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갑첩 김광현 '서해안 27차례 남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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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6월 21일 충남 서산 앞바다에 침투하려다 생포된 무장간첩 김광현씨가 타고온 간첩선./조선일보DB 1970년대 후반 서해안 일대는 간첩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1978년 군산기계공고 1학년이던 김영남(金英男ㆍ45)씨가 간첩 김광현(金光賢)에 의해 납치됐던 무렵 서해안 일대에서는 모두 5명의 고교생이 실종됐고, 이들은 모두 간첩에 의해 강제 납북됐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1978년 8월 전남 홍도 해수욕장에서 납치된 홍건표(당시 17세·천안상고 3년)씨와 이명우(당시 17세·천안농고 3년)씨도 북한 공작원들에게 끌려갔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 1995년 침투한 무장간첩 김동식과 1997년 검거된 간첩 최정남이 “이씨와 홍씨가 북한에서 대남 교육을 담당하는 교관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진술함으로써 납북사실이 확인됐다. 지난 1977년 8월 전남 홍도에서 납북된 이민교(당시 18세ㆍ경기 평택 태광고교 2년)씨와 최승민(당시 17세ㆍ경기 평택 태광고교 2년)씨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강제 납북된 사실이 최정남을 통해 역시 확인됐었다. 이들 간첩들은 대남 침투 및 복귀 안내를 담당하는 노동당 조사부(지금의 작전부) 소속이었다. 김광현씨는 대남 침투 전 ‘301해상연락소’에 근무했다. ‘301해상연락소’는 공작원을 남쪽에 침투시키거나 임무를 마친 공작원을 북으로 복귀시키는 일을 하던 곳이었다. 김광현씨는 자신이 받았던 훈련에 대해 “공작원들은 도주할 때 첫날 150리를 벗어나지 못하면 비트(비밀 아지트)를 파고 10~15일간 지령 수신만 받고 잠복하도록 교육받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배가 격침되는 바람에 생포되고 말았다. 그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자폭할 기회가 있었지만 죽기가 싫어서 자폭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기자회견에서는 대남 침투 11번째 만에 붙잡혔다고 증언했으나, 그는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서해안 일대를 27차례 침투했다고 밝혔었다. 북한 간첩이 서해안을 자기 집안 드나들듯 한 셈이다. 우리 정보당국은 1997년 말 북한이 10대 학생들을 납치한 배경에 대해 “6ㆍ25 때 월북자는 나이가 많으니 남한 주민을 납치해 공작에 이용하라는 김정일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밝혔었다. 한편 김광현씨는 이후 남한 정부에의 귀화 과정을 거쳐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대졸 출신의 아내를 얻어 대학생 아들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의 아내는 13일 기자가 방문하자, “할 얘기가 없다”고 인터뷰를 거절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이날 김광현씨에 대한 직접 조사의 뜻을 밝혔다. 일본 경찰청 우루마 이와오(漆間巖) 장관은 “1991년 항공기 폭파범 김현희를 직접 만나 (그녀의 일본어 선생을 했다는)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납치사건을 밝힌 적이 있다”면서 “김광현에 대한 직접 조사가 사건 해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루마 장관은 일본 경찰청 외사1과장 시절인 1991년 한국을 방문해 대한항공 폭파사건의 김현희를 면회한 뒤 북한의 일본어 교육담당인 ‘이은혜’가 피랍 일본인인 다구치 야에코인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그 전까지 북한은 다구치가 1986년 7월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나 이은혜가 아니고 “이은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짓말해왔다. /nk.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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