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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뒷이야기]남한에 온 탈북 블랑카들
동아일보 2009-05-21 15:59:00 원문보기 관리자 594 2009-05-25 20:10:24
몇 달 전 쇼핑하려 나갔었다.

이곳저곳 보다가 외투 하나가 괜찮다고 생각돼 그 앞에서 유심히 살펴보는데 매장 직원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대뜸 하는 말이

“이거 탈북자도 가능하구요”하는 것이었다.

띠~잉~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멍해졌다.

그것도 한순간...갑자기 머리 회전수가 빨라졌다.

“이 아가씨가 어떻게 내가 탈북자인줄 알았지? 내 얼굴에 표가 나는가? 아니, 지금까지 누구도 겉만 봐선 몰랐는데...말투가 이상했나? 아니, 말도 안했는데…그럼 어떻게 알았을까...훈련받은 아가씨인가? 아님 지금까지 내가 북한에서 온 것을 팍팍 티내면서 살았는데, 나 혼자만 그것을 느끼지 못했는가…”

내가 줄줄이 묻어나오는 이런 저런 오만가지 불안한 생각에 당황해 뭐라 뭐라 설명하는(사실 하나도 귀에 안들어온다) 아가씨 눈을 외면하면서 안절부절 못하는데, 이 아가씨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옆에 다가오더니 외투 안쪽을 뒤집어 보였다.

그리고는 안쪽 털에 붙어있는 지퍼를 쭉 내려보였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아가씨는 “이거 탈부착도 가능하구요”하고 말한 것이다.

그 아가씨가 내 얼굴이 순간적으로 벌개진 것을 눈치챘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이런 것을 보고 도적이 제발 저리다고 한다.

‘이런~ 컴퓨터 크리닝 이후 최대 망신이구나…’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돌아섰다.

컴퓨터 크리닝 사건은 내가 한국에 온지 2달 쯤 됐을 때의 일이다.

남한에서 살아가려면 컴퓨터가 필수라니, 중고 컴퓨터를 사긴 했는데 누가 인터넷을 어떻게 한다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다. 나 홀로 인터넷을 익히고 있던 중에 갑자기 컴퓨터가 이상해 졌다.

자꾸 자동으로 새창이 뜨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제꺽 고치겠지만 그때는 이거 어떻게 고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도 있을 리 만무했다.

컴퓨터 수리소에 가져가야겠구나…이렇게 생각한 나는 아파트 베란다에 나가 컴퓨터 수리소가 없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파트가 높아서 주변 상가들이 잘 보였다.

아, 기쁘게도 저기 수리소가 보였다.

상호는 “컴퓨터 크리닝”. 영어 의미를 떠올려 보니 컴퓨터를 ‘크리닝’ 즉 청소해준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두 번 발걸음하기 싫어서 그냥 본체를 배낭에 메고 나섰다.

들어가 보니 복도에 웬 옷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거기서 눈치 챘어야 할 걸…나는 그냥 안으로 밀고 들어가 주인에게 “컴퓨터 수리돼요”하고 물었다.

주인이 ‘말투가 이상한 이 넘은 또 뭔 소리 하나’는 식으로 쳐다본다.

그래서 내가 한 부연설명...“이거 컴퓨터 크리닝하는데 아닌가요? 컴퓨터 고장 나서 가져왔는데(이때 나는 쪽팔리게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것만 아니라도 좀 나았을걸…) 수리 안 되나요?”

주인이 대답했다.

“여기 세탁소인데요…”

나는 순간 얼굴이 빨개져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세탁소 하고 써 붙이면 되지 컴퓨터 크리닝하고 써 붙이면 있어 보이나. 정확히 말해서 그게 클리닝이지 크리닝이냐? 그나저나 한국은 왜 이리 온통 엉터리 영어 간판이 널렸나. 무식하면서 들어보이려 애를 쓰네…” 등등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

삼겹살 집에 갔을 때 한동안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갈매기살’.

물어보기도 창피하고 해서 그냥 “한국에선 갈매기 고기가 인기인가. 맛 취미가 이상하군. ”하고 생각했었다. 나는 바닷가에서 자란 까닭에 어렸을 때 갈매기를 잡아 먹어본 적이 있는데 물고기를 먹고 사는 갈매기 고기는 비린내 나면서 맛도 없다. 그걸 먹는다니 의아한 것이다.

갈매기살이 돼지의 한 부위를 지칭한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런데 왜 거기에 갈매기살이라고 이름을 붙였는지는 지금도 궁금하다... 요즘 TV 나오는 쇼 광고를 보면 갈매기가 새우깡을 꺼내오고, 갈매기살이라고 써 붙인 고기 집에 들어가다 되돌아 나오는 것이 있다. 그걸 볼 때마다 예전의 내가 생각나 혼자 웃는다…

영어를 좀 한다고 하던 나조차 이러는데 영어를 전혀 모르고 온 탈북자들은 남쪽에서 상당한 혼란을 겪는다고 한다. 인식의 차이 또한 크다.

탈북자들이 쓴 책들을 읽어보면 이런 저런 웃긴 에피소드들이 많이 나온다.

횟집에 갔는데 예쁜 아가씨들이 “아저씨, 개불 주세요”하고 당당하게 큰 소리로 주문하는 것을 보고 기겁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북한 사람들이 보건대 개불은 개의 거시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강 옆의 국회의사당을 지나가면서 의사들이 왜 저런 데 모여 있는 지 궁금해 한 사람도, 신문에서 큰 손이 구속됐다는 기사를 보고는 손이 크다는 이유로 잡아간다니 참 너무하다는 생각을 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정말인지 모르겠으나 어느 탈북자 사이트에는 이런 글도 있었다.

하나원을 갓 나온 한 탈북자 부부가 버스에 올랐는데 이들에게는 교통카드가 하나밖에 없었다. 남편이 버스에 올라 교통카드를 찍으며 호기 있게 말했다.

“2인분이요…”

버스기사가 대꾸했다.

“내가 삼겹살인가요?”

이것을 보니 그래도 나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버스 탈 때는 정말 어려웠다.

버스를 타려 정류장에 간 나는 우선 남들이 돈을 어떻게 내는지 살펴보았다. 말투가 이상해 그때는 함부로 남에게 물어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런 간단한 것도 물어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남들은 다 카드를 삑~하고 긁으면서 올랐다. 내게는 카드가 없었다.

“버스도 저런 카드도 있어야 타겠구나. 저런 카드를 도대체 어디서 사지”하고 고민할 무렵 어떤 사람이 버스에 타기 전에 지갑에서 돈을 꺼내들고 손에 쥐는 것을 보게 됐다. 너무 반가웠다.

그래서 나도 내가 탈 버스가 오자 얼른 올라 만 원 짜리를 내밀었다. 버스비가 얼마인지 모르니 그 정도 내면 거슬러줄 줄 알았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만 원짜리를 운전기사에게 내밀자 아저씨가 날 쳐다본다. 돈 내민 손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나도 가만히 서있었는데 아저씨 눈이 험상해지더니 하는 소리가 “지금 장난해요. 내려서 잔돈 바꾸어 타세요”하고 소리친다.

너무 창피해서 얼른 내렸다. 잠시 정류장에서 관찰해보니 혹 돈을 내는 사람들은 천원을 통에 넣는 것이었다. 나도 다음 버스에 올라 남들이 하는 것처럼 통에 천 원짜리를 넣고 얼른 뒤 자리로 찾아 가는데 버스 기사가 소리쳤다.

“아저씨, 아저씨…거기 노란 셔츠 입은 아저씨.”

“예”하면서 속으론 “아 진짜. 또 뭐…”하고 진짜 참을성을 잃어버리고 짜증이 날려 하는데, 버스 기사가 말했다.

“아, 잔돈을 받아 가셔야죠.” 괜스레 버스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정말 창피했다. 그때 버스비는 600원이었다.

예전에 개그콘서트에서 블랑카가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나는 탈북자들도 꼼짝없는 블랑카들이라고 본다. 이런 탈북한 블랑카들이 지금까지 한국에 1만6000명 정도 산다. 그리고 점차 한국인으로 바뀌어간다. 나중엔 이들 중에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사람도 나온다. 그래도 보통 10년 정도는 한국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남과 북의 통일은 이보다 훨씬 복잡할 것이다. 온전한 의미의 통일은 통일을 선포한 순간부터 또 한 세대가 흘러, 그러니깐 최소한 30년이 더 지난 뒤에 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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