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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일본인 요리인의 수기..< 3 > 편. 시리즈
Korea, Republic of 돌통 0 818 2022-05-30 21:33:12
< 3 >편



■ 5만엔 팁봉투 바닥에 던지고 사과한 김정일


※ 김정일의 요리사


나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평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신보’(朝鮮新報. 조총련 기관지)를 손에 들 일본인 마담이 느닷없이 소리쳤다.

“앗, 이 사람 ··· 어젯밤에 있었던 사람 아냐?”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신문의 1면에는 그 남자의 얼굴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그렇게해서 우리는 비로소 어제 연회장에서 다랑어 초밥을 몇 번이고 주문한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다름 아닌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었다.

내 가슴은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내가 어마어마한거물 앞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당시엔 김일성이 북조선의 최고권력자였지만, 김정일은 머지 않아 그 뒤를 잇게 될 인물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그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초밥을 만들었다. 게다가 그 사람은 내가 만든 초밥을 아주 맛있게 먹었던 것이다.


● 김정일이 던진 팁을 거부하다.

?
그로부터 열흘쯤 지나서 다시 연락이 왔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벤츠를 보내왔는데, 목적지는 원산초대소가 아니었다. 벤츠는 온통 담으로 둘러싸인평양 시내를 달리더니 어느 낯선 지역으로 들어갔다. 삼엄한 경비 체제가 갖추어진 곳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곳은 평양 관저의 ‘8번 연회장’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김정일 자리 앞에 마련된 공간이 그 날 밤 내가 일할 곳이었다. 참가자는 20명 남짓 되어 보였다.

한 시간 반쯤 지나자 김정일은 배가 부른 듯 내게
다가와서는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수고했어.” 그 말과 동시에 김정일은 내개 하얀 봉투를 던졌다. 봉투는 나를 스치듯 벗어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봉투를 줍지 않았다. 당연히 팁이었지만, 집어던진 것을 주워서까지 갖고 싶지는 않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임상종이 황급히 주워 내게 건네주었다. 하지만나는 불끈하여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내가 북조선에 온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돈을 벌러 온 것이다. 하지만 팽개치듯 내던진 것을 주워
가질 만큼 궁색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것은 거지나 마찬가지다. 나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한동안 그 일만 생각하면 씁씁한 기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일주일 후 나는 다시 8번 연회장으로 불려갔다. 초밥을 만들 때마다 늘 그렇듯 그 날도 김정일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러자 그는 “요전에는 내가 실례를 한 것 같구먼.용서하게나”하며 사과했다. 김정일은 지난번 자신이 한 행동에 내 마음이 상했다는 것을 알고 직접
용서를 구했다. 그에 비해 나는 어떠한가. 사소한일에 오기를 부리며 분을 참지 못했다.

나는 김정일 앞에서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보여견딜 수가 없었다. 김정일은 그 이후로 내게 팁을
줄 때는 으레 내 손에 직접 봉투를 건네주었다.

봉투에는 처음 팁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5만엔이 들어 있었다. 1982년 당시만 해도 김정일은내가 일본에서 들여온 생선을 아무 검사도 하지 않은 채 먹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체제가 바뀌었다. 일본에서 들여온 생선은 모두 중앙당의 ‘5과’라는 부서에서 정밀검사를 한 뒤에야 초밥 재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 김정일과의 첫 악수

?
1982년 11월이 되자 식당도 정식 오픈을 하게 되었다. 초밥 1인분에 3,000엔(한국 돈 3만원)이었으므로 북조선에서는 엄청나게 비쌌다. 그러나 일본에서 북조선으로 들어온 귀국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면서 내가 만든 초밥은 좋은 평판을 얻게 됐다. 귀국자 중에 거의 매일 두 세명씩 손님을 데리고 오는 사람이 있었다.

‘성미’라는 이름의 억만장자였다. 매출 장부를 보면 알겠지만, 성미 씨 혼자 한 달에 매상을 250만엔이나 올려준 적도 있었다.

평양에는 일본에서 부를 거머쥐고 귀국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북조선 정부에 억 단위의 거금을 기부해야만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북조선은 사회주의를 표방한 나라다. 그런 나라가기부금 액수를 우선시하는 정책을 편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나는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고향으로 돌아가기위해 기부금을 낼 필요가 없었다.

1982년 말, 나는 새해를 일본에서 맞기 위해 잠시귀국하기로 했다. 그때까지 나는 열두 번이나 김정일의 부름을 받았다. 팁으로 받은 돈만 합해도 60만 엔(한국 돈 600만원)이었다. 그 밖에 총 출장비60만 엔과 식당에서 받은 월급 80만 엔(한 달에 20만 엔씩 넉 달)등 총 수입 금액이 대략 200만 엔(2,000만원)정도였다.

연말부터 정월에 걸쳐 약 한 달을 일본에서 지내고북조선으로 돌아오자, 김정일이 곧바로 나를 불렀다. 나는 이미 익숙해진 8번 연회장의 철판구이 코너로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고급스러운 초밥용 재료 케이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얼른 초밥 재료들을 보기 좋게 늘여놓고 김정일이오기만을 기다렸다. 김정일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인사를 건넸다.

“후지모토, 오래간만이야! 이 케이스 어때?”

그가 나를 위해 초밥 재료를 담는 케이스를 새로 마련해놓은 것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주 멋진 케이스로군요. 오늘은 원하시는 것을 모두 만들어드릴 테니,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곧 김정일의 주문이 들어왔다.

“다랑어 뱃살!”

그는 내가 준 초밥을 단숨에 먹어치우고는 “다랑어 뱃살, 원 모어!”하며 또다시 같은 것을 주문했다.
그렇게 한참을 먹고 나더니 그는 언제나처럼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때 나는 굳게 결심을 하고 김정일 앞으로 나아가당돌한 부탁을 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와 악수를 좀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김정일은 빙긋이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내손을 꽉 잡아 주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김정일과악수를 했다는 흥분과 감동으로 나는 벅찬 가슴을달랠 길이 없었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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