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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무부- 북한 인권실상보고-[1]-2005년
고문승 2 270 2005-03-14 22:09:55
이 글은 미국국무부가 2005년 2월 28일 발표한 북한의 인권의 실상에 관한 보고인데 미국국무부 홈페이지 http://www.state.gov 의 International Topics and Issues 의 Human Rights 에서 북한을 click 하면 원문이 나타남.
이 글의 번역은 高 文 昇 이 했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간의 권리(인권)의 실상에 관한 국가보고
미국무부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노동국에 의해서 발표되었다.
2005년 2월 28일

번역 高 文 昇

번역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서 [1]-----[5]

북한의 인권실상 보고 - 미국국무부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혹은 북한)은 1997년 10월 이후 조선노동당의 총서기 김정일의 절대적 지배 하에 있는 독재 권력이다.
1998년에 최고인민회의는 김정일을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다시 승인했고, 그 지위는 국가의 최고위 공직이라 선언했다.
김정일의 아버지 故 김일성은 영원한 주석으로 선언되었다.
국가의 명의상의 원수(元首)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영남이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687 명의 선거가 2003년 8월에 거행되었다.
다만 조선노동당과 두개의 위성(衛星) 정당들이 (선거에) 참여했다.
선거는 자유롭지 않았다.
金(정일) 가족은 집중적인 개인숭배의 대상으로 남아있고, 설혹 주민의 생존을 위해서 국제적 원조에 의존하고 있지만 북한정권은 자주의 국가적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에 계속해서 집착했다.
사법부는 독립되어 있지 않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 된 나라들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인민군 (KPA - Korean People`s Army)은 김정일의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주된 도구로써 조선노동당(KWP- Korea Workers Party)을 계속해서 무색(無色)하게하고 있다.
조선인민군 (KPA - Korean People`s Army)은 외적인 안전보장(외부의 침략에 방어할)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기본적인 조직이다.

노농적위대(勞農赤衛隊), 인민안전보장부대를 포함한 거대한 예비군 부대와 여러 개의 준 군사 조직들이 인민군을 지원한다.
첨가해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국내의 안전보장기구는 국가안전부, 국민안전보장기관, 그리고 조선노동당이 포함된다.
안전보장부대의 요원들은 심각한 인권 유린을 저질러왔다.

북한의 전통적으로 중앙집권적이고 탄탄하게 통제받는 경제는 만성적인 식량과 유류의 결핍으로 무너져내려왔다.
시민들은 점진적으로 비공식적인 경제에서 의 고용을 추구해왔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정부가 감축한 배급의 제한된 량을 여러 시장에서 구매한 식량(식품)으로 보충하여야 한다.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과 3분의 1 사이로 평가되는 과중한 군사비용은 경제발전을 억제하고 왜곡시켜 왔다.
이 나라는 국제적 금융기관들에 회원으로서의 자격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투명성을 향한 단계들을 갖추지 못 했다.
북한의 外債(외채)에 대한 債務不履行(채무불이행)으로부터 발생하는 북한의 신용 등급(평가)이 상업적으로 돈을 빌릴 수 있는(차입할 수 있는) 자금(기금)의 량을 급격하게 제한하였다.
과거10년 동안 국제적 원조의 중대한 流入(유입)에도 불구하고, 거칠어진 경제적 정치적 조건들은 수만 명의 사람들이 나라를 떠나 자유롭게 되도록 하는 (탈북) 원인이 되어왔다.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2002년에 북한정부는 임금과 물가를 올렸고, 통화를 평가 절하하였고, 경영자들에게 더 많은 결정권을 주었던 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인플레와 商業(상업) 활동의 급격한 상승을 야기하였으나 産業(산업)성장에 재충전( 다시활력을 불어 넣는 데)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식량 부족을 구제하기 위하여 공적인(정부의) 배급 제도를 통하여 공급받는 식량의 축소를 보상하기위하여 북한정부는 개인영업(개인 행상들)의 숫자들에서 증가를 허용하였다.
경제적 통제들이 느슨해지면서 부패가 증가하는 문제로 되고 있다.
북한정권의 인권기록은 극히 빈약한 상태로 남아있고 수많고 심각한 인권 유린 사건을 계속해서 저질러 왔다.
정치범들이라고 해서 억류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재판도 하지 않고 처형(살인), 실종(행방불명), 임의적인 구금에 관한 보고들이 계속해서 있어 왔다.

수용소(형무소)의 상황(조건)은 가혹하다. 그리고 고문은 보고 된 바와 같이 의례히 하고 있다.
수용소의 상황은 거칠고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었고, 고문은 보고된 것처럼 보통으로 의례히 하고 있다.

신뢰할 만한 증인은 “임신한 여성이 강요된 낙태 수술을 받았고, 다른 경우들에서 아기들이 수용소에서 출산과 동시에 보고 된 대로 살해되었다”고 증언했다.
독립적인 사법과 공정한 재판에 대한 헌법상의 조문들은 실제에는 시행되고 있지 않았다.
북한정권은 북한 시민들의 생활의 많은 분야에 걸쳐 시민들을 엄격한 통제 하에 몰아넣었다.
4월에 최고인민회의는 새로운 형법을 제정했다.
새로운 형법에 따라서 사형(死刑)은 네 가지의 반(反)국가와 반(反)민족 범죄들 의 심각하고 중대한 경우들에 한해서 적용했다.
시민들은 언론의 자유, 출판, 집회, 조직의 자유를 인정받지 못했으며, 모든 문화적 그리고 미디어(media) 활동은 조선노동당의 강력한 통제 하에 있었다.

외부의 정보는 정부가 승인하고 정부가 퍼뜨리는 것 이외에는 민중에게 전달되는 것은 거의 없다.
북한정부는 종교의 자유, 시민의 이동의 자유, 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했다.
중국 안으로 국경을 넘어 오는 난민들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여성들과 어린 소녀들의 인신매매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4월에 UN 인권에 관한 위원회 (UN Commission on Human Rights - UNCHR)는 북한에서 인간의 권리의 상황들을 조사하도록 하기위해서 특별 보고자 Vitit Muntarbohor 씨의 임명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 나라(북한)를 방문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나라는 인권 문제로 유럽연맹(EU)과 UN의 직원들과 만나는 것을 수락했으나, 북한정부는 가장 국제적 인권 개념들이 불법적이고 외래(外來)의 것이고 국가와 당(黨)의 목표에 파괴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의 국경으로 넘어오는 난민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여성들과 소녀들에게 인신매매에 관한 널리 퍼진 보고들이 있었다.
정부 통제 하의 노동조합들만이 허용된다.


제 1 조 ---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하여 인격의 고결성에 대한 고려

a. 임의적 그리고 불법적인 생명의 박탈


여러 해에 걸친 탈북자(망명자)들과 난민의 보고서들은 “북한정권은 김정일에 대한 전복 기도, 혹은 간첩으로 의심받는 군 장교들을 포함하여 정치범들, 정권의 반대자들, 다소의 송환된 탈북자들을 처형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4월에 북한정부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포고로 새로운 형법(刑法)을 기능하게 했다.
새로운 형법은 네 가지 反 국가 혹은 反인민 범죄들의 가장 심각하고 혹은 중대한 것에만 사형 형벌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범죄들은 쿠데타(coup) 혹은 국가를 전복하려는 기도에 적극적인 참여가 포함되고, 해외망명 혹은 국가비밀을 넘겨주는 것을 포함하는 음모, 반국가적 목적을 위한 테러(terror)의 행위들, 그리고 민족해방을 위한 인민의 활동을 억압하는 것을 포함한다.

과거에 “이데올로기적인 일탈(逸脫)”, “사회주의를 반대하기”, 그리고 “反 혁명적인 범죄들” 과같이 나쁘게 규정된 범죄들에 대하여 수용된 자들(범죄자들)에게 사형(死刑)이 선고되어 왔다.
다소의 경우들에서 1990년대의 기근(饑饉)의 절정기(絶頂期)에 주목할만하게 노동자들, 학생들, 학교어린이들이 참가한(동원된) 공개적인 모임들에서, 구금된 장소에서 집합된 피수용자(被收容者)들 앞에서 처형(형벌의 집행-사형)이 집행되었다.
국경 경비원들은 보고 되었던 것처럼 잠재적 망명자(탈북자)들을 죽이기 위해 발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망명자들(탈북자들)은 북한정부의 관리들이 수용소에서 아기 출산을 금지하고 있다고 보고해왔다.
강요된 낙태, 신생아의 살인은 보고 되었던 대로 수용소의 표준적인 실제들이다.
지하(地下) 교회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그리고 중국 국경 밖에서 활동하는 외국의 복음주의 단체들과의 의심받은 접촉 때문에 살해되어 왔다고 북한 밖의 종교적인 인권 구릅은 보고해왔다.
많은 수용자들은 되풀이되는 구타, 질병, 굶주림, 혹은 노출(햇볕, 눈, 비, 바람에 드러내 놓음)로 보고 되었던 사실처럼 죽어왔다.

b. 실종(행방불명)


북한정부는 실종의 여러 가지 경우들에 대하여 보고 되었던 것처럼 책임이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에 망명자(탈북자)들은 정치적 범죄로 의심받는 사람들이 국가보안 공무원들에 의하여 그들의 가정들로부터 끌려 나갔고 재판도 없이 정치범들을 위한 수용소로 직접 보내어졌다고 주장해왔다.
사람들을 마음대로 억류하고, 구금하고 그리고 독방에 그들을 감금시키는 정부의 비민주적 권한에 실제적인 제한들이 없다.
많은 보고서들이 보통시민들은 외국인들과 어울리는 것이 허용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고 국제사면위원회는 외국인들과 우정을 유지했던 많은 시민들이 실종되었다고 보고해 왔다.

과거에 북한정부는 남한 사람들, 일본인들, 그리고 외국인들을 납치하는 데에 관여해왔다.
2002년에 김정일은 고이즈미 일본 수상에게 1977년과 1983년 사이에 일본 시민들의 납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별기관들의 개입을 인정하였고, 책임있는 관계자들이 처벌받았다고 말하였다.

다섯 명의 생존한 희생자들은 2002년에 일본을 방문하도록 허용되었고 그들은 일본에 남아 있기를 결정했다.
죽었다고 혹은 북한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10 명의 일본사람들에 대한 상황설명을 일본은 요구했고, 일본인들을 납치했다고 의심스러운 20 개의 다른 경우들에 대하여 해답을 얻기를 희망하고 있다.

두 나라 사이의 협상은 계속되었으나 긍정적인 결과들을 산출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납치되어 갔다고 믿게 되었다.
남한 정부는 486명의 남한의 시민들의 명단을 수집하였으며, 그들 대부분은 1950-53 한국전쟁 이후에 납치된 어부들이었다.

2000년에 김동식 목사가 보도되었던 것처럼 북한 국경 가까운 중국에서 북한의 요원들에게 납치되었다.
친족들과 인권운동가들은 김동식 목사가 북한의 난민들을 남한으로의 망명을 지원해 준 것 때문에 납치의 표적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12월(2004년) 남한의 정부 관리들은 그들이 김동식 목사의 납치에 참가했다고 고백(자백)한 어떤 북한 공작원을 수사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와 중국에 살고 있는 동족 한인(韓人)들을 겁주려는 분명한 의도로 납치와 인질로 잡아놓았다는 다른 보고들이 있었다.
북한 정부는 일본인 이외의 외국인들의 납치에 개입해온 것을 계속 부인했다.


c. 고문 그리고 다른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혹은 품위를 떨어뜨리는 치사한 대우 혹은 처벌

2001년에 UN인권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북한정부는 고문은 법률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나 많은 정보의 소스(source - 출처)는 고문의 실제를 확인하고 있다.
북한에서의 인권을 위한 미국 위원회 (USCHRNK - the U.S. Committee for Human Rights in North Korea)에 의한 하나의 보고서에 따르면 고문은 의례적( 늘 하고 있으며)이며 가혹하다.
고문의 방법들이 보고된 것처럼 의례히 심한 구타들, 전기 충격(쇼크), 강요된 노출(햇볕, 눈, 비, 바람에 노출)의 연장된 기간들, 공개적으로 빨가벗김 따위의 인격적 모멸(창피를 주기), 작은 감방에 감금하기, 그 작은 감방에서는 수용된 자들(범죄자들)은 설 수도 누울 수도 없으며 거기에서 그들은 여러 주 동안 억류되었고, 무릎을 꿇도록 강요받고 오랜 기간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도록 강요받았으며, 사람의 두 팔로 사람을 매달리게 강요했고, 완전히 기진맥진할 때까지 서고 앉기를 강요받기, 최근에는 중국으로부터 송환된 어머니들이 그들의 갓 출산한 아기들을 죽이는 장면을 보도록 강요했다.
망명자들(범죄자들)은 고문, 질병, 굶음, 노출, 혹은 이러한 원인들의 결합으로 죽었다고 보고했다.

여러 해 동안 다양한 화학적 그리고 생물학적 약품들의 인간 신체에 대한 실험에 대하여 증언하는 탈북자들로부터의 보고들이 있어왔다.
2003년에 미디어(media -언론)들은 인간육체에 치명적인(죽음에 이르는) 가스 (lethal gas)의 실험을 했다고 주장했던 탈북자들의 보고들을 포함하고 있으나 이 보도들이 (현재까지)는 증명되고 있지 않다.

보고 되었던 것처럼 북한의 관리들은 감옥에서 아기의 정상 출산(live birth)을 금지했으며, 강제로 하는 낙태들이 중국에서 송환된 여성들을 수용하고 있는 억류자 수용소들에서 정규적으로 집행되었다.
1990년대에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탈북자들에 따르면 태어난 아기가 살아있을 경우(정상 출산인 경우)에 즉각 아기는 살해되었다.

보고에 의하면 이러한 정책에 대한 주어진 이유는 반쪽은 중국인인 아기들의 출산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첨가해서 말하면 경비원들은 여성 수용된 자들(범죄인들)을 성적으로 유린했다.
수용소(형무소)의 조건들은 가혹하며 굶주림과 처형(살인 당함)은 보통 있는 일이였다.
노동을 통한 재교육은 보통의 처벌이며, 그 처벌은 벌목, 채광(採鑛), 혹은 가혹한 조건 하에서 농작물 돌보기로 구성되었고, 그리고 김정일의 연설문을 암기하는 것 그리고 노동 후에 자기비판의 회의에 참여하도록 강요받는 재교육(再敎育)으로 구성되는 것이었다.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다리에 철 족쇄들, 철제 칼라(목에 거는), 혹은 수갑에 끼인 채로 행진 중에 있었던 범죄자들을 관찰해왔다.
어떤 억류 장소(수용소)들에서는 수용된 자들(범죄자들)이 거의 받는 것이 없으며 혹은 식량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질병에 걸렸을 때에 의료적 치료가 거부되었다.
위생설비(공중위생)가 빈약했다 그리고 수용자들은 거의 목욕할 수 없고, 혹은 그들의 옷을 빨 수 없고, 감금된 여러 달 동안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있다고 수용자들은 보고 하였다.
이순옥씨는 1994년에 중국으로 탈출하기 전에 수용소에서 여러 해를 보낸 여성인데 대한민국으로 탈출했으며 미국 상원에서 2002년 6월에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그 여자가 있었던 수용소에서 대략 1800여 명의 수용된 자들이 특별히 하루에 16시간에서 17시간을 노동했다”
이순옥씨는 심한 구타와 고문에서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고무호스로 희생자의 위속으로 물을 억지로 들어가게 하고 이어서 희생자의 복부(배)위에 가로로 놓인 판자위에서 경비원들이 밟고 뛰는 일이 이어지는 고문에 관한 사건들이 있었다”
이순옥씨는 화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전쟁실험들이 군부대에 의해서 수용소 수용자들에게 행해졌다고 증언했다.
다른 망명자들(탈북자들)도 비슷한 경험을 보고했다.
수용된 자들 가운데 1990년대에는 1년에 20%에서 25%가 사망하는 결과가 있었다고 보고 되었던 조건들 밑에서 행경에 있는 수용소 22 곳에서는 대략 50,000(5만 명)명의 수용된 자(범죄자들)들이 노동했다.
.
2003년 10월 워싱턴에서 북한의 전 경찰서장보좌역인 김영은 “북한에서 인권을 위한 미국위원회”(USCHRNK - the U.S. Committee for Human Rights in North Korea) 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 정치범 수용소 내에서 한명의 수용된 자로써 그는 무릎과 장딴지(종아리) 사이에 철봉을 넣어 오랜 기간 동안 무릎 꿇고 앉도록 강요받았으며, 연장된 기간동안 허리까지 오는 깊고 찬물에 침수되게 하였다.”
2002년에 미국 의회에서 증언했던 다른 증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신념들에 집착했던 수용자들이 다른 수용자들보다 더 나쁘게 취급받았다고 진술했다.
북한정부는 인간의 권리(인권)의 모니터들(체크하는 사람들)이 수용소(형무소)의 검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번역에 대한 의견은 chungwon38@hanmail.net 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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