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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UBLIC OF KOREA 자유사랑 2 311 2006-12-12 20:58:52
글제목 요덕 스토리 탈북자 감독 '정성산'감독 인터뷰 글쓴이 ㈜보라돌이 등록일 2006-04-11 오후 2:09:03 조회수 347 뮤지컬 ´요덕스토리´ 연출자 정성산 감독 인터뷰 "모든 준비 다 끝냈다. 이젠 정말 죽어도 된다" 2006-02-17 16:48:07 ◇ 정성산 감독이 16일 데일리안과 인터뷰하고 있다. ⓒ 데일리안 윤경원 기계에 들어간 그의 통장은 찍히고 또 찍히며 빠져나올 줄을 몰랐다. 지난 주 북한인권의 참상을 고발하는 한 뮤지컬이 정부의 압박과 자금난으로 인해 무산될 직전이라는 소식이 알려진 직후 국민들의 후원이 봇물처럼 쏟아진 것이다.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연출자 정성산(37)감독. 16일 오후 서울시청 부근의 한 사무실에서 데일리안과 만난 그는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도와주실지 몰랐다. 너무나 감사드린다”며 “오늘 통장을 두 개나 갈았다. 끝없게 찍히는 통장을 보며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고 말했다. 정 감독 옆에 앉아있던 한 시민단체 회원은 “이 나라의 일그러짐을 경고하는 국민들의 소리없는 외침”이라고 해석했다. 비록 제작비를 모두 충당하기엔 어렵지만 정 감독은 “제일 시급했던 배우들의 식대와 의상, 소품 비용에 대한 숨통은 트였다”며 “모든 준비를 다 끝냈으니 이제 정말 죽어도 된다”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 뮤지컬로 살해협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뮤지컬의 후원자들 중에는 쌈짓돈을 모아온 할머니도 있었고 미국에 사는 교포, 북한인권운동가인 미국 디펜스포럼의 수잔숄티 회장도 있다. 정 감독은 “이 분들의 명단을 공연 팜플렛 등에 실을 것”이라고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탈북자인 그는 평양에서, 모스크바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영화를 공부했던 영화 전문가다. 지난 1995년 탈북해 남한으로 입국한 그는 최근 부모님이 자신 때문에 양강도 정치범 수용소에서 돌팔매질로 공개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죽어가던 그의 부친은 눈감는 순간까지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드셨다고 한다. 그는 김정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다. 그리고 사활을 걸고‘요덕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는 예술인답게 “(보수단체들이) 길거리에 나와 투쟁만 하는 방식만으로는 김정일을 이길 수 없다"며 "김정일이 두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문화·예술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이제 미국, 영국, 일본 등 외국의 유수 언론들은 그의 뮤지컬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는 세계인들이 북한 수용소의 참상에 눈을 뜨도록 만들어 김정일과 ‘맞짱’을 뜨겠다고 말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그는 ‘요덕 스토리’에 대한 정보기관 관계자들의 압력과 언론 인터뷰 과정에서의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과 탈북과정 등 기막힌 인생스토리를 털어놨다. -최근 언론에 ‘요덕 스토리’의 사정이 보도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이후 달라진 점이 있는가? “외롭지 않게 된 것이 제일 큰 변화다. 하루에도 격려전화가 많이 온다. 예전에는 모르는 발신번호가 뜨면 우선 섬짓한 느낌에 사로잡혀 긴장부터 했는데 지금은 ‘힘내라’, ‘조금이나마 송금했다’, ‘뮤지컬 보러 가겠다’는 등의 전화가 대부분이다.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이 잘 안되기는 하지만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금난으로 많이 힘든 것으로 알고 있다. 사정은 좀 나아졌나. “제작비 충당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지만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고 계신다. 700여명이 넘는 분들이 5000원에서 많게는 100만원까지 송금해주셨다. 직접 찾아오셔서 주신 분들도 수십여 분 계신다. 언론보도 이후 이틀 만에 1000만원이 모였고 지금까지 3000만원이 넘는 후원금이 답지했다. 통장을 두 개나 갈아야 할 정도였다. 정말 너무 감사드린다. 공연 팜플렛 등에 이 분들의 이름을 다 넣어드릴 것이다. 이 공연의 협찬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기억에 남는 후원자들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떤 분은 자신의 친동생이 보디가드 회사를 하니 이제부터 맨투맨 보디가드를 해주고 차까지 대여를 해주겠다고 하셨다. 또 어떤 할머니가 직접 찾아오셔서 쌈짓돈 10만원을 주시면서 ‘공연 때 자녀들을 다 데리고 보러 오겠다’고 말씀하셨다. 한 번은 새벽 3시에 미국 워싱턴의 교포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오더니 ‘500불을 보내주겠다. 서울 친척들에게 모두 공연 보러 가라고 얘기했다’고 전화가 오기도 했다. 하나에 200만원씩 하는 뮤지컬 홍보를 위한 육교 현수막 20여개를 달도록 해주겠다는 분도 계셨다. 또 ‘무궁화 지킴이’(cafe.daum.net/parkgeunhyecafe)라는 단체 회원들께서 홍보활동 등을 도와주고 계셔서 힘이 나고 있다. 이번에 내가 일어설 수 있는 결정적 지지를 보내주셨다. 많은 분들의 이런 엄청난 힘을 보고 나는 ‘우리 국민들이 지금까지 판이 없어서 못 놀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 제작진과 배우들의 반응은 어떤가. “배우들이 많이 놀라워했고 서로들 분위기가 ‘업’됐다. 사실 그 전에는 배우들의 밥값조차 내줄 수 없었다. 인근 식당에서 밥값을 달고(외상으로) 먹곤 했었는데 돈을 지불하지 않으니 밥을 주지 않더라. 그러자 지난 1월 달에는 배우들이 각자 돈을 모아 220만원을 만들어 식비를 갚으라고 나에게 주었다. 연출의 위신을 세워주려는 것이었다.(눈물) 보도 이후 일단 먹는 것이 해결이 됐다. 의상과 소품에 들어가는 예산에도 조금은 숨통이 트여졌다.” ◇ 정성산 감독 ⓒ 데일리안 윤경원 -‘요덕 스토리’는 작년부터 이슈화됐었는데 이후 사정이 더 안 좋아졌다고 들었다. “사실 작년 11월 조선일보와 첫 인터뷰를 한 이후 대학로 공연장 대관이 취소되고 투자자들이 발을 빼서 오히려 더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이번에 조선일보에 ‘따지기 위해’ 찾아간 것이다. 편집국장을 만나 이런 사정을 이야기 하면서 ‘그 기사 때문에 더 힘들어졌으니 책임진다는 차원에서 티켓 100장만 사 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인터뷰를 다시 하자는 제안을 하더라. 인터뷰기사가 나가는 날 긴장을 많이 했다. 또 다시 그 같은 상황이 반복될까봐 잠 한숨을 못 잤다.” -정부부처에서 요덕스토리에 대한 압력을 가했다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해 달라. “‘요덕 스토리’의 시나리오를 본 국정원 직원 3명이 어느 날 찾아왔었다. 그들은 나에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나’, ‘뮤지컬에 북한 노래와 인공기를 등장시킨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이 될 수 있다’며 압력을 가했다. 엄청 겁을 먹었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 생각해보니 갑자기 열이 받더라.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겠다는 놈들이 갑자기 그것을 거론하는 점도 그렇고 내가 각색한 영화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에 등장한 김일성 초상화는 왜 문제 삼지 않았는가. 그들을 두 번째 만났을 땐 내가 엄포를 놨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댄데 뮤지컬을 검열하는가. 난 지금 목숨을 내놨다. 당신 정체를 대라’고 소리쳤다.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이미 나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다. 뒷조사를 다 해놓았던 것이다. 감시받는 느낌이 들었다. 욕이 나갔다. ‘난 대한민국에서 법을 어긴 적 없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이러면 언론에 알리겠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분위기가 반전되더니 유화적으로 나오더라.” -이후 더 이상의 정부의 간섭은 없는가? “정부부처의 압력이 있었다는 보도 이후 통일부 탈북자지원관련 부서와 문화관광부에서 전화가 왔다. 다들 그 정부부처의 정체를 물으면서 도움을 주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난 이렇게 말했다. ‘눈 가리고 아웅 하지 말라. 거짓말 하느라 고생하신다. 그렇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중국에 있는 탈북자를 도와주거나 공연을 보러오라’고 말이다.”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은 “현 정권은 솔직히 나 같은 사람을 이용해야 한다. 북한인권문제에 대해 곤란한 한국이 북한당국에 대해 ‘한국이 요덕스토리 때문에 난리니 수용소는 좀 없애야 하지 않나’라고 협상을 할 수 있지 않겠나. 선진국이라는 한국이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에 세 번이나 기권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북한 주민들을 외면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괘씸하다. 때문에 나는 무조건 이 공연을 무대에 올려야겠다. -공연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으며 연습 분위기는 어떤가. “연습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끝냈다. 요새는 배우들이 연습하면서 감정에 젖어 많이 운다. 자신이 수용소에 끌려온 ‘죄인’의 심정이 돼 그 역할에 흠뻑 빠져있는 것이다. 연습장에 데리고 간 몇몇 분들도 펑펑 울더라. 몇몇 배우들은 이 나이되도록 북한을 몰랐다며 죄송하다고 한다. 애들부터 변화가 오더라. 나는 이 작품에 대해 ‘요덕스토리는 핵’이라는 철학을 갖고 있다. 김정일이 핵을 갖고 까불지 않는가. 따라서 이것은 문화의 ‘핵’이다. 제대로 만들어 김정일과 한번 ‘맞짱’을 떠보려고 한다. 이 공연은 세계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한국 공연이 끝나면 미국 동유럽 등 세계 각국에서 공연을 할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나 세계인들은 이제 북한의 수용소의 실상을 알아야 한다.” -지금도 협박 메시지가 오는가. “이상하게 뚝 끊겼다. 언론인터뷰 당시 살해협박에 시달리는 내 사정을 들은 편집국장이 ‘이렇게 주목을 끌게 되면 김정일이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더라. 하지만 이젠 모든 공연준비와 연습을 마쳤으니 죽어도 된다. 옷만 입고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마음이 놓인다. 많은 분들께 너무나 감사드린다.” -연습 공연을 미리 본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탈북자들과 일반인들의 반응이 엇갈린다. 탈북자들에게 보여주면 그들은 ‘수박 겉핥기식’이라고 한다. 표현 수위가 너무 낮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보여주면 너무 끔찍하다고 한다. 원래 시나리오 상에는 수용소에서 ‘죄인’들의 팔을 자르는 부분이 있었다. 실제로 북한 수용소에서 먹을 것을 훔쳐 먹으면 팔을 자른다. 그러나 너무 자극적으로 비쳐질까봐 실제 공연에서 이 부분을 뺐었다. 그러나 최근 이 장면을 다시 짚어 넣었다. 하나님이 수용소를 고발하라고 시킨 것인데 이것을 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다.” -해외에서도 이 공연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고 들었다. “외국의 유명 언론사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고 있다. 오늘(16일) 오후에 아사히 신문과 인터뷰가 있다. 일본 언론들은 수용소에 갇힌 납북일본인 캐릭터에 집중하고 있다. 다음 주엔 미국 타임즈와 BBC, 3월 초엔 CNN과 인터뷰가 예정돼 있다. 특히 해외 북한 인권운동 인사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국 디펜스포럼재단의 수잔숄티 회장도 2000불을 보내줬다. 그는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분으로 우리에겐 쉰들러리스트 같은 분이다. 그는 메일에서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나중에 미국에서 공연할 수 있게 해주겠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국내 방송사의 접촉은 없나. “몇몇 군데에서 오긴 했지만 내키지 않는다. 특히 뿅뿅뿅는 철저히 거부할 것이다. 사실 예전엔 뉴스도 뿅뿅뿅것만 봤는데 정동영이 통일부 장관이 된 이후 절대 시청하지 않고 있다.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에 등장한 북한 어린이들은 철저히 기획된 것이다. 모두 잘 사는 애들만 데려다 놓고 쇼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가 보겠다. 요덕스토리 뮤지컬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복합적으로 일어났다. 원래 나는 민족주의자였고 김대중 정권의 ´햇빛정책´을 옹호했었다. 그러나 점점 정체성이 의심되기 시작했고, 노무현 정권 들어서 입만 열면 민족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정작 북한 주민들의 인권 참상을 외면하는 위선을 목격하면서 생각을 고치게 됐다. 그러던 중 공개처형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문화의 힘´으로 북한의 인권 현실을 알려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 정성산 감독 ⓒ 데일리안 윤경원 -작품 소재를 ´요덕 수용소´로 한 이유는? "북한에서 ´요덕´라는 단어는 공포의 대명사이다. ´야, 너 요덕 갈래?´라는 말은 정말 무서운 협박이다. ´요덕´은 관리소(정치범 수용소)의 상징이며, 북한 주민들은 그곳에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덕 수용소는 수감인원이 제일 많고 가장 잔악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때문에 그곳에서 근무를 하는 국가보위부원들은 승진이 빠르다. 그만큼 악명이 높다. 사실 아버님께서 공개처형으로 돌아가신 곳은 회령이다. ‘회령스토리’로 하려고 했으나 그 곳은 김정일 부인인 김정숙의 고향으로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곳이다." -요덕 수용소에 대한 자료수집은 어떻게 했나? "그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분들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도 북한에 있을 때 군(軍)수용소 생활을 2∼3개월 정도 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내용이 낯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때 내가 있었던 수용소와는 비교도 안 된다는 걸 느꼈다. 정말 살벌하더라. 완전히 수감자들을 죽이려고 작정한 곳 같더라." -들었던 증언 중에 생각나는 것 몇 개만 소개한다면…. "수용소에서 근무하는 보위대의 내무반에 딱 들어가면 ´반(反)혁명론자들은 3대를 멸족한다´, ´도주자는 그 자리에서 사살하라´라는 김정일의 명령이 붙어있다. 13년 동안 근무를 해야하는 보위대들은 빨리 사회에 나가고 싶어 특진거리를 찾는다. 따라서, 죄수 몇 명을 불러 수용소 철조망을 넘어가는 시늉을 하라고 시키고 이들을 향해 총을 쏴 죽인다. 죄수들도 철조망에 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시키는 대로 해야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총살시킨 보위대는 일찍 제대를 해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특진을 누리게 된다. 한 번은 보위대가 얼굴 인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한 어린아이를 시시때때로 때렸다. 그 아이는 맞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인상을 고쳐 웃고 다녔고, 이를 본 보위대는 ´비꼰다´는 이유로 그 아이를 때려 죽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죄수들을 불러다 태권도 연습을 하거나, 얼굴이 반반한 여자를 강간해 병신을 만들어 놓는 등 수용소에서 김정일 정권의 만행은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다." -정 감독은 평양대학 연극영화과를 나오고 러시아로 유학까지 다녀오는 등 유복하게 자란 것으로 알고 있고 있는데, 탈북한 배경이 궁금하다. "나는 2남1녀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고, 어렸을 적 소아마비에 걸렸다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어 가족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가 중앙당 간부였던 덕에 평양에서 200평 아파트에 사는 등 유복하게 자랐고, 그런 나에게 세상은 ´만만한´ 곳이었다. 북한의 유일한 예능고등학교인 금성고등중학교와 평양대학 연극영화과를 입학해 당 간부 자녀들과 어울리며 ´사고´를 치고 다녀도 부모의 ´빽´으로 모두 풀려 나오곤 했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능력이 출중함에도 출세길이 번번이 막혀, 알아보니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행실에 문제가 있었다. 도와주자는 생각으로 국가보안부문서관리 차장의 아들과 함께 조총련에 수 백 달러를 보내 문서를 조작했다. 빨간 줄 하나 긋고 ´영웅이었음´이라고 수정하면 인생이 180도 달라지는 마당이었다. 그러나 이 공문서 위조 시도는 발각됐고, 당에서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그러다 94년 김일성이 갑작스레 사망해 비상사태가 선포됐고 나는 군대로 소환됐다. 그 곳에서 우연히 남한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잠이 들었고, 이를 발견한 동료가 그 채널을 그대로 고정해 상부해 보고했다. 보통 고위층 자식이 남한방송을 듣다 걸리면 ´주의´를 받는 정도로 그치곤 했었다. 그러나 당시는 김일성이 사망한 시기. 내부 단속차원에서 내가 ´시범 케이스´로 걸린 것이다. 이 사실은 군 보위부, 국가보안부, 중앙당까지 알려졌고, 사상에 문제가 있는 인물로 낙인 찍혀 황해도에 있는 군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고, 13년형을 선고받았다." -보위부와 정치범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보위부 사단에서 조사를 받을 땐 매일같이 보통 헌병들의 주먹과 발로 정신 없이 맞았다. 그러나 군 범법자를 수용하는 서부노동연대로 갔을 땐 이보다 더 악질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기억도 없는 어렸을 적 잘못을 만들어내야 하고, 김일성 배지를 떨어트린 것, 여자를 겁탈한 것 등등 없는 죄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 곳의 보위부원들은 때리는 것도 귀찮아 참나무 꼬챙이를 손톱에 끼우고 대답이 맘에 안들 때마다 몽둥이로 내리쳤는데, 마치 전기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보위부원들은 또, 총에 달린 긴 쇠꼬챙이로 수감자들의 머리를 수직으로 내리쳤는데, 이 때문에 우리들의 머리통은 뻥뻥 뚫리곤 했었다. 밥도 군견(軍犬)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었는데 그것마저도 힘센 수감자들 차지가 먼저였다. 또, 수감자들끼리 격투를 시켜 지는 사람들은 군견 우리에 보내져 몸을 심하게 물리곤 했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어떻게 탈출하게 됐나. "재판을 받고 수용소로 돌아오던 중 우리를 싣고 가던 호송차가 산길에서 구르는 사고가 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피를 흘리고 신음하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다친 데 하나 없이 수갑이 풀려 있었다. 그 길로 평양에 있는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이미 집은 나 때문에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고, 부모님이 양강도 탄광촌으로 추방됐다. 나중에 안 일인데, 당시 같이 어울려 놀았던 당 간부 자녀들이 거의 다 나 같은 처지에 놓였었다. 나는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양강도로 향하다 내 얼굴이 포함된 거리에 붙은 수배자 명단과 헌병과 마주쳐 중국으로 도주했다. 압록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북한병의 총을 발목에 맞기도 했다. 그곳에서 운 좋게 좋은 사람을 만나 소련, 베트남, 홍콩을 거쳐 간신히 남한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노동당 간부의 자녀로써, 김정일에 대한 특별한 반감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중국으로 탈출해 1주일을 있어보니 김정일 욕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너무나 허망됐다. 나는 나름대로 주체철학과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론에 심취했었다. 심취하지 않으면 문학·문예 작품이 나올 수가 없다.(그는 대학시절과 군시절에 예술단에서 문예활동을 벌였었다.) 중국에 오니 욕이 터져 나왔다. 너무나 먹을 게 많고 욕을 해도 잡아가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가졌던 사상과 배운 것은 허황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탈북자 입장에서 남한 정권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김대중 정부 들어서부터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에 입국할 당시 뿅뿅뿅 사회교육방송(대북방송)에서 일을 했고, 3년 동안 ´남과북 하나로´라는 라디오프로그램 MC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청취율도 높고 인기가 좋았는데, 남북정상회담 당시 나는 ´정상의 만남은 나쁘다고 보지는 않는데, 이것이 쇼인지 아님 우리민족에게 정말 가치 있는 일인지는 두고봐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일주일 뒤 잘리더라. 당시 뿅뿅뿅 간부가 청와대쪽에서 탈북자들을 방송에 기용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말해줬다. 당시 정권은 사회교육방송을 거의 폐지시켰다. 북한 사람들에게 사회교육방송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 이걸 안 들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북한 독재를 이기고 북한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과도기에서 굉장히 필요한 방송이다. 이후 갑자기 좌익세력들이 나오고 공공연히 친북 구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의 정체성이 의심되던 차에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됐다. 노 대통령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기대는 무너졌다. UN북한인권 결의안 기권과 국가보안법 폐지시도, 송두율 사건, 황장엽씨의 대외활동을 막는 것 등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실망하기 시작했고, 저건 아니다 싶었다." 한편 데일리안은 제작진의 고군분투에 자그마한 도움이 되고자 ´요덕스토리´를 후원한다. ´요덕스토리´ 이벤트 게시판에 좋은 글을 올리는 독자들에게 일주일에 두 분을 선정해 요덕스토리 티켓을 제공한다. 요덕스토리 후원계좌 (제일은행 136-20-055404, 예금주: 김경미 요덕스토리) 연락처 (02)569-4483 출처: 판도라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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