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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댁/ 탈북 원조 수기
Korea, Republic o 이강석 기자 2 468 2007-01-31 03: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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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댁



황해도에 살던 우리집은 1945년 8,15 해방을 맞이하고 1년 간 김일성 통치를 겪으며 온갖 몹쓸 짓을 벌리는 북한 정권이 결코 오래 가지 않고 반드시 망하리란 생각을 갖고 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 노약자까지 9 명의 대식구들을 거느린 할아버지는 북한 탈출을 결심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 상황은 오로지 걷는 것만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고 젖먹이 어린아이들로 구성된 머나먼 대장정의 북한 탈출은 목숨을 건 위험한 행동이었다. 가다가 붙잡혀 반동분자로 몰려 처벌받는 것도 큰 걱정이지만 힘든 강행군을 견디지 못하고 가족들중에 큰 변을 당할 수도 있었다.



탈북자들을 막기 위해 38선을 지키고 선 인민군들에게 들키지 않고 아슬아슬 38선을 통과하고 무려 15일만에 충청북도 두메산골인 제천군 한수면에 안착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살아생전에 북한땅 탈출하신 일을 큰 자랑으로 삼으셨지만 그 일로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기셨다. 6,25 남침을 통하여 남한을 점령한 북한군은 북한에서 탈출한 것을 문제삼아 조국을 배반한 반동분자라고 처벌하려고 달려들었으며, 그들에게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고 겨우 풀려나자 얼마 후 북한군은 유엔군에 의해 후퇴를 하고 이번엔 남한의 군인들이 북한에서 넘어온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총살시키려고 했다.



남한 군인들은 북한에서 월남한 것을 문제삼고 간첩으로 몰아붙였다. 자초지종을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 않고 오랏줄로 꽁꽁 묶여 총살현장으로 끌려가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절박한 순간이었다. 할아버지가 군인들에게 죽게 생겼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온 마을에 알려지고 당시 군에서 몸을 다쳐 전역한 상이군인 출신인 분이 그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와 군인들을 설득하여 총살형을 가까스로 모면했다고 한다. 북한이 싫어 월남한 분이며 자신이 보증할 테니 제발 풀어달라는 간곡한 설득으로 총살당하는 참극을 면할 수 있었다. 남 북한이 총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은 이렇게 우리가족들에게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기막힌 사연을 가져다 주었다.



남북이 갈라서 서로 총칼을 맞대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은 젊은이들에겐 힘든 군사훈련과 선후배가 엄격한 내무생활속에 각종 사고를 일으켰고 많은 젊은이들이 아까운 나이에 운명을 달리하는 참혹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필자와 함께 군에 입대한 동기들 중에도 목숨을 잃고 불귀의 객이 된 사람이 둘이나 발생했다. 남북한이 총을 맞댄 긴박한 상황은 항상 긴장을 요구하고 그 긴장된 상황을 견디지 못한 성질 급한 젊은이들은 큰 사고를 일으키곤 했다.



할아버지 고향은 충청북도 제천군 한수면이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고향땅은 비탈진 산이 삶의 터전으로 화전민에 가까운 열악한 환경이었다. 조상으로부터 특별히 농지를 물려받은 것이 없는 우리집은 그날그날 날품팔이로 겨우 끼니를 때우는 비참한 형편이었다. 굶어죽지 않고 산 것이 참으로 용하다고나 할까,



북한에서 탈북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먹었다고 증언하는 쥐와 뱀, 고양이와 같은 사람이 먹지 않는 음식들을 할아버지는 거리낌 없이 드셨다. 아무거나 배를 채울 수 있다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데로 먹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던 시절을 우리집 어른들은 겪어 내셨던 것이다. 북한의 요덕수용소와 같은 삶을 우리집도 겪어 냈고 음식을 가리지 않고 배를 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소나무껍질까지 벗겨 먹을 만큼 먹는 것에 대하여 가리지 않고 철두철미했기에 굶어죽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엔 북한이 남한보다 잘살았다. 중국상해와 연변을 비롯하여 안 다닌 곳이 없는 할아버지는 풍요한 삶을 누리는 북한 땅이 자나깨나 부러워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충청북도 제천땅을 등지고 9명의 대가족들을 이끌고 황해도로 이주했다. 무일푼으로 황해도 땅에 이주한 할아버지가 터전을 잡고 그런 대로 살아갈 수 있었던 원인은 황해도민들의 넉넉한 인심덕분이었다. 황해도는 세숫대야 같은 큰그릇에 냉면이나 국수를 담아주고 깍두기 한 개가 주먹만하며 인절미도 주먹만한 인절미를 만든다고 하시며 황해도민의 넉넉한 마음씨는 눈이 동그래질 정도로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씀을 하셨다.



비록 고향땅인 충청북도에 다시 오셨지만 그 이후로 할머니의 이름은 황해도댁이란 호칭을 듣게 되었고 황해도댁이라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를 가리키는 말로 통용이 되었다. 할머니도 동네사람들이 불러주는 황해도댁이란 호칭을 좋아하셨다. 북한의 넉넉한 인심과 풍요로운 삶은 열악한 산간벽지인 제천땅에선 결코 맛볼 수 없는 또 다른 신비의 세계였기에 그런 세계에서 살다오신 할머니에겐 황해도댁이란 호칭이 가슴벅찬 자부심을 안겨주었는지도 모른다.



글/이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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