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추억] "사장동지, 우리 보고 죄인이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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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추억] "사장동지, 우리 보고 죄인이래요" 김태산 前조선ㆍ체코 신발기술합작회사 사장 내가 200여 명의 평양 처녀들을 데리고 체코 프라하 공항에 도착한 것은 2000년 7월이었다. 까만 머리의 동양 처녀 200여 명이 한꺼번에 내리니 우리를 쳐다보는 체코인들은 아마 꽤 놀랐을 것이다. 게다가 가슴에는 모두 김일성-김정일 초상휘장(뱃지)까지 달고 있었으니 더 신기해 했을 것이다. 당시 체코에는 북한 은하무역지도국이 2곳, 경공업성이 다섯 곳의 공장에 인력을 수출하고 있었다. 1989년부터 30명 정도의 소규모로 인력을 파견해 오다가 2000년 들어 외화벌이 목적으로 대규모 인력을 내보낸 것이다. 이때 나의 직책은 조선ㆍ체코 신발기술합작회사 북한측 사장이었다. 내각 경공업성 대외사업부 책임지도원을 거쳐 합영회사 사장 등 대외경제분야에서 일하다 이 즈음 체코로 나간 것이다. 프라하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빠르드비치市에 위치한 몇 군데 공장에서 신발ㆍ 피복 ㆍ가방ㆍ부직물을 생산했다. 체코에 나가 있는 평양 처녀들은 북한에서는 중간급 간부들의 자식이거나 출신성분이 좋은 집안의 자녀들이다. 모두 체격과 미모까지 따지는 까다로운 선발기준을 통과한 여성들이었다. 명색이 사장이라지만 이렇게 많은 여성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성 보위원이 함께 나와있어 이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아주 철저했다. 역설적이지만 같은 여성인 보위원이 여성 노동자들을 더 못살게 굴었다. 공장 옆에 여관을 통째로 빌려 여공들의 숙소로 이용했다. 방 하나에 3~4명씩 배정하고, 원래 있던 TV는 다 뜯어냈다. 외부영향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라디오도 모두 압수했기 때문에 음악조차 들을 수 없게 만들었다. 평양에서 북한영화 테이프들을 가지고 와 여관 로비에 설치해 놓고 집단관람을 시켰을 뿐이다. 밤에는 TV는커녕 음악조차 듣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낮에는 10~12시간씩 고된 작업을 시키니 그들은 숫제 일하는 기계일 뿐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여공들의 한달 임금은 150~160달러 정도였다. 이 정도 월급이면 체코에선 그런대로 생활을 유지할만한 액수다. 하지만 이 월급에서 50%는 무조건 국가에서 공제한다. 그러고 나면 보통 70~80달러가 남는데, 그 가운데서 30~40달러는 여관숙식비로 추가 공제한다. 한달에 50달러만 손에 쥐어줘도 여공들은 정말 「만세」를 부르며 열심히 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국(북한)에서 전보가 하루가 멀다하고 날아오는데 『왜 충성자금을 보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해외에 나가있는 북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충성의 외화자금」을 바쳐야 한다. 이것은 법칙아닌 법칙이었다. 이 「법칙」이 여공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됐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그 명목이 무려 6가지나 되었다. ▲김일성-김정일 생일 꽃바구니 값 ▲(원하지도 않는) 북한영화 테이프 값 ▲백두산 혁명전적지ㆍ사적지 건설 지원자금 ▲김정일花 온실 비품비 ▲가축 및 남새(채소) 종자값 ▲장군님(김정일) 만수무강 식품비용 등이다. 이걸 개인별로 다 공제하고 나면 월급은 믿을 수 없겠지만 10~20달러로 줄어들었다. 월급을 주는 나 자신도 눈물이 나올 지경이엇다. 사장인 나도 170달러를 받고 일을 하면서 똑같이 공제를 당하지만 다른 곳에서 알게 모르게 생기는 푼돈이 있어 생활은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하지만 억(가슴)이 막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 처녀들을 보노라면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문제는 그 돈을 가지고 현지에서 살아가는 것은 물론 3년후 집으로 돌아갈 때 가져갈 목돈까지 마련해야 한다는데 있었다. 그러자면 초인적인 내핍생활이 필요했다. 한창 나이의 처녀들이지만 화장품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게다가 10시간 이상의 노동시간은 무조건 채워야 한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체코에서 영어통역으로 함께 근무했던 아내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애들이 월경도 안하고…?,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도 속출하고….』아내는 말끝을 잇지 못했다. 먹지 못해 너무 말라 가슴이 말라붙은 처녀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짐작은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저런 것에 얽매이면 사업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이 평양 처녀들은 죽기 살기로 일을 했다. 몸이 아파 하루라도 쉬는 날이면 나중에 집에 갈 때 1달러라도 부족해지니 마음놓고 쓰러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는 한 여공이 내게 찾아와서 『사장동지, 저 사람(체코 사람)들이 우리보고 죄인이랍니다』하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용인 즉은 이러했다. 우리가 일하는 공장에는 몽골이나 우크라이나, 체코 노동자들도 함께 일하고 있었다. 같은 생산공정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재봉틀 옆에 빵이며 주스, 생수 등을 놓고 수시로 먹고 마시며 일을 했다. 노동강도가 만만치 않으니 그렇게 먹으며 일을 해도 그들은 힘겨워했다. 그런데 바로 옆 생산라인의 북한 여성들 앞에는 주스는 고사하고 물조차 놓여 있지 못했다. 옆에서 일하는 외국인들도 보기 딱했던지 주스나 물을 곧장 건네곤 했다. 하지만 그걸 냉큼 받아먹으면 안된다. 『주체조선의 명예를 더럽힌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남의 호의를 너무 완강하게 거절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나는 직원들에게 새로운 지침을 하달했다. 『동양인들은 빵에 익숙지 않아 퇴근 후 우리 음식만 먹으니 괜찮다』고 정중히 사양하라는 내용이었다. 한창 먹고 떠들며 놀아야 할 나이의 처녀들이 왜 주스며 버터발린 빵이 먹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걸 제돈 주고 다 사먹으면 나중에 평양으로 돌아갈 때 주머니가 가벼워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은 눈 딱 감고 참고 또 참았다. 체코 사람들은 북한 처녀들에게 『무슨 죄를 짓고 나왔길래 이렇게 혹독하게 먹지도 않고 일을 하느냐』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그게 아니라고 극구 해명해도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다. 처녀들이 3년간 체코에 머물면서 일하는 것 외에 한 것이 하나 있었다. 회사 측이 마련한 버스를 타고 프라하 시내를 하루 돌아본 것이다. 그것이 그들 체코생활의 전부였다. 출퇴근 외에 소지품 등을 사기 위해 여관 근처 수퍼에 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공장과 수퍼에 가는 것을 제외한 어떤 외출도 허용되지 않았다. 눈물겨운 체코생활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갈 땐 3년간 모은 피눈물이 스며있는 200~300달러의 돈이 처녀들의 손에 쥐여져 있다. 먹지도 입지도 않고 모은 돈이기에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돈이다. 하지만 그들의 감옥같은 3년을 돌이켜 보면 너무 초라한 금액이다. 체코에 한번 갔다온 여성들은 두 번 다시 그런 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북한생활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다시 체코에 보내 달라고 부탁해 오는 여성들이 꽤 된다. 체코에서의 기억이 악몽처럼 되새겨지지만 북한에서 100달러를 벌려면 아무리 직장에서 아둥바둥 애를 써도 10년은 족히 걸리기 때문이다. 그나마 외국에서 일했으니 그 정도의 돈이라도 개인에게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국내에서 외국과 합작하는 합영회사의 근로자들은 그조차도 구경할 길이 없다. 오직 북한 월급 기준으로 2500~3000원의 돈만 지급할 뿐이다. 지금 북한에서는 1달러가 2500원(일반근로자의 한달 평균월급 수준) 정도 된다고 하니 기껏해야 1달러 남짓한 가치다. 지금 야심차게 진행하고 있는 개성공단에서 근무하는 북한 근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몫으로 지급되는 임금은 달러로 계산돼 국가에서 몽땅 회수해 가고 단지 북한돈 2500원(1달러) 안팎의 월급이 주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무슨 대단한 각오를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하지만 점점 나태해 진다. 그들이 한국 측 사장의 지시를 고분고분 받들 필요도 없다. 자신들의 월급은 국가에서 주기 때문이다. 남측에서 교류다 합작이다 하며 야단법석을 떨지만 그 내막이라도 제대로 알고 뭐든 했으면 좋겠다. 북한당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가 노동자들을 착취한다』고 선전한다. 하지만 국가가 개인을 착취하는 곳이 있다. 바로 북한이다./nk.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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