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현대판 '꽃파는 처녀' 누가 만들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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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한에 대한 찬양은 있었을 망정 김일성 개인숭배와 관련한 선전 색채가 깊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내부 사정을 살짝이라도 엿볼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덧붙여 말하자면 김정일이 '조선 화보'에 등장한 것은 1982년도부터다. 1972년 11월 발간된 잡지의 표지는 영화 '꽃파는 처녀'의 여주인공 '꽃분이'를 연기한 홍영희(당시 나이 16살)이 장식했다. 그녀는 이후 수많은 훈장을 받은 인민배우가 됐고, 구 1원권 지폐에 등장하기도 하는 등 북한에서는 가장 유명한 여배우 중 한 사람이다. '꽃파는 처녀'는 북한이 불후의 명작이라고 선전하는 가극이다. 영화는 1972년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가극을 바탕으로 제작됐다고 한다. 유럽의 대표적인 영화제 중 하나인 체코의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제18회)에서 특별상을 받는 등 북한에서 자랑하는 영화 중 하나다. 영화는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를 시대적 배경으로 악독한 지주와 일제 순사에게 억눌려 살던 주인공 꽃분이 일가의 생활을 통해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기둥 줄거리로 삼고 있다. 그 바탕에는 체제 선전이 깔려 있지만 우상화가 그다지 확립되지 않은 시대여서인지 김일성이 등장하지 않는 등 북한 영화로서는 드물게 순수 예술로 감상해 볼 가치가 있다. '조선 화보'는 영화 '꽃파는 처녀'에 대해 "나라를 빼앗긴 인민의 민족적 수난과 지주·자본가 계급의 횡포와 억압, 착취 밑에서 학대받고 있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을 예술적으로 그리면서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혁명의 위대성을 실천하고 있다"고 해설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선전의 이면에는 정치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1972년은 북한의 독재 체제를 검증하는 중요한 해다. 환갑을 맞이한 김일성은 국가 주석의 자리에 올랐고, 헌법에는 주체사상이 명기됐다. 또 그 뒤부터 김정일이 본격적으로 김일성 우상화를 이끌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아버지에 대한 우상화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후계자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차지하게 된 것이다. 김정일 자신도 그 해 10월 당중앙위원이 되어 후계자로서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김정일은 특히 후계자 경쟁 과정에서 예술이나 문화 영역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러한 배경에서 봤을 때 '꽃파는 처녀'를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한 것은 정치적 이벤트로써의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꽃파는 처녀'가 북한이 의도한 프로파간다의 의미에서는 크게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본래의 테마인 '민중혁명의 필요성'은 이 후 독재 체제로의 발걸음이 가속화하며 북한 당국 스스로 부정한 꼴이 됐다. 영화는 주인공인 꽃분이가 꽃을 파는 것과 동시에 민중에게 혁명의 희망과 용기를 준다는 감동적인 스토리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지금 북한에서 민중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꽃분이는 어디에 있는가? 오히려 북한에서는 '또 다른 꽃'을 파는 여성들이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3월 28일 데일리NK는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얼마 전부터 꽃을 한 송이씩 파는 여자들이 늘어났는데, 이도 몸을 파는 여자들이라고 보면 된다"는 소식을 전한 바 있다. '민중 혁명'을 호소하는 '꽃파는 처녀'는 나타나지 않은 채 반대로 생활을 위해서 몸을 팔지 않을 수 없는 '꽃파는 처녀'가 등장하고 만 것이다. 영화 '꽃파는 처녀'의 제작을 주도한 것은 김정일이다. 몸을 파는 '꽃파는 처녀'를 만들어 낸 것도 김정일이다. 그런 면에서 김정일은 영화에 등장하는 '악덕지주'에 다름 아니다. 북한 주민을 착취, 수탈해 최악의 생활고에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꽃분이는 영화 속에서 비록 더럽혀진 치마, 저고리를 입고 있지만 그 눈속에 미래에 대한 희망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북한 '꽃파는 처녀'들의 눈에는 생활고로 인한 초조와 절망감만이 가득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북한에서도 혁명을 호소하는 '꽃파는 처녀'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인가? 그 날이 빨리 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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