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북한 출신 남성의 체험적 행복론 |
---|
동아일보 뉴스뒷이야기 2009-04-15 18:41 앞의 글에서 북한의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다가 서두를 좀 색다르게 시작한 바람에 오지랖 넓게 진도가 ‘상대적 행복론’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예상외로 논란이 많았습니다. 하긴 행복이란 주제가 절대로 모든 이들을 공감시킬 수 있는 주제는 아닙니다. 인생과 행복에 대한 고민은 인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번뇌요, 고대 철학의 모태가 아니던가요.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이 문제를 고민해왔고, 역사 속에 무수히 스쳐간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름대로 이 문제를 논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인생을 걸고 고민 했구요... 그런 행복에 대한 주제를 두고 놓고 논란이 된 김에 오늘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제가 철학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이 문제를 연구했던 것은 아니니 모자람이 많고 두서없을 줄 압니다. 다만 저는 북한과 중국, 남한에서 살아 본 경험도 있고, 또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했던 경력도 있고 해서 행복에 대해 자주 생각해보았습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도 없어 생각나는 순서대로 적은 글이고 더구나 철학적이거나 논리적인 글과는 한참 거리가 있지만 그냥 경험적 소감 정도로 봐주시면 합니다. 이 글은 앞의 글에 대한 속편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광실의 금은보화와 주지육림에 묻혀 사는, 객관적으로는 누구나 부러워할 왕자도 본인 스스로는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거지라고 해도 마냥 불쌍하지만 않다는 식의 상대적 행복관도 이미 다 나온 이야기입니다. ‘왕자와 거지’가 보여주는 사상이 그것이 아닐까요. 물론 거지는 마지막에 왕의 친구로 호화 호식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왕자도 거지를 체험해봤기 때문에 자신이 행복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으며 거지 역시 가난해봤기 때문에 부유함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식의 논리를 오늘 날에 적용해보면 요즘 젊은 세대는 정치적 자유가 주는 행복감을 느끼고 있을까요. 이를테면 요즘 젊은 세대가 ‘이명박 대통령을 마음대로 욕하는 자유가 있어 나는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하는 뜻입니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대통령을 마음대로 욕해서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행복하다는 사람이 100명 중에 과연 몇 명이나 나올지 궁금합니다. 다시 북한에 가서 평백성으로 한 달만 살게 하고 돌아오게 하면 또 대답이 어떻게 나올까요. 1970년대 유신을 거치면서 대통령을 욕하면 감옥에 끌려갔던 시대를 체험했던 사람들이나, 또는 같은 경우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는 북한에서 온 나 같은 사람이나 대통령을 마음껏 욕하는 지금 사회가 얼마나 괜찮은 사회인지,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비교 가능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아래를 보고 비교하면서 행복해하는, 이를테면 상대적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런 상대적 비교에 근거한 행복은 남한에서만 가능하고 북한에선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북한 사람들도 비록 우물 안 개구리의 시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주변과 비교하면서 얼마든지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굶어죽는 북한에서 행복이란 가당키나 한 말이냐, 특히나 행복이란 주제를 놓고 감히 남한과 북한을 비교한다는 것이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대다수의 남한 사람들은 북한 하면 수용소나 꽃제비, 굶어죽는 사람들을 제일 먼저 떠올립니다. 저도 북한에서 한국 하면 노숙자, 거지, 미국의 괴뢰 등 이런 것만 배웠습니다. 한국에 노숙자나 거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를 한국의 참모습이라고 비약시킬 수 없듯이 북한도 수용소나 꽃제비가 북한 사람들의 전체적인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대다수 북한 주민들은 그나마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것도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구는 굶어죽고, 누군 꽃제비가 됐는데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아 참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명박 대통령을 욕하듯이, 김정일을 욕할 수 있는 자유는 이들에게 주어져 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대다수 사람들은 ‘내가 김정일을 욕할 수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수용소에 끌려 안간 것만 해도 다행이다”는 생각이 행복의 범주에 속하는 나라에서 그런 욕은 사치겠죠. 북한 주민들이 행복에 포함시키는 것의 범주는 이처럼 우리와는 좀 다릅니다. 물론 건강이나 가정, 지식 등의 범주는 그나마 한국과 비슷할 것입니다. 정치적인 것은 예외 사항이고, 경제적 만족도는 똑같은 ‘크기’라 할지라도 ‘액수’가 한국과 차이가 납니다. 남한의 평범한 가장이 “서울에서 30평대 아파트를 갖고 중형 자동차를 몰고, 자식을 좋은 학교에 공부시키고 유학까지 보낸다”는 꿈을 이루려면 적어도 5억 이상은 있어야 겠지요. 이 목표를 이루게 되면 이 가장은 어느 정도 행복감을 느끼겠지요. 북한 가장이 이 정도 행복감을 느끼려면 아마 기준은 대략 이 정도가 될 것입니다. “지방의 한 도시에 20평 정도 아파트 입사증을 얻고, 일본산 중고 자전거를 사놓으며 자식을 수재학교인 1고등중학교에 보낸다.” 평양은 서울과 달리 거주가 엄격히 제한돼 있기 때문에 지방의 도시로 설정했습니다. 이 정도 이루려면 한 2~3천 달러면 됩니다. 우리는 북한에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어서 불행할 것 같지만 북한 사람들은 그걸 크게 불행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자유와 행복의 범주에 포함되는 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암에 걸렸던 사람이 암이 완치된 뒤 제2의 인생을 얼마나 큰 행복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렇지만 암에 걸려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내가 암에 안 걸려서 하루하루 정말 행복하다”면서 살지 않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김 부자에게 속고 세뇌돼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모르는 북한 주민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북한에는 행복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게 된다면 이는 잘사는 사람의 오만입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행복지수가 높다는 태평양의 섬나라... 서양인들이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 그들의 눈에 비친 원주민들은 식인종이나 또는 미개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서양인들을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저 사람들은 왜 자기들과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더군요. 결국 서로 모르던 시절엔 서로가 서로에게 야만이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사례, 지금 우리의 삶은 불과 백여 년 전의 왕도 부러워할 정도로 잘 살고 있습니다. 봉건시대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비행기로 해외여행을 하고 집에 가면 찬물 더운물 다 나오지, TV로 온갖 재미있는 영화를 감상하고, 왕도 사용 못했을 수세식 변기 등등...이것이 왕이 꿈이나 꾸었을법한 생활입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봉건시대 양반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분명히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많더라도 말입니다. 봉건사회에서나, 북한에서나, 오늘날 발전된 사회에서나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의 크기는 똑같다고 봅니다. 영국의 한 대학에서 조사한 결과 “남들이 20만 달러 받을 때 10만 달러를 받겠는가, 아니면 남들이 3만 달러 받을 때 5만 달러를 받겠는가”는 질문에 절대다수가 5만 달러를 받겠다고 했답니다. 바로 이것이 상대적 만족도를 중시하는 인간 본연의 본성이 아닌 가 생각해봅니다. 정치적 자유는 인간이 행복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요소일 따름입니다. 12일자 워싱턴 포스트에는 탈북 청소년들이 쌀 밥 앞에서 죄의식을 느낀다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탈북 청소년들의 가장 큰 소망이 “헤어진 가족들과 함께 뜨거운 쌀밥을 다시 먹는 것”이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서울의 하늘 아래엔 이런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 심정 너무나 잘 압니다. 저는 지금 매 순간이 대체적으로 행복합니다. 비교할 수 있는 과거가 있기 때문이겠죠. 어르신들이 그래서 고생을 좀 해봐야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행복만 느끼며 살 수는 없는 법, 때론 불행도 느낍니다. 그렇지만 여기 사람들과 비교해 “나는 왜 작은 집에서 살까” “나는 왜 차도 없나” 이런 물질적인 문제로 크게 불행을 느끼지 않습니다. 감옥에서 정치범으로 죽을 뻔했던 내가 지금은 그때와 비교하면 천국에 살고 있거든요. 제가 가장 불행한 순간은 바로 저 탈북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북한을 생각할 때면 가장 슬프고 불행합니다. 남들이 가족이 모여앉아 즐기는 추석이나 설날에 저의 불행의 강도는 최고조에 이릅니다. 하지만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너무 빨리 적응하는 가 봅니다. 중국에 있을 때 “한국에서 1년에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의 양이 450만 톤”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에 “한반도 한쪽에선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있고 다른 쪽에선 온 북한 주민들이 1년을 먹고 살 수 있는 음식이 쓰레기로 나가다니...”하는 생각에 너무나 한참 동안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온 다음부터는 절대로 음식물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딱 3년이 지나니 어느 순간인가 저도 음식을 남기고 주저 없이 버리더군요. 물론 지금도 가끔은 음식물을 버리려다 가슴을 툭 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너는 굶주리는 북한의 동포들에게 부끄럽지 않느냐”는 목소리를 말입니다. 그렇지만 버리는 행위는 중단되지 않더군요... 그 외에도 제가 과거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안일함에 빠지곤 하는 사례는 많습니다. 오늘 두서없이 행복을 주제로 횡설수설을 적어보았습니다. 하루빨리 북한 주민들도 저들이 느끼는 행복이 이 세상 행복의 전부가 아니며 압제에서 벗어나면 “대통령도 욕할 수 있고, 내가 열심히 일하면 세계 어디든 여행할 수 있고, 굶어죽을 걱정이 없는” 등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새로운 ‘행복의 범주’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네들은 비교할 수 있는 과거의 아픈 체험이 있어 이제 누구보다도 행복해질 일만 남은 사람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 세기 반 전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이렇게 설파했습니다. “전 세계 무산자들은 단결하라. 그대들이 잃은 것은 족쇄요, 얻을 것은 전 세계이니...” 그렇게 잉태가 시작된 사회주의는 100년도 안 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지금은 괴상하게 변종된 마지막 흉물이 북한 땅에 남아있습니다. 나중에 그의 사상이 어떻게 활용됐는지 여부는 떠나, 생전에 착취 받고 억압받는 계층을 대변하려 했던 그 마르크스가 되살아난다면 지금은 이렇게 부르짖고 싶지 않을까요. “북한 주민들이여, 깨어나라. 지금 그대들이 잃을 것은 족쇄요, 얻을 것은 전 세계이니….”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신고 0명
게시물신고
|
행복이란 쓰고 또 써도 끝이 없는 없을 듯 한 주제로 잘 쓰셨네요.
ㅋㅋ 여기에도 역시 상대성 이론 성립되는군요.
아인슈타인도 빙그레 미소를 보내 듯~
행복의 범주울타리가 넓을수록 행복지수는 감소?
그래도 조금은 아리송~ 현재의 삶이 불만이 없으면 행복한거죠.
행복이란 역사적 절대적 상대적의미가 있는 개인적 이면서도 사회적인 심리적현상인것인데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을 비교하며 행복한가 불행한가를 따지면 말이 안될듯 합니다. 똘스또이의 어느 글에 보니 불행은 대체 같은 이유에서이고 행복은 제나름의 것에서 온다고 본적이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 팔떨어진 자가 목숨을 건져 행복하고 경찰관이 자기 주먹이 곧 법이 되지 못해 불행하다고 합니다. 과연 내가 내 능력밖에 일을 남들은 목숨바치고 수많은 돈을 들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 냈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운좋고 행복스러운 일입니다. 단 내 처지라던지 능력이라던지 자신을 오버평가하면 참 힘들지요. 그렇다고 남을 무시하는 말은 아닙니다. 지혜롭게 행복을 찾자는 말 이상 이하도 아님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