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희 우상화 영화에 김정은 엑스트라 된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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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드디어 '김정은의 생모(고영희)'에 대한 우상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시작은 고영희가 주인공인 기록영화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님'이다. 올해 5월부터 인민군과 노동당 고위 간부들을 첫대상으로 상영회가 열렸다. 일반 공개는 아직 진행되지 않았다. 필자는 6월 중순에 기록동영상의 완전판(약75분)을 독자적으로 입수했다. 영상에는 김정은의 어머니인 고영희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과 육성이 풍부하게 담겨져 있다. 모두 사상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들이다. 상영이 시작됐다는 소식은 5월 중순에 필자의 협력자(북중 관계자)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그 때부터 비밀리에 입수를 시도해 6월 초에는 입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동영상을 북한 국외로 반출하는 동안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이 기록영화의 존재와 이미지(사진 몇 장)를 보도했다(6월10일). 그러나 필자가 입수한 완전판은 동영상인데다 마이니치신문이 보도하지 않았던 수많은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고 있다. 이하 필자가 독자적으로 얻은 정보를 단서로 미공개 영상에 숨겨진 고영희 우상화 작업의 비밀을 해석해 나가고자 한다. 먼저 제작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제작자는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영화문헌편집사'이다. 제작 일시는 '주체100'(2011년)이다. 이 정보는 모두 기록영화의 엔딩롤(권말)에 명기되어 있다. 따라서 이 영상은 김정일 총비서(2012년12월 사망)가 살아 있을 때 제작됐다. 김정일의 지시로 제작이 시작됐고 김정일의 감수와 재가를 거쳐 김정일 사망 후에 노동당이 개봉했다. 즉 기록영화의 기본적인 성격과 방향은 김정일이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 영상을 해석하는 열쇠가 있다. 기록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이 시종일관 '이름 없는 사람'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주인공이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조선 '고영희'임을 바로 알 것이다. 배다른 형제자매를 비롯해 고영희(즉 김정은)의 가족과 친척은 일본에 많이 있다. 그러나 '고영희'의 실명은 물론 가명조차 본편의 내레이션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존경하는 어머님' '조선의 어머님''위대한 어머님'이라는 거창한 호칭만이 사용되고 있다. 그 때문에 많은 위화감과 곤혹감이 남는다. 감상자는 중요한 주인공에게 친근감을 느낄 수 없다. 참으로 부자연스럽고 선전효과가 떨어지는 완성도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김정일의 급사'에 있다. 김정일이 고영희 우상화를 위한 영화 제작을 지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영희라는 실명을 쓸 것인지의 여부와 쓰지 않는다면 가명을 어떻게 할 것인지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은 채 김정일은 죽었다. 김정일 사망 직후 김정은의 후견인 세력이 급하게 고영희의 '실명과 경력'을 최고 국가기밀로 지정했다. 이를 어긴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방침을 비밀리에 내놓았다. 이러한 경위가 있어 기록영화에서 이름과 경력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은 선전효과의 저하와 유언비어 등의 부작용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기록영화 본편과는 별도로 잔재주를 부리기로 했다. 고위 간부를 대상으로 한 '시사회'에서는 사회자가 주인공에 대해 '이은실'이라고 가명을 써서 소개했다. 그러나 주인공의 경력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실명을 숨기는 이유는 고영희의 경력을 철저히 은폐하기 위한 목적이다. 불편한 진실은 다음 5가지다. ①재일조선이라는 '하층신분'에 속한다. ②'기쁨조'의 춤꾼이었다. ③김정일의 '본처'가 아니었다. ④고영희의 아버지가 구일본군 협력자였다. 그리고 ⑤고영희의 여동생이 미국으로 망명한 '탈북자'이다. 순서대로 살펴보자. 북한은 사회주의(무계급)사회라고 표면적으로만 말할 뿐 견고한 신분사회다. 국민은 '3계층51분류'라는 출신성분표로 분류되어 철저히 관리.통제받아 왔다. 3계층은 위로부터 '핵심계층'(25%)'동요계층'(25%)'적대계층'(50%)으로 분류된다. 전쟁 후 북한으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귀국자는 대부분이 '적대계층'으로 분류됐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동요계층'이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는 물론 핵심간부들은 글자 그대로 '핵심계층'출신자들이다. 김일성과 김정일도 그렇고 김정일의 후계자도 당연히 '핵심계층'이어야 한다. 실제로 김정일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인은 '핵심계층'이었다. 그러나 3번째 부인 고영희는 출신성분(신분)이 다르다. 따라서 북한식으로 말하자면 둘 사이에 태어난 김정은은 다른 신분의 '하이브리드'(잡종)다. 더불어 고영희의 경우 아버지 고경택이 구 일본육군 관리하의 군수피복공장(히로타 재봉소)에서 근무했다는 경력을 갖는다. 김정은의 외가 쪽 할아버지가 '일본군 협력자'였다면 너무나 불편한 진실이다. 그런 까닭에 위대한 수령님(김일성)은 생전에 고영희를 정식적인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영희의 아들(김정은)조차 완강하게 정식적인 손자로 인정하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기록영화에 등장하는 공식행사에 참석한 고영희의 영상은 1994년 이후의 것들이다.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한 것이 76년이므로 고영희는 그 때부터 20년 가까이 공식행사에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는 얼굴을 비추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고영희는 '김일성서거100일 중앙추모대회'(94년10월16일)까지 공식 등장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고 고영희의 여동생, 즉 김정은의 이모(고영숙)는 해외근무 중 비리 의혹 때문에 1998년5월 부부 동반으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지금도 미국에서 사는 '탈북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정일 사망 후 후계자 김정은이 내린 첫 번째 지시 명령이 '탈북자의 즉시 총살'(2012년1월)과 '탈북자 가족의 지방 추방'(동년2월)이었다. '하늘을 보고 침을 뱉는다'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초강경한 탈북자 정책도 자신의 '아킬레스건' 은폐작업의 일환으로 보면 이해가 쉽다. 이상과 같이 고영희의 우상화 자체에 처음부터 무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우상화에 착수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계 투쟁의 우여곡절 끝에 김정은이 2009년 1월 후계자로 결정됐다. 그러나 30세도 안 되는 젊은 김정은에게는 업적도 위엄도 없다. 부자 3대 세습의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혁명의 혈통'(백두혈통)을 전면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김정일의 유훈을 강조해 그것을 충실하게 계승하는 효자로 김정은을 위치시키는 간접적인(우회적인) 우상화 전략을 펼치기로 했다. 김정일의 신격화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격화를 통해 이미 완성됐다. 나머지는 김정일의 부인의 신격화다.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은 난관 중의 난관이라 하겠다. 그러나 김정은의 우상화 적업에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사전 준비 차원의 신격화 작업이다. 그 해답이 생모의 경력 은폐와 가명 사용이었다. 공식적으로 이름을 숨기면서 유언비어 방지의 관점에서 비공식적으로 '이은실'이라는 가명을 유포시키는 속임수를 내놓았다. '김정은'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시사함으로써 혈통에 따른 권력세습의 정통성을 각인시키는 잔재주이기도 하다. 김정일의 '정'자, 이은실의 '은'자를 따서 명명됐다는 것이다. 마치 아버지 김정일의 이름이 김일성의 '일'자와 김정숙의 '정'을 딴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전제 하에 기록영화는 '김정일에 대한 헌신과 충성을 다하는 '조강지처'상'과 '군인 병사들의 소박하고 겸손한 어머니상'을 기조로 일관된다. 그것의 절정은 고영희가 50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장면이다. 김정일에 바치는 자작시를 선보이는 고영희의 육성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고영희는 '기쁨도 영광, 슬픔도 영광, 시련도 영광이라 생각하고 장군님과 함께 살아온 3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며'라고 낭독한다. '어느 날 장군님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보거나. 내가 얼마나 고된 7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왔는지를'. 그렇습니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장군님께서의 7년간의 힘든 세월(1994∼2000년)의 대기근 '고난의 행군'을 말함.-필자주〕을 저는 직접 보아 왔습니다. 장군님께서 가장 힘들어하셨던 그 시기를 언제나 장군님 옆에서 함께 해왔습니다. 뜻밖에 위대한 수령님을 잃고 너무나 당혹스러운 상황, 겹치는 자연재해, 갈수록 심각해지는 경제사정 때문에 〔노동당의〕일꾼들이 허둥대며 우리 인민의 쌀 문제, 전기 문제, 이 모든 것들을 장군님 혼자에게 떠맡겨버렸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찢어질 것처럼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가족이 이리저리 흩어지며 고아가 발생하는 것을 보시고 잠을 이룰 수 없는 밤도 있었습니다. 이 난국을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고 백 번 넘게 자신에게 말하고 힘들 때마다 아름다운 합창단 노래를 듣고 새로운 힘을 얻으면서 선군 길에 나섰습니다. 그럴 때 장군님께서 굳게 거머쥐시는 것은 바로 신뢰의 장검이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뢰, 혁명동지에 대한 신뢰, 우리 인민에 대한 불변의 신뢰였습니다' 북한 주민 10명 중 1명 이상이 아사하고 수십 만 명이 고향을 떠나 탈북자가 된 사상최악의 대기근. 20세기 최대급의 비극마저 고영희 손의 걸리면 '장군님에 대한 신뢰'로 변한다. 그 고영희가 김정일과 함께 김정일의 생모=김정숙의 유적지를 방문하는 장면이 등장한다(1998년3월, 함경북도 회령시(거기서는 고영희가 '강반석〔김일성의 생모-필자주〕과 김정숙의 위대한 어미님을 모법으로 한'이라는 해설이 나온다. 즉 고영희가 2명의 전통을 이어받는 3번째 '위대한 어머님'이라고 주장한다. 위대한 장군님과 위대한 어머님 사이에 태어난 김정은이 바로 '위대한 영도자'라고 각인시키는 셈이다. 그런데 기록영화에는 김정은의 영상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2가지다. 하나는 영상 촬영 시기와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시기(1996∼2002년)가 겹친다. 또 하나는 영상 촬영 당시에는 고영희의 차남=김정은이 아니라 장남 김정철이 후계자 후보로 예상되어 있었다. 사실 고영희의 신격화 작업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전기는 1998년부터 시작된다. 김정일이 97년에 후계논의를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의 문지기'라고도 불리는 이명수, 현철해 두 대장이 고영희와 짜서 김정철을 후계자 후보로 내세우려 획책했다. 장성택-김경희가 추천하는 유력한 후계자 후보 김정남에 대항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명수, 현철해 두 명이 중심이 되어 '인민군의 어머니'라 부르며 군 내부에서 고영희를 신격화시키는 작업을 활발히 펼쳤다. 이런 군부 중심의 활동은 김정남이 나리타공항에서 구속당한 2001년에 절정에 이른다. 기록영화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영상은 이 시기에 촬영된 것이다. 따라서 전기의 고영희 신격화 작업은 장남인 김정철을 후계자로 추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2004년에 고영희가 모스크바에서 객사함으로써 신격화 작업은 좌절됐다. 이에 대해 2009년에 다시 시작된 후기의 신격화 작업은 후계자 내정=김정은의 정통성을 각인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신격화 작업 재개 시 고영희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즉 영상 촬영시에는 고영희와 김정은이 함께 나오는 장면, 거기에 김정일을 추가한 장면은 촬영할 필요성이 없었다. 만약에 후계자가 장남인 김정철이었다면 미리 찍어놓은 영상을 대량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영화에는 장남인 김정철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김정은이 '외아들' 혹은'장남'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김정철(혹은 김정남(이 등장하면 보는 이들은 '왜 장남이 후계자가 되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런 부작용을 우려해 기록영화에 사용되는 장면이 신중히 선별됐다. 이상과 같은 각종 제약조건 때문에 부득이하게 완성도가 떨어진 기록영화가 나왔다. 당초에는 6월26일 고영희 60세 생일을 기해 북한 국내에서 기록영화를 일반 공개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김정은 자신의 본격적인 우상화 작업을 김정일의 1주기(올해12월)까지 완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은실'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로 결정은 났지만 고영희 52년의 인생을 허위 경력으로 메우기 위한 본편 외의 작업이 막대하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필자가 입수한 내부 정보에 따르면 기록영화의 일반공개는 김정일의 1주기 직전까지 연기될 전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총련 고위 간부조차 아직 기록영화를 보지 못했다. 결국 건곤일척의 기록영화는 필자에 의해 먼저 공개될 것 같다. 이로써 '선군조선의 어머니'는 영원히 '상영중지'가 될지 그 여부는 필자는 알 수 없다. 단 분명한 것은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출생에 관한 문제가 북한의 최대 아킬레스건이라는 사실이다. 이영화 日간사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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