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6월 25일 전쟁의 분석..(1).연재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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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편 시리즈
대부분의 전쟁은 발발일이 아닌 종전 또는 정전일을 기념하게 된다. 전쟁 명칭도 청일전쟁, 러일전쟁처럼 교전국이나, 인도차이나전쟁, 태평양전쟁처럼 주요 교전지역으로 명칭으로 사용한다. 한국은 한국전쟁과 6.25전쟁을 혼용하고, 전쟁 당사자인 북한(조선)은 조국해방전쟁, 미국은 THE KOREA WAR,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맞서 조선을 도운)전쟁’이라고 부른다. 전쟁물자 공급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일본은 조선전쟁(朝鮮戰爭)이라고 부른다. ■ 그렇다면 6?25전쟁은 왜 6월 25일에 발생했을까? 한국이 6?25라는 전쟁명칭을 사용하는 이유는 전쟁 발발일을 통해 북한(조선) 남침설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과연 6?25전쟁은 6월 25일 새벽 4시에 터진 남침일까? 1950년 6월 25일에 개성 · 동두천 · 춘천 · 삼척 등 38°선 전역에서 포성이 울렸기 때문에 전면전이 6월25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38°선을 경계로 1949년 한해만에도 2,617건의 교전으로 2,583명의 인명이 사망했고, 25일 당일날에도 해주 쪽에 수도사단 17연대, 금천 쪽에 1보병사단, 연천 쪽에 7보병사단, 양구 쪽에 6보병사단, 양양 쪽에 8보병사단이 먼저 38도선을 넘어 소규모 공격으로 볼 때 ‘6월 25일 남침’으로 단정하기는 이르고 불확실하다. 우발적인 전쟁은 없다. 모든 참전국은 나름의 명분을 내세워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한다. 명분 없이 참전하면 전범국이 되기 때문이다. 6·25전쟁 당사국가인 북미 양국도 자기나라 명분의 정당성을 위해 상대가 듣든말든 자기주장만 한다. 양측의 주장을 살펴보자. 미국은 ‘북한(조선)이 소련의 승인과 중국의 지원 약속을 받아 6월 25일 남침을 결행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북한(조선)은 ‘미국이 한국 군대를 앞세워 6월25일 북침해 참전 명분을 확보하는 치밀한 계획 하에 도발한 것’으로 본다. ■ 전쟁은 미국의 유일한 돌파구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는 당시 정세가 판단해 준다. 2차 세계대전 후 3가지 큰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전쟁 전 800억 달러도 안 되던 미국의 GDP는 2차 세계대전 기간 군수 산업의 급성장으로 1400억 달러로 껑충 뛰어올랐다. 대영제국을 제치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한 세계경제 패권을 쥐게 된 미국. 그러나, 1948년 말 경제공황에 빠진다. 둘째, 일제의 패망 이후 계속되던 중국의 국공내전(해방전쟁)에서 미국이 지원하던 국민당이 패하고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셋째, 미국만 독점하던 핵무기를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함에 따라 장차 사회주의권이 미국과 군사적 핵균형을 이루게 될 가능성이 생겼다. 요약하면, 국민당 장제스를 앞세워 거대한 중국대륙을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하려던 미국의 아시아 지배 전략은 중국의 등장과 소련의 핵 개발로 치명타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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