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터뷰] 국내외 순회강연 바쁜 탈북자 출신 강철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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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터뷰] 국내외 순회강연 바쁜 탈북자 출신 강철환 기자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마음 놓고 부르고 싶어서….” 1992년 온두라스 국적 선박을 타고 목숨 건 탈출을 감행했던 스물네 살 더벅머리 청년은 탈북(脫北)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남한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를 흥얼거리다 동료에게 고발당해 수용소로 끌려가기 직전 탈출했다”는 그는, ‘한 움큼의 자유’가 어떤 절박함을 안고 있는지 체험으로 고백했다. 13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청년은 세계적인 명사가 됐다. 탈북자 강철환(37). 부시 미 대통령을 만나 40분간 대화했고, 뉴욕타임스는 그를 ‘금주의 인물’로 소개했다. 국내외 수많은 개인·단체로부터 “북한 인권의 실상에 대해 알려달라”는 러브콜이 쇄도했고, 그가 쓴 책 ‘평양의 어항’은 단번에 미국·일본의 베스트셀러에 올라 전 세계에 북한 주민들의 실상을 알리는 ‘명저’가 됐다. 인터뷰가 있던 11일, 강씨가 푸석한 눈자위를 누르며 나타났다. “8월 28일부터 일주일간 유럽에 강연차 다녀왔어요. 그후 한달간 미국 전역을 돌면서 12개 대학과 단체들에서 강연하느라 쉴 틈이 없었죠.” 그는 뭐가 조급한지 자꾸 시계를 내려다봤다. 내일이 아내 출산 예정일이란다. 만삭의 아내를 남겨둔 채 한달간 미국 대학가를 누비며 강연을 하다니, 이 남자 제 정신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는 그게 정말 신났던 일이라고 했다. “국내 강연에선 질문이 가뭄에 콩 나듯 나왔는데, 되레 미국에선 가는 곳마다 젊은이들이 넘쳤고 열기가 뜨거웠다”고 했다. ―미국 대학생들의 반응은? “버클리대에 갔을 때다. 250여명 학생들이 내 책을 들고 강의실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자리가 모자라 어떤 학생들은 통로 계단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예일대에서는 ‘최근 6년간 이렇게 많은 학생이 모인 강연은 처음’이라고 했다. 질문이 넘쳐 답을 절반도 못하고 돌아오는 때가 많았다. 학생들은 북한체제의 실상이 정말 알려진 그대로인지, 어떻게 그런 식의 독재가 가능한지 궁금해했다. ‘한국사회가 왜 지금 반미 일색인지’도 물었다.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미군 얘기를 하면서 서운함을 표시하기도 했고.” ―지난 6월 13일 백악관에서 이례적으로 40분이나 부시 대통령과 면담했다. 미국 대학에서의 호응도 ‘부시 효과’ 때문 아닌가? “그런 면이 있다.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 후 하루 만에 워싱턴 일대 서점에선 ‘평양의 어항’이 동이 났다고 했다.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 제이 레프코위츠 북한인권 특사,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외에도 수많은 미 정치인과 언론이 날 만나기를 원했다. 그러나 명사들보다는, 미국 대학생들의 열정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 ‘열정’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달라. “국내 젊은이들보다 북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고, 관심이 많았다. 북한이란 체제와 주민들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들은 ‘왜 한국인들이 북한주민에 대해 무관심한지’ 내게 물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북한인권에 대해 국내 언론이 너무 침묵하는 것 같다.” ―일부에선 ‘책 하나가 미국의 대북관을 좌우했다’ ‘미국이 자신의 대북정책을 띄우기 위해 책을 이용했다’는 목소리도 있다. “과장이다. 미국엔 훨씬 다양한 정보 루트가 있다. 미국이 자신의 대북정책에 힘을 싣기 위해 나와 내 책을 띄운다는 얘기도 있다. 뭐 그런 면도 있을 수 있겠지만, 부시 대통령이 ‘평양의 어항’을 읽고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인 것 같다. (강씨 가족은 함경남도 요덕수용소에서 1977년부터 10년간 갇혀 지냈다. 굶어 죽기 직전의 수감자들이 산 지렁이와 풀까지 뜯어먹고, 병·자살·살인으로 죽어나가는 모습이 책 속에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강조하고 싶은 건 내가 지낸 요덕수용소가 당시엔 형편이 가장 좋았던 수용소였다는 거다. 1998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탈북자들을 취재했는데, 그때 북한주민의 생활수준이 딱 1980년대 북한 수용소 수감자 수준이더라. 요즘 탈북자들은 내 책 보면 ‘그건 고생으로도 안 친다’며 코웃음친다.” ―요즘 북한 사정은 어떤가? “한창 자랄 아이들이 벼 껍질을 빻은 가루로 연명하다 죽어나가는 게 현실이다. 탈북자들은 죽을 각오로 국경을 넘는다. 인신매매, 영아살해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들의 얘기를 하는 게 내 의무라고 느낀다. 책을 쓰고 부시를 만나고 하는 엄청난 사건도 하늘의 뜻 아닌가 싶다. 사람들이 북한의 실상에 대해 너무 모르는데, 내가 침묵할 이유는 없다. 나 말고도 북한인권에 평생을 건 분들은 많다. 처음 여기 왔을 때, 북한 체제에 대한 복수심도 있었다. 지금은 증오하는 마음은 많이 사라졌고 통일이 된 후에도 다 용서하고 싶다. 처벌이 시작되면 다시 싸움이 일어날 테니까. 요즘은 북한살이가 너무 험악해졌다.” ―일부에선 탈북자들이 마음을 안 열고 이중적이라는 얘기도 한다. “그게 ‘북한병’이다. 북한 체제 아래에선 김정일을 싫어해도 자기 속마음을 숨겨야 하고, 눈물까지 흘리며 좋아하는 척해야 한다. 거짓말이 생활이 된다. 남한에 와서도 북한에 있는 가족들 신경 쓰느라 자꾸 신분을 숨겨야 한다. 하지만 그건 일부의 얘기다. 탈북자 대부분은 솔직하다.” ―기자 일은 어떤가? “그 전까지는 수많은 인터뷰를 당했지만 내가 말했던 것과 다르게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제는 북한실정을 아는 사람이 북한사람의 시각으로 기사를 쓰는 셈이다. 그게 좋다.” ―그 일이 적성에 맞는가? “처음엔 기사를 못 쓰고 마감시간도 못 지켜 데스크한테 욕도 많이 먹었다.(웃음) ‘글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는 선배의 말에 힘을 얻고 있다. 기자생활 시작했을 때 술을 많이 먹었다. 북한에선 술 한번 먹으려면 술 구하랴 안주 구하랴 시간 다 보내서 술도 안 취하는데, 남한에서 그 귀했던 술을 덥석덥석 마시다가 사망하는 줄 알았다. 그 뒤로 술은 자제한다.” 시계가 오후 8시를 가리키자 그는 부인이 기다리는 병원에 가봐야 한다며 급하게 일어섰다. 그는 올해 1월 같은 탈북자 출신 윤혜련(29)씨와 결혼했다. 휴대폰 화면에 윤씨의 사진이 떠 있다. 남한 남자들이 여자에게 ‘사랑한다’며 애정표현 하는 것을 보고 속이 메슥거렸다던 강씨가 ‘이쁜이’라 부를 정도로, 날렵한 콧대에 눈이 깊은 미인이다. 인터뷰 다음날인 12일 그는 첫 아이를 얻었다. 3.8㎏, 건강하게 태어났다. 그는 아빠가 된 기쁨에 앞서 ‘기구함’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불행했던 한반도 역사를 반영하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제주도에서, 아버지는 일본 교토에서, 저는 평양에서 태어났고, 내 아이는 서울에서 태어나죠.” 동토의 수용소에 10대를 버리고 온 그는, “아이는 맘껏 자유와 행복을 누렸으면 한다”고 했다./ nk.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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