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무관심 속에 죽어간 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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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 5명이 탄광·산골 오지 등에서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연이 공개돼 독자들에게 깊은 슬픔과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월간조선 4월호는 국군포로 이규만 병장·이만동 상병·백종규 일병·김수일 일병·허영창 일병의 서러웠던 삶을 전했다. 국군포로 가족인 이연순·백영숙·박현주·허금자·이옥춘 씨는 고향을 그리워하다 북한땅에서 사망한 아버지·남편의 유해를 들고 북한을 탈출했다. ‘죽어서라도 고향에 가고 싶다’는 고인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월간조선 취재진에게 응어리진 한(恨)을 털어 놓았다. 이연순 씨는 국군포로 이규만(1932년생. 2000년 사망)씨의 딸이다. 이규만 씨는 1952년 3월25일 19세에 육군 서울수도사단에 입대, 참전했다가 포로가 됐다. 그는 북쪽 끝 학포탄광으로 끌려갔다. 육군은 1952년 8월16일 그를 전사자(戰死者)로 처리했다. 이규만 씨는 1957년 전쟁고아 이숙옥 씨와 결혼했고, 1962년 학포탄광에서 이연순 씨가 태어났다. 당시 이규만 씨는 발파공(發破工·굴을 뚫기 위해 폭약을 설치해서 터트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1964년에 오발 사고가 나서 크게 다쳤다고 한다. 불구가 돼서 일을 못하게 되자 이씨는 함북 회령군 창태 임산으로 배치됐다. 그는 가족들을 마을에 두고 홀로 인적 없는 산 깊숙이 들어가 목탄 굽는 일을 했다. 이씨는 인적 없는 산에서 대화가 거의 없이 지냈고 나중에는 언어장애까지 찾아왔다. 열흘에 한 번씩 집으로 오는 이씨는 가족들과 보낼 틈이 없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이면 당비서에게 불려가 밤 12시 지나서야 돌아왔다. 행동 사항 하나하나를 보고하고 감시를 당했다. 이씨는 딸 연순 씨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고향이 남조선인데, 남조선에는 할머니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고 고모도 있다” 남조선에서 어떻게 왔냐는 딸의 질문에 그는 누가 전쟁(6.25전쟁)을 일으킨 것 같냐고 되물었다. 연순 씨가 “당연히 미국놈이죠”라고 답하자 이씨는 “아버지는 미국에서 보낸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나를 나쁘게 보는 거다. 그러니 어딜 가도 불평 말고 잠자코 있어라”고 말했다. 이규만 씨는 가족과 고향을 보지 못한 채 2000년 4월 13일 눈을 감았다. 국군포로 이만동(1931년생. 1996년 사망)씨의 다섯 딸들은 한국으로 오기까지 중국을 떠돌며 갖은 고생을 다했다. 자식들은 하나같이 국군포로 출신인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한다. 이렇게 멸시 받으면서 사는데, 도대체 우리는 왜 낳았냐, 낳지나 말 것이지 왜 이렇게 고생을 시키냐고 따졌다. 그러면 이만동 씨는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이 몰라서 그래. 내가 북에서는 이래도, 남한만 가면 영웅 대접 받을 거다” 이만동 씨는 19살이었던 1950년 육군에 입대해 참전했다. 1952년 강원도 금화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북한은 그를 아오지탄광으로 보냈고, 탄광일을 하다가 몸이 나빠져 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육군은 1952년 7월 28일 이만동 씨를 전사자 처리했다. 이만동 씨는 말년에 옥수수를 훔쳐 먹으며 연명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1996년 6월28일이었다. 백옥숙 씨는 국군포로 백종규(1928년생. 1997년 사망)씨의 딸이다. 백종규 씨는 1949년 5사단에 입대해 참전했다가 포로가 됐다. 정전 후 함북 샛별 하면 탄광에서 일을 했다. 1992년 퇴직할 때까지 줄곧 탄광일만 했다고 한다. 그렇게 반 평생을 탄광일만 했다. 높이 1m도 안되는 굴에 들어가 석탄을 캐느라 나중에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항상 구부리고 다녔다고 한다. 1995년이 넘어서 백씨는 생활이 어려워졌다. 먹을 것이 떨어져 막내 여동생이 혼수품으로 준비해 둔 옷과 그릇들을 콩 한 되와 바꾸었다. 그것을 한 끼에 열 알씩 먹었다. 백씨는 1997년 8월10일 아사(餓死)했다. “결국 내가 살아서 한국에 못 가는구나. 너희들이 통일이 되면 내 뼈라도 갖다가 고향 땅에 묻어 달라” 마지막 유언이었다. 박현주(가명)씨는 국군포로 김수일(가명·1931년생, 1972년 사망)의 아내다. 박 할머니는 김씨를 함경북도 갱에서 만났다. 그는 1972년 4월 26일, 배에 물이 차서 죽었다고 한다. 김씨가 갱에서 허리를 다친 뒤, 북한 당국으로부터 사회보장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당의 소견서에는 “이 사람은 국군포로다. 악질로 놀았기 때문에 사회혜택을 받을 수 없다”고 적혀있었다. 김씨는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김씨가 죽은 뒤에도, 박씨 가족은 갖은 천대를 당했다고 한다. 남편의 유해를 들고 박씨는 2005년 한국에 들어왔다. 허금자 씨는 국군포로 허영창(가명·1930년생, 1995년 사망)씨의 딸이다. 허영창 씨는 1949년 특무대에 입대, 6사단으로 전출받아 참전했고, 전쟁포로가 됐다. 전쟁 후, 1957년 온성탄광에서 선반깎는 일을 했다.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왼손을 못 썼다. 명절만 되면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에 가고 싶다’며 그렇게 울었다고 한다. 허영창 씨는 1995년 7월18일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임종 당시 ‘살아서 고향을 가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가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우여곡절 끝에 탈북한 딸 허금자 씨는 결국 아버지 유해를 한국으로 모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허금자 씨는 정부를 원망한다. “아버지 유해를 모셔왔을 때, 남편 친구가 국방부에 전화를 했더니 ‘제발 우리들이 머리가 아프니 이런 일에 나서지 말아 달라’고 했답니다. 이런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과연 젊은이들 몇이나 총대를 멜까요?’/nk.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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