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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란 말로 쓰게 된 기원
Korea, Republic o 이민복 0 501 2008-02-11 14:08:08
1994년2월 당시 탈북벌목공문제로 특종을 터트린 황성준은
레닌그라드 전임강사였으며 기자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던 중,
조갑제기자의 지시를 받고 이 문제를 취재하려 왔다고 하였습니다.

숨어있는 탈북자를 찾기어려워 하던 중 교회다시는 서울대동창들이 교회에 나오는 탈북자인 나를 소개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났고 나의 소개로 침거하고 있던 탈북자들을 내가 기거하던 집에서 또는 교회에서 심층취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기사가 조선일보에 나갔고 월간조선 94년4월호에 실려 특종으로 된 것입니다.
황성준은 그 후 모스크바 특파기자로 되었습니다.
특종기사는 벌목공문제로 나갔지만 저는 벌목공이 아니면서 자료를 제공한 주역이 되어버린 꼴이었습니다.
황 기자의 겸손한 말대로 하면 특종이라기 보다는 이미 케이비에스 등에서 벌목공문제가 거론 되었지만 사회적 이슈화시키지는 못하였다가 이번에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황성준씨와 나는 당시 논의를 거듭한 끝에 귀순자라고 하던 기존의 명칭보다는 란 말이 시대적으로 가장 합당한 표현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것이 계기로도 되어 그 후 탈북자로 사회적으로 인지된 것으로 압니다. * 황성준 기자에게 직접 확인하시기 바람.

조선일보의 위력때문인지, 아니면 특종으로 비화되어서인지 그 파장은 컸습니다.
미국 월스트리스트저널, 영국 더타임스 일본 아사히 등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외신 기자들과 국내기자들이 밀려들어와 내가 다니던 교회 조영철 목사(현 뉴욕한사랑교회)사모님은 세자녀의 안전문제로 내가 나가 주었으면 할 정도의 분위기로 될 정도였습니다.

북을 자극한다고 탈북자를 외면하던 남한정부도 여론화에 밀려 국회외교안보위원회 강신조 의원이 모스카바에 찾아와 교회에서 저와 알고 지내던 김명배 정무공사의 소개로 나를 직접만나 실태를 요해했고 또한 한국의 가장 큰 시민단체장인 경실련사무총장이었던 서경석목사도 직접만나게 되었습니다. 꼭 이 문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대통령 인수위 위원장인 이경숙도 당시 숙명대 총장으로 그 당시 모스크바 한인목사협의회 회장이었던 박시경목사님 교회에서 만났으며
그와 함께했던 대사관 직원이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이민복씨가 유엔에 들어간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탈북자문제를 이런 식으로 하기로 정부가 방침을 선회했다고 말하던 것이 생생합니다.

또한 김영삼대통령이 94년4월8일 경 탈북자전원수용방침을 내놓는 계기가 되었고 고 하던 공관은 언제 그랬는가 나에게 남한에 데려 갈 탈북자 소재를 부탁하는 자세로 돌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첫 입국으로 까자흐스탄과 우즈베끼스탄에 탈북벌목공을 94년 1진으로 선택, *모스크바지역은 북한을 당장 자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2진으로 입국 즉 나를 비롯한 벌목공들은 95년에 차례차례 받아들였고 유엔에 등록한 자들은 그 후에 다 입국하였음은 현재 탈북자돕기 숨은 아버지 유지열 목사님(모스크바 감리교 감독)이 잘 증명해줄 것입니다.

엠비씨 티브이에도 나갈 정도로 된 나 역시 위험부담이 큰 것을 사실로서 당시 황성준씨는 자신의 여권을 빌려주고 싶을 정도로 걱정하며 한국에 빨리 들어 갈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너무 복잡하여 잠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주인집 별장에 5일간 나가 있었는데 모스크바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내가 납치되어 갈 우려가 현실로 되었다고 소문 난 것입니다.
당시 주인집이었던 허진선생님(김일성왕조비사를 쓴 저자, 반 김일성 망명가)은 주말 별장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지금 모스크바에서는 당신 때문에 날리 났다고 알려주면서 안도감을 표시하였습니다.

그 후 공개적으로 교회도 다니고 신학교도 다녔는데
나를 체포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너무 언론과 사회에 알려진 탈북자이기때문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인권은 떠들어야 이익이라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한국에 들어와서도 북한인권시민연합 창립(96년) 멘버로 된 이유도 그런 소중한 경험의 결과라고 봅니다.당시 함께한 창립멘버 탈북자는 강철환, 안명철, 안혁 씨로 기억됨.

그간 저를 위하여 탈북자를 위하여 관심하여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면서-

wrote.. 음 질문자

: 북한인권문제를 공론화한 시점이라고 학자들이 인정하는 1994년2월, 당시 월간조선 조갑제편집장의 지시를 받고 나온 /황성준기자의 특종을 터뜨린 /탈북자문제의 당사자로 있던 /나에게 취재하려왔던 /많은 기자들과 인사들 중에서 /특별하게 느껴진 것이 미국기자 였습니다.

위에 글이 뭔 소린지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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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도 2008-02-13 09:26:20
    리선생..아직도 그잘난 버릇 못버리고 사세요?
    쓰신글을 보니 중권씨가 탈북자 원조이시네요...
    생사를 함께했던 사람으로써 충고한마디할께요
    십수년이 지난 오늘까지 물우에 기름처럼 떠다니지 마시고
    오실때 하셨던 말처럼 일용직건설 인부라도 경험삼아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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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복 2008-02-14 10:46:12
    탈북자 특성
    탈북생활시의 나의 사진을 보면 깜작 놀란다.
    내가 과연 이렇게 날카롭고 어두웠단 말인가?!
    공산권사람, 특히 탈북자는 얼굴 만보아도 알 수 있다는 말에 공감을 하게 된다.
    탈북자의 특성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말하고 싶다.
    그것은 부정적 사고방식과 기본윤리의 부재이다.

    부정적 사고방식
    탈북자의 특성이라면 매사에 부정적, 불안, 피해망상, 열등감,
    순박하면서도 과격하고 솔직하면서도 거짓투성이 등 이다.
    이는 부정적 사고방식에서 흘러나온 것들이다.
    실례를 들어 보자.
    개인적으로 뜻하지 않던 돈이 생겨 차를 헌금한 적이 있다.
    가난 속에서도 헌금하며 바램은 탈북인교회의 화합이었다.
    그런데 반대현상이 일어났다. 그 정도는 교회를 깨어버릴 만큼의 불화였다.
    불만의 주인공들은 발언권을 가질 만큼의 위치도 아니었다.
    헌금을 낸 적이 없음은 물론 오히려 숙식과 자동차를 제공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불만은 어떻게 월급도 없는데 차를 헌금할 수 있는 가? 이다.
    남을 위해 돈을 내 본적이 없는 자기기준으로 볼 때 이상한 것이다.
    아마 자신들(탈북자) 때문에 크게 후원금 받아 챙기고
    나머지로 차를 헌금한 것이 아니냐?! 하고 의심을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이 금방 밝혀지자 숨어버리듯 제 발로 떠나간다.
    긍정훈련을 받는 교회 탈북인들이 이 정도이다.
    이 정도에는 신학대학원을 나오고 교직자로 있던 탈북인도 속한다.
    부정적 사고방식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나쁜 짓을 더 잘 한다.라는 말이 있다.
    부정적사고 방식은 원죄로 인한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다.
    그중에서 나 자신을 비롯한 공산권사람, 탈북자들이 심한 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특성은 이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혁명을 해야 하는 사회 환경 탓이다.
    혁명은 타도하는 것이다. 타도를 하려면 좋게 보아서는 안 된다.
    증오를 해야 한다. 증오는 바로 삐뚤어지게 보는데서 나온다.
    따라서 이웃사랑의 예배당과 달리 공산당은 호상 비판인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부정적사고방식이 특성으로 쌓아진 것이다.
    이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나를 돌이켜 보아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한 세대가 가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따라서 어린 사람을 키우는 것이 늦어도 빠른 길이라고 준비하기도 한다.

    기본윤리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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