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북송, 아들과 생이별, 이 여인의 '천국'은 어디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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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08-03-28 03:02 '천국의 국경을 넘다' 탈북자 '미완의 여행' 2007년 북한을 탈출해 3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 수는 2000여 명. 이 시간에도 중국 땅에는 4만 명(추산)이 넘는 탈북자들이 숨 죽여 살고 있다. 마음의 평화와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때까지, 목숨을 건 그들의 여행은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탈북 10년 보고서 '천국의 국경을 넘다' 마지막 순서로 취재팀은 이금희(가명·29)라는 탈북 여성의 삶의 궤적을 취재했다. 강제 북송과 강제 유산, 그리고 아들과 생이별한 후 한국행…. 스물아홉 살 여자의 삶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그녀의 삶에 현재 탈북자들이 겪고 있는 모든 아픔이 숨어 있다. ◆북한 예술학교 학생 김순옥 북한에서 그녀 이름은 김순옥이었다. 아버지는 북송선을 탄 재일교포다. 맏딸 순옥은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했다. 어느날 그녀가 다니던 예술학교 교사가 순옥을 불렀다. "염소 한 마리 가져오라. 일본에 친척이 많으니 부자일 거 아인가." 뇌물을 달라는 것이다. 그녀는 꼭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 중국 가서 한 달만 돈 벌어서 돌아오자. 1998년 9월 순옥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탈북자를 잡으면 손바닥에 구멍을 뚫고 굴비처럼 쇠줄로 엮어 북송하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매주 그런 탈북자 무리를 목격했다. 그리고 남편을 만났다. 조선말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 좋았다. 남편은 한국인이다. 금세 아이를 가졌다. 부부는 손가락을 걸었다. "한국으로 가자." 2000년 5월 어느날 밤, 아내가 압록강변에서 먼저 밀항선을 탔다. 한국 국적인 남편은 곧 여비를 모아 따로 한국에 가서 만나기로 했다. 임신 7개월의 순옥이 배 상판을 열고 들어가 숨었다. 하루만 자면 인천이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군화 소리가 났다. 공해상에서 북한 경비정에게 검문을 당한 것이다. "죽었구나 싶었어요. 그냥 칵 바다에 뛰어들려는데 기회를 못 잡았어요." 신의주 보위부로 끌려갔다. 튀어나온 배를 보더니 간부들이 그녀를 병원으로 끌고 갔다. 채혈을 한 의사가 욕을 퍼부었다. "남조선 씨를 배다니!" 의사는 배를 만지며 태아의 머리를 찾아 길다란 주사를 놓고 갔다. 양동이 하나 던져주고서. 4시간 뒤 순옥이 하혈을 하고, 아이가 죽어 나왔다. 여자는 울지도 못했다. 살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의사에게 가서 '검사'를 받았다. "내가 엄만데, 이 엄마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애가 꿈틀거렸다고, 양동이 속에서!" 그날을 회상할 때, 순옥은 취재팀 앞에서 굉장히 많이 울었다. 한 달 뒤 순옥은 남북정상회담 특사(特赦)로 석방됐다. 순옥은 풀려나자마자 다시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만들어 준 이름을 버렸다. "내 아이를 죽인 나라에서 살 순 없었어요." 조선족 마을에 다다라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내의 전화에 남편은 크게 울었다. 기뻐서, 그리고 너무 슬퍼서. ◆중국의 관광 가이드, 이금희 여자는 이름을 이금희로 바꿨다. 옛날은 망각하기로 했다. 2001년 7월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8개월 만의 조산(早産). 병원에서 고참의사가 의사들을 꾸짖었다. "태아가 산소가 부족한 상태였는데 왜 서둘러서 제왕절개를 하지 않았나, 멍청이들아!" 지민(가명·7)이는 뇌성마비로 태어났다. "진짜 안 살고 싶었어요.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의료사고의 심증이 짙었지만, 그들은 따지지 못했다. 탈북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북한에 끌려가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일주일에 세 번 병원을 찾았다. 의사가 말했다. "면역력이 약하니 감기에 걸려도 안됩니다." 병원비가 끝없이 들어갔다. 금희는 관광가이드로 나섰다. "탈북자가 관광가이드? 들키면 어쩌려고." 남편은 혀를 찼다. "눈에 넣어도 이쁜 내 새끼, 어떻게든 살리고 말 거야." 가이드 팁은 쏠쏠했다. 아이는 정신은 총명해, 중국말도 한국말도 곧잘 배웠다. 2007년 10월. 지민이가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는 정확한 병명조차 몰랐다. 결국 엄마는 중국 탈출을 결심했다. 한국 가서 지민이 치료해야지. 돈을 주고 중국 호적을 구했다. 그리고 여권을 신청했다. 한 달 만에 호적도 나왔고, 여권도 나왔고, 한국행 비자도 나왔다. 엄마는 천천히 아들에게 이별을 준비시켰다. "엄마가 육십 밤만 자고 올게." 엄마는 아들을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 몇 년 뒤에도 입을 수 있도록 큰 옷을 여러 벌 샀다. 아들이 물었다. "엄마, 삼십 밤만 자고 오면 안 돼?" 다음날. 짐을 들고 외출복을 차려 입은 엄마 품으로 아들이 파고들었다. 본능으로 느낀 긴 이별. 아이가 몸부림을 치며 울었다. "엄마 금방 와, 응?"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심장이 터진다는 게, 피눈물을 흘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11월 22일 중국의 한 공항. 여자가 출국심사대 앞에 섰다. 위조여권을 눈치채지 않을까. 손이 땀에 젖었다. 가이드를 하면서 수없이 대리 작성했던 출국신고서. 너무 불안해 몇 번을 고쳐 썼다. 출국심사는 의외로 쉬웠다. "외국여행 처음이죠?" 공안이 물었다. "네." 출국허가 도장이 찍혔다. 곧장 아들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빨리 데리러 올게. 울지 말고, 내 아들." ◆서울의 새내기 직장인 김미혜 2008년 3월 서울. 여자는 김미혜로 불린다. 탈북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야 하는 하나원 교육도 마쳤다. 갓 취직한 작은 회사 사장님이 붙여준 이름이다. 미혜는 여전히 혼돈스럽다. 아들을 데려오려니 수백만원이 필요하다. 한 달 월급은 120만원. 그나마 회사 사정으로 석 달째 받지 못했다. 아들의 병원비는 더 큰 문제다. 자본주의, 적응이 되지 않는다. 120만원이면 중국에서는 엄청나게 큰 돈인데. 아들을 데려오려는 계획이 자꾸 연기된다. 어제도 아들과 통화를 했다. 한참을 전화 받기 거부하던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 미워. 나 버리고 갔잖아." 여자는 외롭다. 북한에서 외로웠고, 중국에서 외로웠고, 한국에서는 더 외롭다. 천국의 국경을 넘었는데, 천국은 또 어디인가. 그녀의 여행은 미완(未完)이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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