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유상준씨의 기막힌 10년 탈출하다 죽은 아들 가슴에 묻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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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조선 2007-12-26 09:32 90년대 식량난에 가족들 굶어 죽자 남은 아들 데리고 10년 전 탈북 지난 8월 탈북자 돕다 중국 공안에 체포… 국내외 구명운동으로 석방 지난 9월 10일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는 중국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관의 한 직원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메일은 ‘유상준(44)씨라는 분이 현재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돼 구류 중입니다. 유상준씨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다음과 같이 알리오니 속히 보내주셨으면 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물품 목록은 ‘내복 한두 벌, 트레이닝복 한 벌, 양말과 팬티 두세 개, 러닝셔츠 두세 벌, 긴팔 티셔츠 한두 개, 영치금 800위안(약 10만원)’ 등이었다. 이 이메일을 통해 국내에 있던 유씨 지인들은 그가 체포됐음을 알게 됐다. 체포된 지 한 달여가 지나서였다. 김씨는 “영사관 측에서 ‘유씨가 한국에 가족이 없어 체포 소식을 늦게 알리게 됐다’고 말했다”면서 “늦게나마 내게 연락이 온 것은 평소 상준이가 나를 ‘형님’ 하며 잘 따랐기에 한국 연고자 대표로 나를 정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유상준씨는 지난 8월 중순 중국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에서 탈북자 지원 활동을 하다가 탈북자 9명과 함께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현재 그는 네이멍구자치구 시린하오터(錫林浩特) 간수소(구치소)에 구금된 상태다. 유씨의 죄명은 ‘불법 월경 조직죄’로 추정된다. 밀입국 기도 단체를 조직하고, 실제로 밀입국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중국 형법 318조 위반이다. 유씨는 중국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국내에서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비영리단체의 지원으로 지난 11월 24일 변호사도 선임됐다. 유상준씨는 탈북자 출신이다. 1963년 7월 6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줄곧 청진에서 살았다. 탈북 직전 그의 가족은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두 아들(철민·철욱군). 그런데 1990년대 북한의 식량 사정이 악화되고 1995년 식량배급이 중단되면서 유씨 가족 역시 힘든 나날을 보냈다. 이 시기 북한에서는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했다. 1997년 겨울을 나며 그는 어머니를 여읜 데 이어 아내와 작은 아들마저 잃었다. 평소 병약한 데다 먹는 것마저 부실하던 작은 아들 철욱군은 어린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다. 유씨 부부는 ‘큰아이만은 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 1998년 4월 19일 유씨는 탈북을 결심했다. 삼엄한 국경 경비망을 뚫고 아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이후 한국으로 들어오기까지 2년8개월 동안 옌볜의 조선족마을을 떠돌며 생활했다. 2000년 최종 목적지 한국으로 오기 위해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몽골 국경 부근까지 기차를 타고 간 뒤, 국경까지 걸어가 철조망을 넘었다. 그가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철조망을 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탈북자들의 이동 경로를 잘 아는 탈북자 최청하(60)씨는 “철조망의 약한 부분을 절단하거나 그 밑에 굴을 판다”면서 “대부분 굴을 파는 쪽을 택한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은 자기 몸 하나 주체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땅을 팔 도구까지 지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맨손으로 굴을 팔 수밖에 없다. “여름엔 그나마 낫습니다. 대륙의 겨울은 지독합니다. 땅이 꽁꽁 얼지요. 언 땅을 손으로 파낸다고 생각해보세요. 잘 파지겠습니까. 작은 아이 하나 통과할 정도의 굴이 만들어지면 어거지로 몸을 들이밉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할퀴어도 멈출 수 없어요.” 2000년 12월 15일 유씨는 한국에 입국했다. 혼자였다. 함께 탈북한 아들 철민군과는 1999년 5월 헤어졌다. 1998년 말부터 심해진 중국 공안의 단속 때문에 어느 조선족에게 아들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정부가 준 정착지원금을 쏟아붓는 등 아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2001년 3월 아들 소식을 알아낸 유씨는 선교회 전도사에게 아들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철민군 일행은 국경 부근에서 공안의 추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철민군은 몽골 사막에 홀로 남겨졌다. 그리고 이내 숨을 거두었다. 당시 12세. 유씨 구명운동을 벌이는 최영호씨는 “유씨는 아들의 기일을 2001년 7월 6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 입국 이후 한동안 출국이 금지된 유씨는 2003년 8월 22일에야 중국으로 갈 수 있었다. 그는 몽골의 어느 시골에 아들이 묻혔다는 얘길 듣고 아들의 유해를 수습해 돌아왔다. 그리고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추도식을 열었다. 아들이 죽은 지 2년 이상이 지난 후였다. 2000년 한국에 처음 온 후 유씨는 탈북자 지원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워낙 순박해서 얘기할 때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지만 탈북자 얘기를 할 때면 아주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입국 후 그는 주로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모은 돈으로 활동자금을 마련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탈북자 지원활동을 하다가 중국에서 3년11개월간 복역한 최영훈씨는 유씨에 대해 “대부분의 활동을 혼자서 했고, 자금 역시 자비로 충당했다”고 했다. 그 역시 지난 6월을 마지막으로 유씨와 연락이 끊긴 상태다. 유상준씨는 체포 직후 영사와 몇 차례 면담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체포 직후 곧바로 재외국민 보호시스템이 발동됐고, 형량을 낮추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씨와 함께 체포된 9명의 탈북자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북송 조치하지 말고,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신변이 보장되도록 협조를 요청한 상태”라고 한다. 유씨 구명운동본부 측은 지난 12월 6일 “현지 변호사로부터 벌금형과 강제추방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전했다. 외교통상부도 “12월 4일 유씨에게 3만위안(약 370만원 )의 벌금과 강제추방 판결이 내려졌다”고 했다. 유씨는 강제추방 전까지 중국 검찰의 항소가 없다면 12월 13일 이후 한국 입국이 가능하다. 장광수 인턴기자·연세대 전기전자공학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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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한마디로 다 표현할수 없는 그 불쌍한 영혼들.....
죽기전에 밥한그릇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간 어린아이들,남녀노소들,늙은이들,정말이지 생각만해도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지금 대한민국땅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고있는 내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그저 고향분들을 생각하면 열심히 살아서 꼭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하겠다는 생각밖에 안듭니다..
전 백성들이 바라는 평화통일 하루빨리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