 기록될 것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정*진(鄭*進)이 나쁘게 말한 사람은 한설야(韓雪野)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한설야(韓雪野)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미움과 경멸이 느껴졌다)





1947년 봄, 정*진(鄭*進)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문예총 위원장은 한설야(韓雪野)였다. 무용가 최승희(崔承喜)의 남편 '안막'이 정*진(鄭*進)과 함께 문예총 부위원장을 맡았다.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간부부에 가서 임명을 받고 난 후 그는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박창옥(朴昌玉)이었다. 그는 정*진(鄭*進)의 조선사범대 2년 선배였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주 치일리 구역 교육부장으로 일하던 그는 북한에 들어와 요직 중의 요직인 선전선동부장을 맡고 있었다.

박창옥(
朴昌玉)은 명석하고 추진력이 강했지만 경솔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중에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정치국원·부수상을 지내다가 숙청, 처형됐다.

■  고려인 428명이 각 부처 부()책임자 맡아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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