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탐관오리들에게 짓밟힌 조세웅의 운명 |
---|
북한에서 인민을 사랑하는 지도자는 필연코 탐관오리들과의 싸움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세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가는 곳에선 인민들이 만세를 불렀지만 대신 탐관오리 간부들의 비명소리도 끊이질 않았다. 권세를 앞세워 인민 위에 군림하면서 전화 한통만 해도 줄줄이 상납 받아왔는데 조세웅이 오면서 암행어사식 조사가 시작되니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거기에 조세웅이 탐관오리들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인민’을 걸핏하면 내세우면서 일을 하도록 몰아세우니 도무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탐관오리였던 것이 갑자기 ‘인민의 충복’인양 행동해야 했으니 간부들에겐 조세웅의 군림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조세웅이 가는 곳마다 간부들이 그를 모함하기 위해 끊임없이 중앙당에 신소를 했다. 김일성에게 ‘조세웅 만세’를 일러바친 간부도 당의 유일체제확립에 어긋나게 개인숭배가 생겨난다는 것을 걸고 넘어졌다. 김일성만 숭배할 수 있는 북한에서 인민들이 조세웅이란 개인을 어찌 찬양할 수가 있는 가 하는 것이 이유였다. 조세웅은 성격이 대쪽같고, 항상 원칙주의자인데다, 비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간부들이 신소 대부분은 모함으로 드러났다. 조세웅은 걸릴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일성이 신의주에 가서 ‘조세웅 만세’ 보고를 들은 뒤에는 그의 운명도 끝이 났다. 조세웅이 1989년 평안북도에 부임해 온지 1년 뒤였다. 조세웅이 어떻게 해임됐는지는 나도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소문에는 평안북도 도당 조직비서를 비롯한 부하 간부들이 비열한 함정을 파서 해임시켰다고 한다. 어느 날 조세웅은 간부들이 모인 술자리에 참가했는데, 간부들이 술을 못 마시는 조세웅에게 억지로 술을 자꾸 권해 취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 한 간부가 조세웅을 부축해 나오다가 의도적으로 몸을 빼서 조세웅을 계단에 쓰러지게 했다고 한다. 다음날 중앙당 신소과에는 “조세웅이 늘 술에 만취돼 사는데다 술주정이 매우 심해 간부들을 마구 대하고 계단에 누워 자는 등 추태가 심해 도당 사업에 지장이 많다”는 신소가 올라갔다. 며칠 뒤 중앙당에서 내려와 조사를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일도 모함인 것이 드러났겠지만, 이때는 김일성이 ‘조세웅 만세’ 소식을 들은 뒤였다. 북한에서는 이런 개인숭배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조세웅은 이 검열 뒤 이러저런 말도 안 되는 비판을 받고 심심산골의 임산사업소 초급당비서로 쫓겨났다. 북한에서 도당책임비서는 한국의 도지사 못지 않게 권세가 있는 직위다. 도당 책임비서는 중앙당 비서와 같은 레벨이라고 볼 수 있다. 총리가 도당 책임비서로 가고 도당 책임비서가 총리로 오는 일은 북한에서 흔한 일이다. 이런 상당한 직위인 도당 책임비서가 심심산골의 임산사업소로 간다는 것은 정말 죽을 죄를 짓지 않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산골에 좌천돼 있던 조세웅은 이후 철도부 초급당비서를 거쳐 말년에 내각 사무국 당위원회 책임비서를 지냈다. 모두 도당 책임비서와 비교하면 급이 한참 떨어지는 직위인데다, 별다른 권력도 휘두를 수 없는 한직이었다. 조세웅은 1998년 12월 사망했다. 당시는 황장엽 비서가 망명해 오고 서관희 비서가 간첩으로 몰려 죽는 등 살벌한 숙청바람이 불 때였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정확치는 않다. 다만 김일성 사망 뒤 권력 유지에 불안감을 느끼던 김정일이 아버지 시기 때의 일꾼인 조세웅을, 그것도 인민들에게 추앙받는 조세웅을 가만 두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추정이 갈 뿐이다. 북한 체제 통틀어 조세웅만큼 인민들이 따랐던 간부는 없다. 조세웅과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연형묵이라는 간부도 일을 좀 하던 축에 끼운 간부다.
김정일과 함께 있는 연형묵 전 총리
조세웅과는 달리 연형묵은 남쪽에도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총리를 거쳐 고난의 행군시기에 가장 척박하다는 자강도 책임비서를 역임했고 2005년 10월 사망했다. 그런데 연형묵도 암살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이 지난해 29일 보도했다. 관련보도 보기 이에 따르면 12월 3일 함경북도 회령시를 시찰한 김정일이 연형묵의 이야기가 나오자 버럭 화를 냈다는 소식이 간부들 속에 돈다고 한다. 오수용 함경북도 책임비서가 회령식료가공공장에서 생산한 ‘말린 산나물’을 김 위원장에게 보여주며 “함경북도 인민들이 강계정신을 본받아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고 자찬하며 “함경북도 간부들 속에서 연형묵 동지를 따라 배우기 위한 운동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자 갑자기 김정일의 얼굴이 굳어지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옆에 있던 호위부관들이 부축해주는 가운데 “이 자리에서 왜 연형묵의 소리가 나오냐”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이러한 소식이 간부들 속에 알려지면서 한 때 내각총리를 지냈던 연 전 총리의 석연치 않은 사망원인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양강도 혜산시의 또 다른 간부도 “연 전 총리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며 “백마-철산 물길공사장을 돌아보고 오다가 미림다리에서 자동차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주장했다. 이 간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연형묵은 1992년 12월부터 2005년 6월까지 자강도당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고난의 행군’시기 자강도 주민들의 먹는 문제와 전기 문제를 해결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북한의 주요 군수공업기지이며 상당수 군인들이 밀집된 자강도에서 연형묵의 인기가 치솟는데 대해 불안감을 느낀 김정일은 2005년 6월 그를 자강도에서 떼어내 실권이 없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명목상 승진시켰다. 하지만 이때 연형묵은 김정일의 ‘강성대국론’에 대해 “할 것을 하겠다고 해야지 다시 한 번 거짓말을 하면 인민들이 믿지 않는다”며 정면으로 반대했다고 한다. 심기가 불편해진 김정일은 2005년 10월 2일, 연형묵에게 ‘백마-철산 물길공사’ 준공을 책임질 데 대해 지시했다. 10월 10일, 노동당창건 60돌 행사가 끝난 후에 ‘백마-철산물길’의 일부 구간들에서 제방들이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이 들리지 김정일은 연형묵을 물길공사장에 내려 보냈다. 공사장을 돌아보고 오던 그의 승용차는 평양 미림다리를 건너다가 갑자기 나타난 대형트럭과 충돌했다. 다행히 연형묵은 죽지 않았다. 그는 노동당 고위간부들의 전용병원인 ‘봉화진료소’에 실려갔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대화도 자유롭게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사고 닷새 후인 2005년 10월 22일에 병원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췌장암으로 2004년 11월 러시아에서 수술까지 받은 연형묵은 사망하기 직전인 2005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60돌 행사에도 참가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북한 당국은 그의 죽음에 대해 오랜 병환으로 인한 사망으로 발표하고 장례식도 요란하게 치렀다. 하지만 2008년에도 북한 주민들 속에서 연형묵 암살설이 크게 나돌아 노동당과 사법기관들이 총출동하여 소문 막기에 나서는 등 연형묵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다는 것이 RFA 소식통들의 증언이다. 어쩌면 연형묵과 조세웅은 같은 수법으로 죽었을 수가 있다. 차가 몇 대 없는 북한이지만 유난히 고위층 교통사고가 많다. 특히 1970년대 초부터 이상하게 김정일에게 반대하는 고위층들이 교통사고로 줄줄이 사망했다. 지난해 6월에도 김정일의 한쪽 팔이라던 이제강 조직지도부 1부부장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조세웅의 사례는 왜 북한에 참다운 간부들이 있을 수 없는지를 깨닫게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김정일의 주변에는 오로지 돈과 안위만 탐하는 탐관오리, 아첨꾼만 득실득실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진짜 찾을 길이 없다. 그것이 무엇이 문제가 될까. 지금은 김정일의 무자비한 독재통치로 인해 북한이 그런대로 붕괴되지 않을 수 있지만, 김정일만 죽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탐관오리와 아첨꾼들에겐 의리니, 충성이니 하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이다. 이해관계만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김정은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들에게 당근을 던져주어서도 안될 일이다. 썩은 호박이 흙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다. 다만 그 과정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가 문제일 뿐이다.
신고 0명
게시물신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