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망직전 5일동안의 행적..( 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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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편 ※ 김일성-김달현 vs 김정일-연형묵 그런데 탁자에 마주앉은 김달현은 김일성의 ‘대안의 사업체계’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부터 내놓았다. ‘대안의 사업체계’는 사회주의식 생산체계를 확립한 주체적인 경제체제라고 북한이 수십년 선전해온 김일성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것을 부정하면김일성도 부정하는, 정치적 문제였다. 때문에 김달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동석한 김정일은 당장 이 방에서 나가라고 소리쳤다. 하지만김일성은 오히려 더 들어보자고 제지하며, 김정일에게 이제부터 한마디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김일성은 자기 스스로 학식이 부족하다고 인정할 줄아는 대인이었다. 김달현은 냉전구도가 허물어진국제적 현실을 인정하고 자본주의의 포위 속에서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이 계속 살아 남으려면 역시경제발전을 선행해야 한다면서 중국의 번영을 강조했다. 중국 이야기가 나오자 김정일은 또 발작을일으켰다. “중국이 무슨 사회주의인가. 등소평 그 쥐새끼(김정일은 항상 등소평을 가리켜 쥐새끼라고 말했다)한 마리가 지금 중국이란 큰 땅덩어리를 다 말아먹고 있는데 그걸 본받으란 소린가.” 김일성은 오늘은 그만하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리고 오후 시간에 김달현을 따로 불러 의견을 청취했다. 며칠 후 김일성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들과 인민경제대학 박사들을 만나 ‘대안의 사업체계’가 현실성이 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동독식 경제를 연구할 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또한 “박정희가 어떻게 남조선 경제를 일으켜 세웠는지 당신들은 생각 좀 해보았는가”라고 물어보면서 “기회가 마련되면 남조선에 경제 고찰단을 파견하겠다”고 선언해 회의장에 있던 전체 성원들을 놀라게 했다. 그때부터 국가경제 문제를 놓고 김일성과 김달현은 개혁론을 주장하고, 김정일과 연형묵 총리는 이른바 사회주의 위칙주의를 주장하는 대립이 조성되었다. 사실 김정일과 김달현은 단순한 인척관계가 아니었다. 김정일이 어렸을 때 계모가 미워 집을 뛰쳐나오면 항상 김달현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던 절친한사이였다. 김정일은 그 옛정을 다 잊은 듯 그때부터 김달현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겼다. 하여 김일성 사후 “혁명원칙에는 친척이고 뭐고 없다”며 김달현을 정무원 부총리에서 해임시켜 흥남비료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내려보냈다. 그 죄명은 어마어마하게도 당정책 비방 및 직무 태만이었다. 당정책 비방이라는 죄명의 근거는 이랬다. 식량난과 함께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전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북한은 전국 각 도, 시, 군, 직장마다 자체기술과 자재로 중소형 발전소를 건설하는 산발적인 방법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김달현은 그럴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노력과 자재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전문공장에서 기성화된 설비를 만들고 현재 진행 중인 국가적 전력생산대상건설에 힘을 집중해야 보다 효율적이고 전망적이라고 한마디 했다. 이것이 그만 당의 자력갱생 정책을 비방한 것이 되었다. 김정일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김달현이 흥남비료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내려간 다음에는공장의 생산부실과 일부 간부들의 부정부패를 문제 삼아 국가 검열단을 내려보냈다. 김달현은 자신의 숙적인 연형묵이 검열단 단장으로 임명되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무실에서넥타이로 목을 매 자살했다. 김정일은 인척관계의김달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의 처와 자식들을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 평양에서 ‘곁가지’라는 말은 김정일의 방계 친인척을 가리키는 말이다. 온 사회에 김일성주의, 김정일주의를 확립한다면서 김정일은 직계가 아닌 친인척들의 득세와 우상화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 나무는 곁가지를 잘라줘야 곧게 잘 자란다는 의미에서 김정일이 처음 이들을 ‘곁가지’라고 표현한 다음부터 이들 친인척은 북한 주민들에겐 마주 서서도 안될 사람처럼 인식되었다. 그 곁가지들과 어울리다가 종파로 몰려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이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었다.특히 중앙당 간부들은 김정일과 배다른 형제인 김성애의 자녀들과는 눈길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1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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