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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광 월간조선 편집장 북한방문기
동지회 782 2005-11-29 11:27:09
김연광 월간조선 편집장 북한방문기


북한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10월16일부터 18일까지 2박3일간의 일정이었습니다. 「月刊朝鮮 편집장」 직함으로 訪北(방북)을 신청했고, 통일부를 비롯한 유관기관에서 訪北이 성사되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北에서 만난 안내원들은『선생님은 공화국에 오시는 게 절대로 불가능한 분인데 뭔가 큰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은「金正日 정권 제거」를 주장해 온 저의 글과 논조에 대해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그들에게 불편을 줄까 싶어 낯선 풍경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지도, 필기구를 꺼내서 적지도 않았습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충격적인 풍경에 대해서 감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래선지 2박3일의 全 여정은 제 머릿속에 기록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金편집장, 평양에 꼭 가보세요. 가서 그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보십시오. 평양에는 살찐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기름이 빠졌어요. 저는 평양의 풀 한포기조차 애처롭게 보입디다』

평양에 한번 꼭 가보라고 권한 정부 고위당국자의 얘기대로, 평양 사람들의 지치고 그늘진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돌아왔습니다.

서해안을 따라 北上하던 아시아나항공 비행기가 평양의 위도에 이르자 90도 각도로 우회전을 했습니다. 비행기는 고도를 서서히 낮췄습니다.

4~5분쯤 지나자 북한 땅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 창가에 머리를 갖다 붙였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어서 산과 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들판은 바둑판처럼 경지정리가 돼 있었습니다.「언젠가 이곳에서 트랙터와 콤바인을 동원한 기계화 영농이 이뤄졌구나」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탈곡을 끝낸 볏단이 논 이곳저곳에 쌓여 있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奇怪(기괴)했습니다.

야트막한 야산은 물론이고 산이란 산에는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은 온통 붉은빛이었습니다. 요르단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본 荒野(황야) 같았습니다. 아니 이건 차라리 火星(화성)의 풍경입니다.

북한을 50년간 지배한 위대한 수령 金日成은「이팝에 고깃국을 먹는」북한 인민의 세기적 염원을 이루는데 실패했습니다. 그의 아들은 200만 명의 인민을 굶겨 죽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떼죽음을 맞는 1996년 8월 친애하는 지도자 金正日은 인민들에게 고기를 먹일 수 있는 획기적인 정책을 내놓았습니다.

『산에 목초지를 조성해서 염소 사육을 강화하라』

그의 교시는「기적」을 낳았습니다. 교시가 떨어진 후 3년 동안 전국적으로 염소 수가 4배로 늘어났고, 수십만 정보의 풀밭이 조성됐습니다(1999년 8월19일자 노동신문).

납북어부 김병도씨는 1997년부터 함경남도 함주군 상창리에 있는 해발 1700m인「황봉」의 나무를 베어 냈습니다.

「상창리 청년 염소목장」에서는 1000여 명이 56개조로 나뉘어 염소를 길렀습니다. 金正日은 2001년 이 모범 목장을 찾아서 치하하고, 100만 달러를 현찰로 지원했습니다.

이 돈으로 12가지 유가공품을 생산하는 염소젖 가공공장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 목장의 염소들은 시들시들 죽어 갔습니다. 새끼들은 얼마 살지를 못했습니다. 김병도씨가 2001년 그곳을 탈출할 때까지 5년 동안 죽은 염소가 4만 마리 안팎으로 추산됩니다.

스위스 같은 목축 선진국에서도 가축들은 영양의 70% 이상을 곡류에서 섭취합니다. 지도자 동지는 그걸 몰랐습니다.

「노는 풀밭에 염소를 키워 인민들에게 염소고기와 젖을 먹이겠다」는 지도자 동지의 소박한 생각은 오히려 염소의 대량 폐사와 산림의 황폐화를 가져왔습니다.

산이란 산에는 나무가 다 사라지고, 비만 오면 토사가 쓸려 내려와 大홍수가 빈발합니다. 金正日 체제는 이렇게 기괴하게 멸망의 길을 밟아 가고 있습니다.

평양으로 가는 국도가 한줄기 길게 뻗어 있는 게 보였습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는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땅 위에 動力(동력)으로 굴러가는 물체가 없었습니다. 우마차가 간간이 눈에 띄었습니다.

비행기가 착륙을 위해 급강하를 시작했습니다. 순안비행장 활주로가 시야에 들어오면서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써 놓은 구호판이 창 밖으로 보였습니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주체의 수도 평양. 순안공항 건물에는 金日成의 초상화가 높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안경을 쓴 그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그는「金日成 민족」의 始祖(시조)이고, 이「나라」는 그가 태어난 날을 세상의 시작으로 삼는「주체 연호」를 사용합니다. 올해는 주체 94년이라고 합니다. 도처에서 저는 이런 구호를 만났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가 죽은 지 11년이 지났지만 이 나라와 인민은 그를 떠나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도 이 나라의 헌법이 명시한 首領(수령)입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나라를 통치합니다. 金日成의 시신은 금수산궁전에 영원히 썩지 않는 미라로 모셔져 있고, 그의 영혼은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한 채 中陰身(중음신)으로 북한 하늘을 떠돌고 있습니다.

공항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길.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 논가에 세워진 트럭을 고치고 있는 사람들, 논길을 힘없이 걷는 사람들.... 기름이 쪽 빠진 그들은 키가 남쪽 사람들보다 한 뼘쯤 작고, 깡마른 체구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金日成 민족」이라고 부릅니다.

숙소인 양각도 호텔에 짐을 푼 우리들은 오후 늦게 동명성왕의 무덤을 보러 평양을 벗어났습니다. 길 좌우로 평양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집니다.

가을걷이를 도우려고 농촌지역으로 나갔던 평양시민들입니다. 트랙터도 없이 탈곡기도 없이, 손과 낫ㆍ곡괭이와 삽으로.... 얼마나 먼 곳으로 걸어 나갔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다들 배낭을 하나씩 메고 있습니다. 배낭 안에 긴 막대기를 꽂고 있는 사람이 가끔 보였습니다. 물어봤더니 삽이라고 합니다.「삽자루가 부러졌는데 새로 삽을 구하지 못해 그냥 그걸 그대로 가지고 다니면서 쓴다」는 얘기였습니다.

북한은 완전 農業(농업)국가로 전락했습니다.

공화국의 자랑이었던 김책제철소, 함흥 비날론공장, 나남기계공장 등은 가동이 중단됐거나, 가동률이 20%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 공장들이 다시 벌떡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 4대는 오후 6시30분쯤 어둑어둑해지는 평양거리를 달려 양각도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가로등이 없거나, 혹은 희미한 불빛을 내는 步道(보도) 위를 평양 사람들이 바쁘게 걸어갑니다.

평양의 주요 운송수단인 버스와 궤도전차가 우리 버스 옆을 지나갔습니다. 안에는 평양 시민들이 콩나물 시루처럼 꽉 차 있었습니다. 궤도전차와 버스 안은 깜깜했습니다.

고장 난 전구를 갈아 끼우지 못해서입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37층의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멀리서 주체사상탑 꼭대기의 붉은 조명만 희미하게 펄럭였습니다.

평양 한복판에 유경호텔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金日成이 직접 이름을 지은 이 호텔은 105층입니다. 1986년 여름 착공 당시 세계 최고였던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보다 4층 높도록 계획했습니다.

「미국을 꺾겠다」는 위대한 金日成 시대의 상징물입니다. 이 건물은 1989년 말 공사가 중단됐습니다.

소련ㆍ東歐(동구)가 와해되던 바로 그 시점입니다. 북한은 1989년 국력을 소진해 가면서 마지막 불꽃은 태웠습니다. 거대한 소년문화궁전을 완공했고, 15만 명을 수용하는 능라도 경기장을 건설해 세계청년학생 축전을 개최했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金日成 체제는 소련과 東歐 국가들이 공산주의적 생산방식을 전면 포기할 때 운명을 함께해야 했습니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체제의 腦死(뇌사)상태」가 10여 년 이어지면서 인민의 고통만 가중되고 있습니다.

북쪽사람에게『왜 유경호텔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골조 위에 유리를 덮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리를 사려고만 하면 미국놈들이 경제봉쇄로 유리 가격을 올려놓아서 마무리 공사를 못 합니다』

우리가 묵었던, 양각도 호텔 지하의 가라오케에서는 중국 조선족 여성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金正日은「모기장」을 치고 인민들이 자본주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개방을 원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개방은 인터걸과, 중국의 개방은 흥청대는 유흥가와 함께 시작됐습니다. 자본과 시장은 칸막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묘향산 등산에서 만난 20代의 여성 안내원은 밑바닥이 납작한 실내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평양 시민들이 신고 있는 신발들은 전부 천으로 된 운동화류입니다.

모양과 색깔이 비슷합니다. 인민들에게 신길 신발이 없어서,『6500만 켤레의 신발을 보내 달라』고 합니다.

실패한 체제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한 북한 인민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金日成주의와 스탈린주의 계획경제를 포기해야 합니다. 다른 답은 없습니다.

「미국의 경제봉쇄만 없으면 우리는 우리식대로 살아갈 수 있다」,「자력갱생만이 살길이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북한 사람들을 보면서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金正日이 어린 시절 잠시 다녔다는 평양서문인민학교를 방문했습니다. 혁명역사연구실, 김정숙 혁명역사연구실, 수영장, 체육관을 돌아봤습니다. 우리 일행을 위해 어린이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30분 정도의 발표회가 끝나고 공연을 끝낸 어린이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와 우리 일행의 손을 끌고 무대로 데려갔습니다.「이 아이들을 기다리는 북한의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일까」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아이가 생각이 나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 어린 소녀가 제 손을 잡았습니다.

『선생님...』

그 뒤에「공화국에 오신 것을 열렬히 환영합니다」아니면「조국 통일을 위해 힘써 주십시오」라는 말을 했어야 했던 모양인데, 이 어린이가 그 말을 까먹은 모양입니다. 귀여워서 제가 꼭 안아 주면서『몇 학년이야』물었습니다.

『2학년입니다』

아이는 쑥스러워서 제대로 말을 못 했습니다. 어른처럼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발라 놓아 귀여워 보였습니다. 이 아이를 위해 선물이라도 준비해 오는 건데.... 함께 간 분 가운데 볼펜과 샤프를 묶어서 포장해 오신 분이 있어서, 그걸 하나 얻어서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아이는 3층에서 내려와 현관까지 저의 손을 잡고 따라 오면서 쑥스러워서 한마디 말을 못 했습니다.「이 아이들은 어찌할 것인가」하는 생각에 저도 아무 말을 못 했습니다.

북한이 자랑하는 소년문화궁전, 그리고 그곳에서 방과 후 예체능 교육을 받는다는 아이들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들이 입고 있는 한복의 낡은 깃이, 색동옷에 달린 촌스러운 반짝이들이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거대한 소년문화궁전은 1989년 5월에 건설됐습니다. 저는 이 건물을 보면서「세상의 모든 비극은 善意(선의)에서 시작됐다」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소년문화궁전 현관에는「어린이들을 지상낙원에서 살게 해 주겠다」는 요지의 金日成 교시가 대리석에 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지상 최악의 지옥」으로 북한의 어린이들을 던져 넣었습니다.

능라도 경기장에서 펼쳐진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아리랑」은 북한 인민들이 영원한 수령 金日成에게 바치는 思慕(사모)의 집체예술입니다. 제게는「뇌사국가」북한의 마지막 경련처럼 느껴졌습니다.

카드섹션이 만들어 낸 글귀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한 번도 이뤄 본 적이 없는 꿈을 담고 있습니다.

「한 세대에 두 제국주의를 타승하신 천세의 영장」,「도처에 수력발전소 수령님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시랴」,「흥하는 내 나라, 풀과 고기를 바꾸자」,「두벌농사」,「종자 혁명」,「정보산업의 시대」,「인민경제의 현대화 정보화」,「자주강국 무궁번영」,「어딜 가나 인민의 휴양소, 어딜 가나 인민의 요양소」,「우리를 당할 자 세상에 없다」

10만 명의 유치원생ㆍ중학생ㆍ대학생ㆍ인민군 병사들이 만들어 낸 대집단 체조와 예술 공연은 유치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한 그런 내용들이었습니다.

기계체조, 어린이 학예회, 평양 교예단의 묘기, 인민군의 총검술, 고전무용, 현대무용, 스턴트맨의 묘기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선녀가 날아다니고, 스타디움 위를 가로지른 철선 위로 오토바이가 달리고, 슈퍼맨이 하늘로 튀어오르고, 유아원 어린이 1600명이 손을 짚지 않고 앞구르기를 하고, 수천 명의 중학생들이 푸른 깃발을 들고 질주하고....

「아리랑」은 노동당 창건 60주년을 맞아 金日成의 은덕을 기리고,「붉은 태양 아래의 통일」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붉은 통일」의 꿈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민군들이 은빛 총검을 휘두르는 장면에서, 함께 갔던 60代 여성분이 이렇게 한마디 하더군요.

『씁쓸해. 우리 보고「너희들 정신 차려라」그러는 것 같아』

이번에는 성우의 신파조 내레이션이 이어집니다.

『예로부터 화목하게 살아온 우리 민족이 하루아침에 생떼같이 갈라져 남남이 되어 가는 이 땅. 어머니와 아들이 생사도 모르고 갈라져 산 50년. 세계의 양심이여 대답하라』

남북 이산가족 생사 확인을 30여 년간 거부해 온 북한이「세계의 인도주의」에 호소하는 코미디까지「아리랑」에는 포함돼 있었습니다.

카드섹션은 계속 펼쳐집니다.

「수령님 유훈은 조국통일」「조국통일 3대 공조」(민족자주ㆍ반전평화ㆍ애국통일) 그리고 마지막 카드섹션의 문구가 우리의 꿈을 깨버립니다.

「태양민족 우리는 하나」

북한이 말하는 통일은「태양(金日成)민족」,「金日成 민족」으로 하나가 되자는 것이지, 한민족으로 하나가 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1시간30분에 걸친 어지러운 카드섹션과 군중무용은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우리 일행 가운데 3분의 1쯤은 중간 부분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영국에서 왔다는 한 청년에게『어떤 느낌이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의 얘기입니다.

『정말 놀랍다! 이건 지상 최대, 최후의 쇼다. 앞으로 세상의 어떤 정권도 이처럼 10만 명의 군중을 기계처럼 훈련시켜서, 이런 공연은 하지 못할 것이다』

저녁시간 호텔방의 텔레비전을 틀면, 金日成의 항일투쟁을 다룬 내용이 나왔습니다.

10월17일 저녁에는 청년 金日成이 화성의숙에서 민족주의 단체의 항일 교육을 받는 드라마가 나왔습니다. 열다섯 살의 金日成은「타도제국주의 동맹」을 결성하고 이렇게 선언 합니다.

『우리는 타도제국주의 동맹의 당면과업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할 것을 내세웠으며, 최종 목적으로 조선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며, 나아가서 모든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세계에 공산주의를 건설 할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盧武鉉 정권이 출범한 이후 대한민국에는「金日成은 위대한 항일투쟁의 전사였다」고 목청껏 외치고 싶어 몸살이 난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그들은 집요하게「親日한 朴正熙 보다 金日成이 민족사의 정통세력이다. 대한민국은 부끄러운 역사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金日成이 항일투쟁을 했다는 사실이 200만 명의 인민을 굶겨 죽인 역사적 범죄를, 2600만 명의 인민을 노예처럼 살게 만든 罪過(죄과)를 상쇄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번 평양 방문에서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日本軍 장교 출신인 朴正熙가 걸어간 길이 옳았습니다. 朴正熙가 추구해 온 근대화 산업화는 인권탄압의 오점을 안고 있는 유신시대를 포함하더라도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였습니다.

金日成이 설혹 부하들을 이끌고 한반도로 진공해서 일본 군대를 다 쫓아냈다고 하더라도 그가 지난 60여 년간 북한 인민들에게 저지른 罪過는 씻어 낼 수 없습니다.

10월18일 밤 金日成이 환하게 웃고 있는 순안공항을 아시아나항공기는 이륙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의 도시, 金日成의 유령이 지배하는 평양을 떠나면서 마음속에 한줄기 안도감이 밀려 왔습니다.

냉전은 끝났습니다. 이제 金日成은 영원히 잠들게 하고,「체제 전환」으로 북한 주민에게 살길을 열어 줘야 합니다. 저는 나지막이 평양에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굿바이! 金日成 /nk.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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