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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피의 숙청 《 5 》
Korea, Republic of 돌통 0 908 2022-04-30 21:17:10
05편



김일성이 소련-중국 대표단을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것으로 잘못 인식할지 여부에 관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또한 김일성이 그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무너질 것이라고 믿었다.

마오쩌둥과 미코얀은 북한의 여러 파벌들이 서로화해하고 단결하기를 간청할 때 극도로 조심해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마오쩌둥은김일성이 그들의 제안을 무시하기를 기대했는데,이것은 그가 김일성의 독립적인 성향에 기인한 특성이다. 마오쩌둥은 이후 최용건이 이끄는 조선로동당 대표단을 만났다.

마오쩌둥은 박일우와 팡호산의 형벌을 비판하고,또한 그가 간첩이라는 이유로 박헌영을 처형하였다. 마오쩌둥은 조선로동당 대표단에게 서로 다른의견을 가진 동지들과 대화하고, 체포된 동지들을석방하고, 당등록과 지위를 회복하고, 총회에서 객관적인 논의를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간청했다. 마오쩌둥은 또한 북 대표단에 소련-중국합동 대표단을 북한에 파견할 의사를 통보했다.

북-중 수교 초기와 달리 ,1956년의 '8월 종파사건'에 대해 보다 공격적인 접근법을 채택했다. 이경우, 중국의 태도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결과가 결정되었습니다.

마오쩌둥의 의견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간섭과 중-소 공동대표단의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우세했다. 미코얀과 펑더화이가 이끄는 공동 대표단은 9월 19일 평양에 도착했다. 그들은 즉시 각 파벌의 구성원들과 회의를 열어 그들의 입장을 듣기 시작했다.

대표단과의 회담에서 김일성은 서휘, 윤공함, 이필규를 당에서 제명하고 중앙위원회로부터 최창익과 박찬옥을 해임하는 것이 경솔하게 처리되었다는데 동의하고 미코얀과 펑더하이의 총회 소집 제안을받아들였다. 미코얀은 사기꾼이었다.

이 총회에서 소련과 연안 파벌이 공개적으로 김일성을 비판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미코얀이 자신의 논평에서 멸시와 폄하를 자주북한인에 대한 '거만한' 태도를 여실히 드러낸다.

9월 23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가 총회를 소집했다. 참관인으로 참석한 미코얀과 펑더화이는 회의에서 중앙위원들이 김일성을 지목해 비판하기를바랬다. 그러나 김일성 주변에서 생겨난 인격숭배와 김일성의 행동을 비판하기 위해 일어선 사람은극소수에 불과했다.

비록 Mikoyan(미코얀)과 Peng Dehuai(펑더화이)는 이 결과가 김일성에 의해 시행된 철저한 장애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 결과를 수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총회에서 윤공흠, 서휘, 이편규의 당등록을 회복하고 최창익과 박찬곡을 중앙위원으로 복직하자는 중-소련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9월 총회에서 중·소 요구가 받아들여졌지만, 처벌이 모두 취소되지 않았고, '8월종파사건'의 주동자들이 저지른 죄는 용서받지 못했다.

따라서 중국과 소련의 간섭으로 이사건 이전의 상황으로 복귀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VV Kovyzhenko(VV코비젠코)에 따르면 중국은 김일성을 교체하는 문제를 제기했고 이 회의에서 이를 매우 진지하게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마오쩌둥의대화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신빙성을 많이 없습니다. 게다가 대표단은 김일성이 노동당 내에서 큰
지지를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로 흐루쇼프는 소련이 더 이상 동지들의 국가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소련과 중국 모두 동유럽의사태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로 확산되면 사회주의진영 전체가 뒤집힐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국제 정치 상황이, 외부 간섭의 가능성을 배제함에 따라 김일성은 더 이상 부담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소련과 중국의 디카트에 대해 그 자신들을 걱정하게 된다. 1956년 10월 헝가리 혁명의 여파로 김일성은 위기를 극복하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김두봉은 1957년 1월 열린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다시 한번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김일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는 1957년 1월 평양에서 노동당의 광범위한 숙청을 시작했다. 1956년 12월, 김 위원장은 5개월에 걸친 숙청 및 당원증 변경을 실시하여 300여명의 반대파당원을 추방하였다.
당중앙위원회 회의에서는 '반혁명분자 투쟁 강화'라는 목표가 채택되었다. 1957년 5월 30일에열린 당위원회에서는 "반(反)파벌 투쟁"이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군사전선에서 1958년 3월에 열린 조선인민군 회의에서 최정학 정치국국장과 수백 명의 연안(an安)파 당원 및 당원들에 대한 숙청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 소련 파벌들은 그들이 '반혁명적이고 파벌적 요소'라는 이유로 숙청의 원인이 되었고. 비록 중국으로 피난을 간 야난파 조직원들이 중국 정부의 보호를 받았지만, 그들은 정치적 싸움의 바깥에 남을것이다.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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