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해방 후 개선..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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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자신의 힘에 의한 해방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남측의 역사적 평가와 많이 다른데, 북은 왜 그런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자.<현대조선역사>는 해방정국을 다룬 제2편 ‘새 조국 건설, 조국해방전쟁’의 서두에서 “영웅적인 항일무장투쟁을 벌리시여 마침내 강도 일제를 물리치고 조국광복의 새봄을 안아오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을 거느리시고 조국에 ‘개선’(강조는 인용자)하시였다”고 밝히고 있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께서는 9월에야 배편으로 쏘련을 떠나시게 되였고 9월19일 원산항에 개선하시였으며 9월22일 오전에는 평양에 도착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 개선으로 민족사의 새 장이 열리게 되었다.” 여기의 특징은 김일성이 돌아온 날짜와 항구까지 밝힌 점이다. 이렇듯 김일성의 귀국을 ‘개선’이라 표현한 것은 항일무장투쟁에서 이겼다고 판단하지 않으면 불가능한데 북의 역사서들은 모두 항일무장투쟁의 결과를 승리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북의 역사학계가 주장하는 ‘자력해방론’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핵심은 바로 ‘최후공격작전’과 ‘전민항쟁 무장봉기’이다. ☆☆☆<참조> {대일 군사작전의 이름을 <현대조선력사>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계승본)에서 최후결전작전, 최후공격작전, 조국해방작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대독 전승을 축하하는 모임이 있은 후 련합군에 망라된 조선인 지휘성원들은 한데 모여 조국해방과 관련된 작전문제를 가지고 장시간 토론하였습니다. 정식으로 소집한 회의는 아니였지만 분위기가 아주 진지하고 엄숙했습니다. 모두가 격정에 넘쳐 일제 격멸과 조국광복을 부르짖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두만강을 건너 국내에로 쳐들어갈 기세였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최후공격작전은 당시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한 1945년 8월9일 김일성의 공격명령으로 시작됐다는데 하루 전인 8월8일 소련 접경지인 웅기군(현 나선시) 토리에 ☆☆☆<참조> [당시 토리는 일본군의 경흥요새구역과 웅가-나진요새구역을 끼고 있는 요지였다고 한다. “우리 전투원들은 토리의 경찰관주재소를 불사르고 마을을 해방하였습니다. 토리는 조국광복을 위한 최후결전에서 우리 혁명군부대에 의해 첫 번째로 해방된 망루이였습니다.”(<세기와 더불어> 8권 457쪽) }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작전계획을 이렇게 알렸다. “그때 우리는 간백산 일대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예정된 통로로 진출하여 각 도를 해방하며 원동의 훈련기지에 집결되여있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평양지방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항공편으로 신속히 진출하여 이미 꾸려놓은 비밀근거지들을 차지하고 전격적인 군사작전을 벌리도록 계획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 활동하는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와 정치공작원들은 항쟁조직을 대대적으로 늘여 인민들을 전민항쟁에 불러일으킴으로써 온 민족이 이르는 곳마다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진격에 합세하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이 작전계획이 그 당시 우리나라가 처한 군사정치 정세하에서 조국의 해방을 단시일 내에 이룩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도였다고 생각합니다.”(<세기와 더불어> 8권 449쪽) } 8월9일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과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에 걸쳐 있는 간백산 밀영에 있던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두만강 연안에서 소련군과 함께 일본군의 국경 요새들을 돌파해 경원, 경흥 일대를 해방하고 웅기군 방면으로 계속 진출하면서 국내의 넓은 지역을 해방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안 상륙부대의 선견대로 활동하던 부대들은 웅기에 상륙해 청진 일대로 진격했다고 한다. ☆☆☆ <참조> {나진 해방전투에 참가한 소련 군관 E. 우르쥬멜라슈윌리는 <조선에서의 수기>에서 “우리들이 도시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기관총의 따르륵 소리와 포사격 소리가 들려왔다. 도시 변두리로 나온 조선 농민들이 손을 휘저으면서 “만세” 소리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시내에서는 벌써 이틀째 김일성 빨찌산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였다.… 우리들은 도시 변두리로부터 우리를 향해 급히 달려오는 100여 명의 무장인원을 보았다. “우리들은 김일성 빨찌산 대원들입니다”라고 급히 부대 지휘관이 땅크병 대좌에게 말했다”고 알렸다.(<세기와 더불어> 8권 461쪽 재인용) } 그리고 이미 국내에 파견돼 있던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들과 정치공작원들은 인민무장대들과 ☆☆☆ <참조>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무장대 활동도 소개했다. “(회령)까치봉무장대는 최후결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전투행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무장대는 쏘련군의 진출을 기다리지 않고 자체의 힘으로 회령을 해방했습니다.” “량강도와 함경남도 일대의 항쟁조직들은 쏘련군이 진격해오기 전에 수많은 경찰서와 적 통치기관들을 습격 소탕하였습니다.… 신의주지구의 항쟁조직들은 총공격명령이 내린 다음날부터 경찰관 파출소와 국경 경비초소들을 들부시고 도 경찰부와 도청을 점거하였으며… 평안남도와 평양지구에서는 조국해방단을 중심으로 무어진 큰 항쟁대오가 병기창을 습격하고 도청과 부청을 점거하였으며… 황해도의 항쟁조직들도 일제가 항복하기 전에 여러 지역의 적들을 습격 제압하였습니다.”(<세기와 더불어> 8권 462~463쪽) } 이것은 38선 이북 지역에서는 8월9일부터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기까지 일주일 동안 소련군만 일본군과 싸운 게 아니라는 얘기다. ☆☆☆ <참조> {김일성은 “최후결전의 시기를 회상할 때마다 아쉽게 생각되는 것”으로 “쏘련의 훈련기지에서 여러 해 동안이나 조국해방작전 준비를 해온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력량이 본래의 계획대로 전투작전을 전개하지 못한 것”을 꼽았다. “아군부대들이 북부국경지대에서 일본군과의 교전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전선부대들의 작전을 지휘하는 한편 항공륙전대(공수부대)를 인솔하고 조선으로 출격할 준비를 최종적으로 끝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륙전대는 자동차를 타고 비행장에 나갔다가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이 그렇게 번져진 것은 일본놈들이 너무 급작스레 항복한 데 있었습니다. 일본놈들이 항복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을 때 처음 얼마 동안은 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세기와 더불어> 8권 463쪽) }
때문에 북이 당시 소련과의 관계를 대등한 협력관계로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북의 자력해방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 문제는 1940년 12월 당시 소련이 하바롭스크에서 코민테른 명의로 소집한 소련 극동군과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 주보중(周保中) 등 동북항일연군 간부들의 회의에서 시작된다. 소련의 이런 제안에 대해 김일성은 회고록(8권)에서 “그 당시 쏘련은 서부 국경쪽으로 질풍같이 육박해오는 독일과의 충돌을 거의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독일이 서쪽에서 쳐들어올 때 일본군이 동쪽에서 쳐들어오게 된다면 그것은 야단이였습니다. 쏘련 사람들은 모든 힘을 다하여 어떻게 해서나 동서협격을 피해보려고 하였습니다. 쏘련이 제출한 협동안을 보면 정세의 긴박성으로부터 오는 그들의 초조한 심리상태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114쪽)라고 분석했다. 국제연합군의 결성은 3자 모두에게 이점을 제공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과 중립조약을 체결했지만 머지않아 대일전이 불가피한 소련에는 일본군과 실전 경험이 풍부한 특수부대가 생긴 것이고,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에게는 정규무력의 든든한 지원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소련의 대일전 개시는 자연히 국제연합군의 대일전 개시가 되고 조선인민혁명군도 여기에 일 주체로서 참여한 게 된다. 소련의 입장에서 조선 진출은 대일전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일제의 침략으로 조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인민혁명군 입장에서 국내 진출은 소련군과의 연합작전이었더라도 자신들의 조국 해방을 위한 군사작전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대일작전을 준비하던 1945년 여름 김일성은 소련군 총참모부가 소집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해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Алекса?ндр Василе?вский) 당시 총사령관을 만났고 또 당시 소련의 정치권 2인자였던 안드레이 즈다노프(Андре?й Жда?нов) 소련공산당 정치국 비서도 만났다고 한다. 즈다노프는 특히 스탈린의 위임으로 만난다고 하면서 해방 이후 몇 년이면 독립국을 건설할 수 있겠는가 등을 김일성에게 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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