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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입국 불보듯… 체계적 정착 프로그램을
동지회 2262 2007-02-20 13:24:44
1997년 北서 탈출 이애란씨 청소부로 시작 ‘보험왕’까지
1991년 탈북했던 김용씨 냉면으로 번 돈 사기당해
1989년 한국왔던 전철우씨 “사업실패 후 죽고 싶었다”

국내 탈북자 1만명시대

지난 16일 탈북자 10명이 입국하면서 국내 입국 탈북자 1만명 시대가 열렸다.

탈북자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 매년 수십 명 내외였다. 그러다가 식량난이 극심했던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 점차 늘어 2002년(1139명) 처음으로 연간 1000명을 넘어섰고, 작년(2019명)에는 2000명마저 넘었다.

탈북자 입국 본격화 10여 년 만에 1만명이 됐지만, 2만명이 되는 데까진 5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 예상이다. 그전이라도 대량 탈북 사태가 오지 말란 법이 없다.

이제 정부는 이런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평균 소득 1400만원 내외(남한 근로자 2780만원), 실업률 28%(우리 공식 실업률 3.5%), 고등학교 취학률 6.6%(우리 2003년 기준 99.3%) 같은 상황이 이젠 우리의 경제·노동·교육정책으로 편입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추후 더 큰 부담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국민들 역시 탈북자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

각종 조사에서 탈북자들은 남한 사회 적응에 가장 어려운 이유로 ‘편견과 차별’을 꼽았다. 과중한 업무, 적은 임금, 언어문제, 지식과 기술부족(컴퓨터), 대인관계 등도 이들의 정착 장애물로 지적됐다.



성공한 사람

이애란(43)씨는 양강도 혜산시에 사는 대졸(신의주경공업대학) 출신의 북한 인텔리 주부였다. 그러나 1997년 미국의 할머니와 연락이 닿은 것이 발각되면서 당성이 강한 남편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탈북했다.

4개월 된 핏덩이를 안고 미국 친척의 도움으로 서울에 왔다. 그는 “도깨비에 홀린 것 같았어요. 남편에게 미안하고 아들에게 미안할 뿐”이라고 했다.

◇ 탈북자 이애란씨는 남한에서 갖은 고생 끝에 보험으로 성공했다. /김보배 객원기자 iperry@chosun.com

그는 처음 담당 경찰이 소개해준 호텔 청소원으로 남한에서 첫 직장을 잡았다. 조선족 행세를 했는데, 그에게 맡겨진 것은 하루 20~30개의 화장실 청소였다. 월급은 50만원. 교통비와 식비를 빼고 나면 생활이 안됐다.

아프다는 핑계로 그만두고 여러 곳에서 식당일을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너무 속상해 통일부로 찾아가 직업알선을 부탁했어요. 어느 공기업에 공문을 보냈다기에 찾아갔더니 ‘탈북자라서 만날 필요 없다’고 해 땅바닥에 주저앉아 눈물만 펑펑 쏟았다”고 했다.

좌절감에 사로잡혀 혼자 직업을 구해보기로 작정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신문광고란에 실린 모 생명보험회사의 보험설계사 모집 공고였다. 그동안 국내에서 알게 된 몇몇 사람들과 상의했지만 모두 반대였다. “그거 남한 사람들도 쉽지 않은 거야” “학연·지연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하려고 그래”가 주였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마음먹은 그는 보험회사를 찾아갔다. 죽기살기로 해보겠다고 통사정해 어렵사리 보험설계사 명함을 얻었다. 처음 몇 달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문전박대는 예사였다. 설명도 못하면서 무슨 설계사냐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때 흘린 눈물은 평생을 흘리고도 남을 양”이라고 했다. 하지만 휴일도 잊고 남보다 두 세배 뛰었다. 주변에 그를 아는 사람들이 성실함에 감동돼 도와주기 시작했다. 탈북자 보험 설계사 1년 6개월 만에 그는 최고등급인 ‘수퍼’급에 이르러 2000년 ‘보험왕’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지금 이화여대 한 교수의 끈질긴 권유로 2002년 보험설계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했다. 석사학위에 이어, 지금은 식품영양학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 김용씨 좌절했던 사람

탈북자 1만명시대가 되면서 많은 탈북자들이 다시 ‘극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이념과 체제가 전혀 다른 남한 사회에서의 생존은 탈북 결심만큼이나 어려웠다.

탈북자 사회에서 가장 유명했던 연예인 겸 사업가 김용(45)씨와 전철우(40)씨는 한국사회에서 큰 좌절을 겪었다.

1991년 탈북한 김용씨는 ‘머리를 빠는 남자’라는 수기를 낸 뒤 연예계에 진출해 가수와 연예인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TV와 라디오를 넘나들며 북한 코너를 운영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탈북 동료들과 함께 냉면집인 ‘모란각’ 을 설립해 40여 개의 체인점을 거느린 어엿한 기업가가 됐다. 순수 탈북자들의 힘으로 큰 사업을 이끌어 화제가 됐었다. 김씨는 한때 수십억 원의 돈을 모았다.

그는 그러나 사기꾼들의 농간에 속아 재산을 날리고 한때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지경에 몰렸다. 그는 지금 ‘모란식품’ ‘오성물산’ 등 남아있던 모란각 산하 유통업체들을 되살리면서 20대 취향에 맞는 냉면을 개발해 모란각의 재기를 꿈꾸고 있다.

◇ 전철우씨

동독(東獨) 유학생으로 전자공학을 전공했던 전철우(40)씨도 1989년 입국한 뒤 방송을 타면서 화려한 스타가 됐다.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 ‘평양 놀새’(오렌지족)란 말을 소개해 유행을 시키기도 했다. 김용씨의 사업이 성공하자 그도 냉면집에 손을 댔다. ‘전철우의 고향 랭면’이란 상표로 체인점을 모집, 전국적으로 점포를 늘려갔다.

그러나 모란각과 더불어 냉면집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매출이 급격히 떨어졌고, 재산관리가 제대로 안되면서 냉면집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에서 결혼했던 부인과 이혼했고, 그 스토리가 모 TV방송에까지 공개돼 또 한번 상처를 받았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지금 그는 한 지인의 격려로 ‘전철우의 고향 국밥’을 개발해 재기를 위해 뛰고 있다./nk.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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