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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300만 餓死 시기에 캐비아 찾아 먹던…
데일리NK 2011-12-21 11:56:17 원문보기 관리자 1207 2011-12-22 03:48:00



▲김정일이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와인 마시는 모습(좌측 상단)과 김정일이 중요 간부들에게 선물하는 벤츠 차량번호(우측 상단),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72호 초대소(하단)./데일리NK 자료사진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들은 모두 끔찍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일명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대아사'에 대한 기억이다.

북한의 식량난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약 4년 동안 가장 극심한 형태로 나타났다. 조사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이 기간동안 적게는 200만 명에서 많게는 300만 명 정도의 주민이 식량난으로 인한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회고록을 통해 "1995년에 들어서면서 평안북도에 홍수가 나면서 식량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 됐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도처에서 굶어 죽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나왔다"고 증언했다.

90년대 초반 구(舊) 공산권 국가들의 몰락 이후 북한의 경제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그러나 북한의 경제몰락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북한은 정권수립 이후 대외 경제교류의 비중을 낮게 두는 자립경제노선을 일관되게 추진해왔다. 이러한 폐쇄 경제 및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대한 집착으로 북한의 경제 실적 부진은 수십 년간 누적돼 왔다.

더군다나 김정일은 1980년대 자신에 대한 1인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평양 현대화 및 우상화 사업을 추진했다. 특히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1988년 서울올림픽 견제 목적) 개최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으며 휘충거리던 북한 경제를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빠뜨렸다.

여기에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까지 겹치며 국가 주도의 생산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됐고 배급 체계 또한 멈춰섰다.

배급 시스템 붕괴라는 직격탄을 맞은 북한 주민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산과 들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식량을 구하기 어려우니 나무뿌리를 캐먹거나 나무껍질을 벗겨먹기까지 했다. '꽃제비'라는 신종 빈곤층이 생겨난 것도 이때다.

유엔(UN) 발표에 따르면 1998년 북한 영양실조 비율은 60%까지 치달았다. '대아사' 사태는 지금까지도 북한의 만성적인 식량난으로 이어져오고 있고, 국제사회의 도움없이는 식량난을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식량난 이후 20년 이상 청소년들에게 배급 등 영양 공급을 제대로 하지 않아 성장 발달 장애를 유발한 것은 김정일 정권의 씻을 수 없는 죄과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이 같이 북한 주민들이 기아에 허덕이던 시기에도 김정일은 각종 진귀한 산해진미를 즐겼다. 김정일은 집권 시기 1회 식사에 2백만 원을 호가하는 뱀장어 캐비아를 비롯해 코야(새끼돼지 통구이), 샥스핀, 염소고기 등 고가의 요리들을 즐겨먹었다. 양주 1만 병을 보관하고 있는 술 창고도 보유하고 있다.

'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북한 주민들이 기아로 수백만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나는 김정일의 진귀한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고 증언한 바 있다.

아울러 김정일은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을 구제하려는 어떤 조치도 하지 않고 '측근세력 챙기기' '김일성 우상화' 등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다.

특히 측근세력의 충성심 고취를 목적으로 매년 2만 명을 대상으로 2천만 달러를 선물비용으로 사용했다. 주민들이 김정일에게 진상한 꿩·노루·산삼·꿀 등은 측근 선물로 둔갑했다.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북한 전역의 경치가 좋은 곳마다 10여 곳이 넘는 개인 별장을 건설해 계절마다 번갈아 찾아가 휴양을 즐겼다. 두께 10센티미터 이상의 특수유리로 바닥을 만들어 수심 100m 바다 속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된 해저별장까지도 보유하고 있다.

김정일은 이 시기 김일성 시신 영구 보존과 금수산기념궁전 증축 등에 8억 9천여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이 비용은 당시 국제 시세로 옥수수 6백만 톤을 구입할 수 있는 금액으로 만일 식량 구입에 쓰였다면 기아 사태를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황장엽 전 비서도 대아사 시기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금수산기념궁전 건설에 막대한 자금과 자원을 투입하는 것을 본 후 김정일과의 결별을 확고히 결심했다고 한다. "인민들의 식량난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김일성과 자신의 우상화에만 관심을 쏟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었다"는 것이다.

목용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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