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집단체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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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공연 참가자 대다수는 학생이다. 평양시 내 학교에서 이들 거의 전부를 뽑는다. 키를 맞추기 위해 각 학교에서 특정 학년을 통째로 빼서 아리랑 공연에 참가시킨다. 같은 학년이라도 키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실제 행사에서는 키 순서로 학생들이 배열된다. 키가 일치해야 하는 장면에는 학년에 상관없이 비슷한 키의 학생들을 전부 차출해서 훈련시키기도 한다. 고난도의 동작 수행을 위해 체육이나 무용을 전공하는 학생은 거의 예외 없이 차출된다. 학생뿐 아니라 어른 참가자도 적지 않다. 직장이나 인민반에서 몇 명씩 뽑아서 공연에 참가시키는데 서로 하겠다고 자원한다. 그 이유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북한에서 집단체조 공연을 준비하는 기간은 약 반 년. 2009년 아리랑 훈련도 2월부터 시작됐다. 초기 훈련은 학교별로 운동장에서 진행된다. 참가해야 할 장면이 정해지면 조를 짜서 동작을 순서별로 하나하나 익히게 한다. 이때는 학생들이 오전에 공부하고 오후에만 훈련을 한다. 조별 동작이 완성되면 김일성광장처럼 넓은 공간에서 훈련을 하고 이후 행사 한 달 전부터는 경기장에서 전체 리허설을 진행한다. 리허설에 들어가면 수업에서 완전히 빠진다. 공연 기간이 두 달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학생들은 리허설을 포함해 석 달가량 수업을 받지 못하는 셈이다. 빠진 수업은 나중에 보충수업으로 대신하는데 매우 형식적이다. 훈련이 시작되면 수업에 전념하기 힘들다.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기 때문에 오전 공부시간에 조는 학생이 많다. 학교 훈련 때는 그나마 훈련강도가 좀 낮은 편이다. 그래도 한 사람이 실수하면 그 조가 함께 벌을 받는다. 벌의 강도는 선생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선생들도 맡은 조 성적에 따라 평가를 받기 때문에 자기 조를 남보다 앞서게 하려 한다.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리는 선생도 있고 부동자세를 강요하는 선생도 있다. 그러나 체벌은 최근에 점점 약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학부모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훈련강도는 낮지만 학생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시기는 초기 한두 달이다. 몸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가 지나가면 단련돼서 웬만한 고난은 견딘다. 7월경 수업을 떼고 전체 훈련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조별로 할 때는 화장실에 갈 일이 있으면 선생에게 말하고 빠질 수 있지만, 수만 명이 참가하는 리허설에선 빠지기 어렵다. 그러니 방광염에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물 자체를 매우 적게 먹이는데다 수분이 땀으로 배출돼 오줌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랑 참가에 다걸기하는 북한 학생 방광염에 걸릴 위험이 가장 높은 학생은 오히려 관람석에서 카드섹션을 담당하는 배경대 학생들이다. 다른 종목은 자기 차례가 끝나면서 빠져나올 수 있지만 배경대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정신을 차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 배경대에 동원되는 인원은 대략 1만명이다. 배경대에 뽑힌 학생들은 수십~수백 장짜리 카드책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 어디에 앉는지에 따라 개인별로 카드가 다 달라진다. 배경대에 뽑히면 학부모들이 학교에 와서 색도화지로 카드책을 만드는 것을 거들기도 한다. 이렇게 만든 카드책은 훈련용이다. 정식 행사용은 국가에서 행사 전에 따로 나누어준다. 훈련용과 실전용이 따로 있는 이유는 훈련 때 훼손되거나 분실되는 위험을 막기 위해서다. 국가에서 지급하는 카드책은 해마다 무게가 달라지지만 2009년의 경우 카드책의 무게는 평균 5.4㎏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체로 만든 훈련용은 무게가 좀 더 나간다. 리허설이 시작되면 카드책을 어깨에 메고 출퇴근해야 한다. 배경대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는 중앙이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얼굴이 자주 등장하고 ‘설레임’ ‘깜박임’ 같은 특수효과를 수시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경대 학생들은 주석단 뒤에서 배경대 총지휘관이 보내는 수기 신호에 따라 일제히 카드를 넘기는 훈련을 한다. 만약 실수를 해 구멍이 발생하면, 저녁 ‘사상투쟁회’에서 단단히 혼난다. 집단체조에 참가한 학생들은 1970년대 중반 집단체조 배경대에 참가했던 한 학생을 본받을 것을 요구받는다. 이 학생은 공연 도중 급성 맹장염이 왔지만 카드책을 마지막장까지 펼치고 쓰러졌다는 것이다. 다행히 병원에 실려가 생명은 유지했고 훗날 학생 최고의 영예인 ‘김일성소년영예상’을 받았다고 한다. 철봉 등의 묘기를 보여주는 기계체조부 역시 매우 힘든 부류에 포함된다. 물론 고난도의 동작은 체육대학이나 체육소조의 훈련된 학생들이 주로 맡지만 하루 종일 손에 안전바를 감고 철봉을 돌다보면 골절상을 당할 확률이 높다. 훈련 도중 가장 무서운 것은 일사병이다. 땡볕에서 하루 종일 훈련을 하게 되면 쓰러지는 학생도 나온다. 하지만 조별 훈련을 책임진 선생들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노동당 입당과 같은 개인적 이해관계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전체 리허설에 들어가면 행사 인원을 제시간에 수송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이때는 군용트럭이 행사 차량으로 대규모로 동원된다. 평양 시내 무궤도전차와 궤도전차도 특별 동원된다. 행사 참가자들은 일반 정류장이 아닌 곳에 대기하고 있다가 수송용 버스를 타고 행사장으로 간다. 보통 저녁 훈련이 끝나고 돌아가는 시간은 밤 10시경이다. 지금은 북한도 행사 요령이 생겨서 행사 인원 수송체계가 잘 잡혀 있지만 20년 전에는 집이 멀리 있는 학생들은 밤 12시까지 훈련하고 경기장 안에서 단체로 자는 일도 많았다. 남녀가 하루 종일 함께 훈련하고 잠까지 함께 자다보니 ‘사고’도 잦았다고 한다. 훈련 기간에 학생들은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닌다. 학부모들이 2인1조로 돌아가면서 학급별로 국을 끓여오기도 한다. 다른 부모보다 못하면 자기 아이가 ‘왕따’라도 당할까봐 없는 살림에 장마당에 나가 육류를 사서 고깃국을 끓여가는 일이 많다. 국가에서 간식으로 빵과 과자 등도 공급하지만 배불리 먹을 양은 아니다. 또 집단체조에 참가하면 많이 먹지 말라고 요구받는다. 배가 부르면 나른해지고 동작이 굼떠진다는 이유에서다. 학급이 행사에 참가했지만 개인적으로 질병이 있는 경우엔 후방조에 소속된다. 후방조의 임무는 행사에 동원된 학생들의 소지품 지키기, 간식 받아오기, 국 날라오기 같은 심부름 위주다. 집이 평양에 있는 학생들은 그나마 낫다. 가장 불쌍한 학생이 대학에서 동원된 기숙사생들이다. 기숙사생들은 비닐봉지에 밥을 받아오는데 기숙사 식당에서 개별적으로 상대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밥을 학급 또는 학과별로 인원수에 맞게 한꺼번에 담아준다. 기숙사 밥 양이 워낙 적은데다 학생 간부들이 그 밥을 빼내 배부르게 먹고 나서 행사장에 가져다주기 때문에 결국 한줌도 못 되는 양만 남는다. 돈이라도 많으면 장마당에서 보충할 수 있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집에서 다니는 ‘자가생’들의 신세를 지지 않는 한 버틸 수가 없다. 집단체조의 훈련 과정이 매우 혹독하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는 이러한 집단체조가 아동학대의 대명사로 비치지만 정작 북한에서는 많은 성인과 학생들이 저마다 이 행사에 참가하려고 경쟁하고 있다. 물론 최근에는 바깥세상을 많이 알고 있는 일부 고위 간부와 부유층들이 자기 자녀를 힘든 훈련에서 빼서 후방조에 포함시키는 사례도 많아지고는 있다. 아리랑 공연 참가선물, TV 많은 사람이 행사참가에 적극적인 이유는 바로 보상 때문이다. 보상은 정치적 보상과 물질적 보상으로 나눌 수 있다. 전에는 정치적 보상의 비중이 컸지만 최근에는 물질적 보상이 큰 동기부여가 된다. 어린 학생들 중에는 구경하기 힘든 간식을 받아먹기 위해 참가하는 사례도 많다. 학생에 대한 보상이 가장 큰 논란이 됐던 적은 1982년 열렸던 음악무용서사시 ‘영광의 노래’ 때였다. 이 공연에는 학생 위주로 약 5000명이 참가했다. 공연이 끝난 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체 참가자에게 ‘공로메달’을 수여할 것을 지시했다. 공로메달은 북한의 상훈 순위에서 제일 하위에 속하는 메달이다. 그러자 북한의 공로자들이 수군거렸다. 특히 6·25전쟁 참가자들은 “우리는 피를 흘리고도 공로메달 받기 힘들었는데 고작 몇 개월 수고한 어린아이들에게 메달을 주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런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이후엔 어린 학생들에게 메달을 수여하지 않는다. 어쨌든 영광의 노래와 몇 년 뒤 완공된 남포갑문 건설은 북한에서 ‘바가지 메달’이란 용어가 만들어진 계기가 됐다. 참가자들에게 메달을 바가지로 푹푹 퍼서 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북한 상훈의 가치를 크게 하락시켰다. 1980년대 말에는 집단체조가 끝난 뒤 한 마리분의 꿩고기를 나눠주는 이색 보상도 있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물질적 보상은 거의 없어졌다가 2000년 집단체조 ‘백전백승의 조선노동당’부터 보상이 강화됐다. 이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번엔 참가자들에게 컬러TV를 준다는 말이 돌았다. 참가지원이 쇄도했다. 서로 하겠다고 나서서는 싸움까지 날 지경이고 탈락자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 TV는 구경도 할 수 없었고 담요와 통조림, 남방과일이 선물로 지급돼 참가자들의 실망이 컸다. 그런데 2002년에는 정말 ‘아리랑’ 상표가 붙은 컬러TV가 선물로 전달됐다. 북한 가정에서 TV수상기는 매우 소중한 가전제품이다. 아직도 지방에는 TV가 없는 집도 많고 특히 농촌에는 컬러TV가 있는 집이 매우 드물다. 요즘 북한에서 컬러TV 한 대 가격이면 4인 가구가 두 달은 먹고살 수 있다. 10년 전에는 컬러TV 한 대 가격이면 4인 가족이 1년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지금보다 훨씬 가치가 있었다. 이런 비싼 가전제품을 경제활동에서 소외된 어린 학생들이 받을 수 있으니 이는 북한에서 자녀가 부모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 효도인 셈이다. 아이들은 집단체조가 끝난 뒤 받을 TV를 상상하면서 힘든 훈련과정에서 이를 악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6·25전쟁 참전자들이나 국가 공로자들은 또 수군거렸다. ‘누구는 피를 흘려도 보상이 없는데 누구는 체조 몇 달 했다고 TV를 받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고. 2000년 집단체조가 끝난 뒤 한 가정에서 학생 2명 이상이 참가한 경우 매 학생에게 선물을 다 줘야 하는지가 논란이 됐다. 결국 갑론을박하다가 “장군님의 방침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재판관으로 등장한 김 위원장은 “모두에게 다 줘라”고 지시했다. 이때는 선물 품목이 식료품이나 담요여서 개개인에게 지급되는 것이 가능했지만 2002년에는 선물이 TV였는데 한 집에서 몇 명이 참가했던 간에 무조건 가구당 TV 1대씩 주었다. 2005년에는 TV보다 훨씬 싼 재봉틀을 주었고 2007년엔 TV를 주었다. 지난해엔 TV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올해 평양에선 “올해는 TV를 주는 해”라는 소문이 돌아 집단체조 참여경쟁이 더욱 치열했다고 한다. 현재 북한에선 재봉틀은 북한돈 3만~5만원(약 10~16달러)이고 아리랑 컬러TV는 30만원(약 80달러) 정도 한다. 그럼에도 아리랑 TV는 북한에서 거래되는 컬러TV 중에서 가장 싼 축에 든다. 그 이유는 고장이 잦고 부속품이 나가도 A/S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 아리랑 TV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고장은 저절로 볼륨이 올라가거나 채널이 바뀌고 색이 오락가락하는 현상이다. 21인치짜리 아리랑 TV는 중국의 대표적 TV 메이커인 창훙(長虹)그룹이 생산한 TV 수상기에 브랜드만 ‘아리랑’이라고 붙여 수입한 것이다. 집단체조에 참가하는 어른들 역시 TV가 탐나는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어른들이 노리는 것은 또 있다. 젊은 사람들은 공장 기업소에서 일하면 노동당에 입당할 기회가 많지 않다. 그런데 집단체조에 참가해 충성심을 입증하면 노동당에 입당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집단체조 참가를 자원한다. 평양시민 세뇌효과 집단체조에 학생을 주로 동원하는 것은 그들이 말을 잘 듣기 때문에 혹독한 훈련을 잘 견디는데다가 정치화된 작품에 성인들이 참가하면 폼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반 년 넘게 스파르타식 훈련을 마치게 되면 학생들은 가슴이 벌어지고 근육이 단련되는 등 부수적인 이득도 얻는다. 하지만 북한 당국이 얻는 이득은 더욱 크다. 대내외적 선전 목적 외에도 언론에 서 간과하기 쉬운 무형의 이득이 또 있다. 바로 수도 평양의 주민과 학생들을 어릴 때부터 김 위원장의 충복으로 세뇌시키고 단련시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김 위원장의 요구와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고 일사불란하게 집행하는 기계적 인간으로 만드는 훈련이 바로 집단체조다. 체제 유지의 핵심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평양 민심은 이렇게 대중 행사를 통해 정교하게 조종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규모 군중 동원이 북한에 긍정적 효과만을 안겨주지는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많은 사람이 생산현장에서 떨어져 나와 행사에 동원되니 그만큼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참가자뿐 아니라 두 달의 공연 기간에는 각종 공장, 기업소에서 사람들이 무조건 동원돼 15만석의 5·1경기장을 모두 메워야 한다. 집단체조를 구경하려면 최소한 한나절은 직장에서 일할 수 없다. 공연을 하는 날이면 경기장에 참가자 10만명과 관람자 15만명을 합해 25만명이 모인다. 평양시내 인구가 약 250만명인 점을 감안하면 평양시민의 10분의 1이 몇 달 동안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매달려 있는 셈이다. 대학생과 학생은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해 공부에 지장을 받는다. 이는 장기적으로 북한의 국가경쟁력에 손실을 가져올 것이 명백하다. 순전히 주민의 사상적 일체감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 대내외 과시의 수단이 되는 다른 집단체조와는 달리 아리랑은 ‘수익’까지 기대한 공연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아리랑 관람료는 특등석이 300달러, 3등석이 50달러였는데 올해부터 이 가격이 각각 400달러와 100달러로 올랐다. 아리랑을 ‘관광 상품’으로 만든 북한은 외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 해외 홍보 사이트까지 만들었다. 한국 정부 당국은 2002~2008년 아리랑 공연을 관람한 해외관광객을 모두 6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로부터 북한이 벌어들인 소득은 1000만달러로 추정된다. 2005년에만 남한에서 모두 7730명이 아리랑 공연을 관람했다. 하지만 최근 핵 실험 이후 국제사회의 제재로 관광객 유치는 시원치 않다. 특히 크게 기대했던 남측 관광객의 유입은 남북관계 경색으로 전면 중단됐다. 지금은 아리랑 공연이 하도 세계적인 논란이 되다보니 그 공연을 관람하는 해외관광객들도 덮어놓고 박수만 치지는 않을 것이다. 화려한 공연 뒤에 묻혀있는 어린 학생들의 고통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리라 믿는다. 아리랑 공연보다 힘든 열병식 하지만 북한의 대중 동원 행사 중에는 아리랑보다 훨씬 혹독한 훈련을 해야 하는 행사도 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종종 TV를 통해 보게 되는 북한의 열병식이다. 군사 퍼레이드에는 육해공군 남녀군인은 물론 한국의 예비군과 민방위대 격인 북한 교도대와 노동적위대도 참가한다. 연습 기간도 아리랑이 6개월인 데 비해 열병식은 10개월~1년에 걸쳐 준비한다. 열병식은 거의 매년 진행되다시피 하는, 북한에선 흔한 행사다. 지난해에는 북한 정권 수립 60주년 행사를 맞아 노동적위대 열병식이 열렸으며 2007년 4월에는 북한군 창군 75주년 열병식이 있었다. 지난해 열병식도 사실 노동적위대뿐 아니라 북한군 현역 군인들까지 참가해 10개월 가까이 훈련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행사 규모가 대폭 축소됐다. 군인들은 어이없게도 10개월 동안 훈련한 모습을 보여줄 기회도 갖지 못하고 모두 부대로 철수했다. 대신 적위대원들만 열병식에 나왔다. 참가자를 선발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키다. 부대별로 인원수가 할당되면 부대에서는 군인들을 집합시켜 키부터 잰다. 동일한 키에서는 신체조건을 고려하며 이밖에 군 경력이 고려된다. 고참의 의사결정권이 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열병식 참여 열기는 그다지 높지 않다. 이유는 너무나 힘든 데다 보상도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수도의 민심을 얻기 위해 막대한 물자를 푸는 아리랑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북한은 ‘평양공화국’과 ‘지방공화국’으로 이뤄졌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수도와 지방의 대우가 하늘땅 차이라는 뜻이다. 군부대에 대한 대우도 지방과 별반 다르지 않다. 군은 명령만 내리면 불평을 전혀 할 수 없는 조직이라는 특수성도 고려됐을 것이다. 훈련이 너무 힘들다보니 간부 자제들은 이 핑계 저 핑계로 모두 빠지고 결국 힘이 없는 서민 자식들만 참가하는 경우도 많아 불만이 쌓이고 있다. 특히 노동적위대를 대표하는 집단은 주로 대학생인데 이들 속에서는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의 차이가 두드러진다고 한다. 보통 군단급 부대, 주요 군관학교, 주요 중앙대학들이 개개 단위별로 1개 종대를 구성한다. 예를 들면 5군단 종대, 최현군관학교 종대, 김책공업대학 종대, 만경대혁명학원 종대 하는 식이다. 물론 미사일이나 기계화부대는 따로 종대를 구성하는데 전차나 차량이 동원되는 종대는 인원이 일반 행진 종대보다 적게 구성된다. 열병식에는 보통 50개 안팎의 종대가 참가한다. 1개 행진 종대에 참가하는 인원은 정확히 288명이다. 1개 종대는 12개 횡대로 구성되며 매 횡대는 다시 24명으로 이뤄진다. 이 중 첫 번째 횡대에 서는 24명과 각 횡대의 첫 번째 12명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이들이 종대 속도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행진 속도는 종대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다. 아무리 키를 중시해 뽑아도 288명의 키가 전부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키가 큰 사람은 앞에 서고 작은 사람은 뒤에 선다. 종대 앞에서 나가는 지휘관이 그 종대를 책임진 대대장이다. 그 밑에 중대장, 횡대장(소대장), 분대장들이 있다. 발 올린 뒤 오래 버티기 훈련 초기 훈련은 부대별로 각각의 연병장에서 진행된다. 훈련의 첫 단계는 몸 풀기와 발끝 펴기다. 행진 자세로 한 발을 최대한 높이 들어 올린 상태에서 오래 버티기를 연습한다. 이런 훈련이 한 달쯤 진행된 뒤에는 횡대별로 행진 훈련을 한다. 일제히 ‘하나 둘 하나 둘’하고 외치면서 발을 맞춰 행진하기를 몇 달 동안 반복한다. 군부대는 하루 종일 훈련이 가능하지만 대학은 초기에는 수업과 훈련을 병행한다. 아리랑 훈련과 마찬가지로 훈련이 고되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이 많다. 열병식에 뽑힌 대학 기숙사생들은 이때부터 뽑히지 않은 기숙사생들과 다른 식당을 쓴다. 밥량이 평소의 두 배로 늘고 기름도 한 숟가락씩 밥이나 국에 얹어준다. 흥미로운 점은 열병식 참가자들이 아침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일반 식당에서 먹는다는 점이다. 점심과 저녁만 특별대우다. 왜 아침은 특별대우를 해주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하루 훈련에서 가장 힘든 때는 훈련이 끝난 뒤에 받는 총화시간이다. 총화 때는 그날 잘한 사람은 칭찬해주고 못한 사람은 앞에 내세워 비판한다. 종대 총화가 끝나면 중대 총화가 있고, 중대 총화가 끝나면 소대 총화, 소대 총화가 끝나면 분대 총화를 또 벌여야 한다. 몸은 땅으로 잦아드는데 1시간 넘게 총화를 하다보면 인내심이 바닥난다. 총화가 끝난 뒤에는 그날 못했다고 지적된 사람들이 모여 새까만 밤중에 보충훈련을 하기도 한다. 종대별로 훈련을 진행하다가 열병식을 반 년쯤 앞두고는 전체 열병식 인원이 평양시 사동구역 송신동에 있는 4·25여관에 총집결한다. 1998년 문을 연 이 여관은 열병식 참가자 전용 여관이다. 이 때문에 방 한 칸에 100명씩 자게끔 만들어져 있다. 이전까지는 미림비행장 활주로에 천막을 치고 단체훈련을 벌였다. 그 시절의 고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한 겨울에 천막생활을 하면 추위가 장난이 아닌데다 가장 어려운 점은 씻을 장소가 없다는 것이다. 활주로에서 만 명 넘는 인원이 동시에 발을 구르면서 훈련을 하면 평양시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뽀얀 먼지 기둥이 지상 수백m까지 솟구쳐 오른다. 그런 뽀얀 먼지 속에서 하루 종일 훈련을 하면 눈만 반들반들해지고 훈련복은 땀에 젖어 하얀 소금이 내비치는데 겨울에 제대로 씻을 수가 없다보니 역한 냄새가 진동한다. 특히 남자보다는 여성들이 훨씬 고통스럽다. 날씨가 좀 따뜻해지면 훈련이 끝난 뒤 밤에 미림비행장 옆을 흐르는 강으로 남녀가 함께 뛰어들어 목욕을 했다. 여자는 강 위쪽에서, 남자는 아래쪽에서 멀찍이 떨어져 목욕을 했다. 다행히 4·25여관이 건설된 뒤 목욕 걱정은 한시름 놓았다. 예전보다 훨씬 조건이 좋아졌다고 볼 수 있다. 4·25여관에 입소해서부터는 열병식 참가자들에게 주는 식사 질이 굉장히 올라간다. 매일 사탕 15알이 공급되고 1주일에 한 번 계란도 지급되며 돼지고깃국도 먹인다. 북한과 중국 간의 수출입 기록을 살펴보면 매년 북한이 중국에서 돼지고기를 수천 t씩 수입한 것을 알 수 있다. 북한 연구자들이 가난한 북한이 돼지고기를 수입해가는 이유를 놓고 의아해 하는데 사실 이것은 행사 참가자들의 영양공급용으로 수입되는 것이다. 러시아식 발차기에서 천리마 발차기로 4·25여관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 바로 지옥훈련이다. 군인들은 물론이고 대학생들도 여기서는 군율을 적용받는다. 모든 생활을 군대와 똑같이 한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4·25여관에 입소해서는 외부와의 접촉이 일절 차단된다는 점이다. 리허설을 위해 김일성광장에 나가는 것을 빼면 바깥에 나갈 수도 없다. 물론 경비원에게 뇌물을 주면 몰래 외부 면회인과 접촉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6개월 훈련 기간엔 휴식도 주어지지 않는다. 하루 쉬면 발이 굳어진다는 이유 때문이다. 원래는 일요일 오후는 휴식시간이지만 각 종대장이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일요일 오후에도 잘 못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훈련시킨다. 4·25여관에는 김일성광장을 모방한 주석단과 훈련장이 있다. 김일성광장 주석단 앞 도로의 길이는 216m이다. 훈련장 길이 역시 216m이다. 216m로 만든 이유는 김 위원장의 생일이 2월16일이기 때문이다. 열병식 참가자들은 216m를 정확히 1분40초 안에 통과해야 한다. 이 속도를 맞춤과 동시에 보폭 70㎝, 발 높이 60㎝를 맞추어야 한다. 열병식 행진곡은 한 곡이 정확히 120보를 걷게 구성돼 있다. 이것을 ‘120보 주악’이라고 한다. 이 주악에 맞추어 행진하면서 횡렬과 사선을 맞추는 훈련이 매우 중요하다. 6개월 동안 훈련하는 내용은 이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에는 열병 행진 때 러시아식 발차기를 했는데 1996년경에 ‘천리마차기’라는 새 방식이 도입됐다. 천리마차기를 일명 ‘교차차기’라고도 한다. 한 발로 땅바닥을 힘껏 때리면서 그 반동을 이용해 다른 발을 들어올리는 것을 말한다. 예전의 열병식 대오가 척~척~하는 느낌으로 행진했다면 새 발차기가 도입된 뒤로는 퉁~퉁~튕겨져 나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방법의 발차기는 예전에 비해 내장에 훨씬 심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4·25여관에 입소해 한 달 안에 방광에 문제가 생겨 피오줌을 싸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온몸의 힘을 모아 하루 종일 콘크리트 바닥을 퉁퉁 차게 되면 내장이 다 뒤틀리고 방광에 무리가 가는 것이다. 실제 행사에선 1개 횡대가 24명으로 구성되지만 훈련 때에는 전 기간 횡대가 25명으로 구성된다. 25번째는 부상이나 질병을 대비한 예비용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부상자가 없으면 동작이 가장 미숙한 사람이 후보 자리로 밀려나 당일 행사에 빠진다. 1년 동안 똑같이 훈련받고도 정작 행사에선 배제되는 것이다. 이런 후보자리는 훈련생들에게 굉장한 자극제로 작용한다. 죽어라고 훈련하고 최종 행사에 빠지는 상황은 누구도 원치 않는다. 열병식 훈련기간에 행진 연습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종대별로 ‘충성의 사회주의 경쟁’이라는 것을 벌여 훈련생들로 하여금 새벽부터 일어나 여관 안팎의 김정일 우상화 선전물을 닦게 만든다. 훈련 중 중간 휴식시간마다 정치교양사업이 진행된다. 간부들은 육체적 고통은 정신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으며 훈련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충성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교한다. 열병식에 참가했던 한 탈북자는 훗날 북한관련 인터넷매체 ‘데일리NK’에 기고한 글에서 “한번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이라는 노래를 가지고 50개가 넘는 종대 전체가 합창 경연대회를 벌이기도 했다. 한자리에서 50번이나 넘게 같은 노래를 듣고 있자니, 그리웠던 장군님도 정나미가 떨어질 지경이었다”고 회상했다. 행사 두 달 전부터는 김일성광장에 나가 실전연습을 벌인다. 평양시내 교통을 감안해 밤중에 훈련을 하고 아침에 들어오는 때가 많다. 이렇게 시내에 나가는 날이면 정보가 어떻게 밖으로 샜는지 열병식 참가자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김일성광장에 모여든다. 혹시나 만나게 되기를 기대하고 찾아와도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때는 김일성광장을 철저히 봉쇄하기 때문이다. 행사를 나흘가량 앞두고 전체 참가자들에게 정식 행사 복장이 지급된다. 군복과 허리띠, 모자, 군화가 지급되는 것이다. 그 전까지 훈련복장은 모두 자체 부담이다. 군화 밑바닥에는 말발굽처럼 생긴 징을 박게 한다. 광장 바닥에 쩡쩡 울려 발을 구르는 소리의 청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의도다. 그런데 이 징이 군화 바닥을 뚫고 올라와 많은 참가자가 고생한다. 행사 당일에는 단추와 허리띠 등 황금색이 나는 금속제품을 닦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햇빛에 반사되면 장군님의 시력에 위해를 준다는 이유에서다. 1년 동안 그토록 힘들게 준비해도 행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다. 온 광장이 군악소리와 만세소리에 파묻히고, 자기 스스로도 힘껏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하다보면 미처 정신도 차리기 전에 손발이 자동적으로 무의식중에 올라간다. 머릿속이 백지가 된 상태에서 1분40초가 지나가고 정신을 차리면 자신의 몸은 이미 광장을 벗어나 있다. 행사가 끝나고 다시 4·25여관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 1분40초를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던가. 추위와 더위, 굶주림에 시달렸던 지난 1년이 너무나 허망하다는 사실이 그때야 비로소 피부에 와 닿기 때문이리라. 어떤 열병식에는 김 위원장이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열병식 참가자들이 느끼는 허무감은 말로 상상할 수가 없다. 행사 참가 후 몸무게 10kg 줄기도 여관에 돌아오면 최종 행사 총화가 기다린다. 훈련생들을 악독하게 훈련시켜높은 점수를 받게 한 종대 간부들은 높은 훈장도 받고 즉석에서 노동당에 입당도 한다. 이런 즉석 입당을 ‘화선입당’이라고 한다. 행사 참가자들에게는 행사 당일 입었던 군복과 허리띠 군화 등 복장이 선물로 지급된다. 그리고 별로 가치도 없는 ‘열병식 기념메달’이 하나씩 수여된다. 맨 앞줄 횡대 24명과 각 횡대의 첫 번째 12명에는 메달보다 급이 하나 더 높은 국기훈장 3급이 지급될 때도 있다. 이것도 북한에서 너무 흔한 훈장이라 어디 나가 별로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다. 1년 동안 고생한 대가는 이게 전부다. 6개월 고생하고 컬러TV를 받는 평양시민인 아리랑 공연 참가자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차별 대우다. 특히 아리랑 공연 참가자들과는 달리 열병식 참가자들은 그때 고생한 후유증이 참으로 오랫동안 몸에 남는다. 열병식이 끝나면 참가자들에게 휴가가 주어진다. 대학생은 못 간 방학을 이때 다 보낸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휴가를 가서 열병식 복장에 메달을 달고 지방 도시를 걸어가면 처녀들의 시선이 쏠려 으쓱해지는 멋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깨다보니 열병식에 참가했다는 것이 별로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들의 가슴에 달린 메달이 상처뿐인 영광임을 사람들이 알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북한군 열병식의 일사불란함은 전세계적으로 으뜸일 것이다. 어떤 군대도 그처럼 동작의 일치성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열병식이 계기 때마다 빠짐없이 열리는 것을 보면 북한 당국은 사람이 기계처럼 취급되는 군국주의적 국가의 장점이 매우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아리랑 공연과 군 열병식은 북한을 대표하는 양대 군중 행사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군중시위나 횃불행진도 명절을 계기로 으레 벌어지는 행사다. 이런 행사는 보통 3개월 전부터 준비한다. 시민들과 대학생들이 주로 참가하는데 이것 역시 아리랑이나 열병식과 비교하면 훨씬 쉽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전승기념일(7월27일), 조국해방기념일(8월15일), 공화국창건일(9월9일), 노동당창립일(10월10일) 등 북한의 주요 명절이 여름과 가을에 있다보니 행사는 주로 한여름에 준비된다. 땡볕에 단 아스팔트 위에서 사람들은 하루 종일 만세를 외치며 땀을 쏟아야 한다. 그중에서도 더 운이 나쁜 사람들은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깃발대’. 정전으로 버스가 다니지 않는 날이면 길이가 4m에 가까운 무거운 깃발을 들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행사장까지 몇 십리를 걸어 다녀야 한다. 북한의 주요 행사 장면을 TV로 보면 김일성광장 바닥에 ‘일심단결’‘경축’대형글씨가 새겨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광장 바닥에 사람들이 보통 세 가지 색깔의 꽃다발을 들고 있다가 김일성광장 주석단 꼭대기에서 지휘자가 보내는 수신호에 따라 정해진 색깔의 꽃다발을 들기 때문이다. 집단체조의 배경대와 비슷한 원리다. 옆 사람이 빨간색을 들어도 자기는 파란색을 들어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에 동작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수신호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배고픔에 더위까지 먹고 고달픈 훈련을 하게 되면 살이 엄청 빠진다. 기자도 평양에 있을 때 각종 행사에 참가했는데 석 달 만에 10㎏ 이상 살이 빠지는 사람을 여럿 봤다. 그래서 그런지 평양에선 일반 주민치곤 뚱뚱한 사람이 거의 없다. 반면 간부는 힘든 육체 동원에서 빠진다. 거기에 비싼 술과 기름진 안주를 늘 먹고 승용차를 타고 다니니 배가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평양의 일반 시민은 배가 나오고 거기에 뒷짐까지 진 사람과 마주치면 주눅이 든다. ‘뱃살과의 전쟁’을 치르는 서울 시민과 뱃살이 부러운 평양 시민이 어쩌면 오늘날 남과 북을 대변하는 상징은 아닐까. 주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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