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에 대한 작은 보답 - 허창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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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구성에서 태어난 나는 사리원 東藥 단과 대학을 졸업한 후 묘향산 요양소 약제사, 사로청 청년돌격대 군의장 등으로 평탄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94년 10월 군에서 재대 후 잠시동안 쉬고 있을 즈음, 때마침 닥친 북한의 식량난은 나를 가족 끼니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무능한 가장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살아 남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은 점차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96년 10월, 마침내 딸과 함께 대한민국으로의 귀순을 선택했다. 귀순 이듬해인 97년 4월초 이 땅에서 처음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았다. 비로소 남한 사람이 되었다는 기쁨과 함께 내 힘으로 열심히 살아보자고 수없이 다짐했다. 남한사회에 대해 다소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나는 직접 몸으로 부딪혀 보기로 결심하고 사회에 배출되자마자 경기도 포천에 있는 물탱크 제조 공장으로 향했다. 우선 1개월 가량은 아무 생각하지 않고 공장에서 숙식하며 한국 사회를 체험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동료직원들을 인생선배로 생각했으며 그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차츰 자신도 생겼다. 스스로 약속한 대로 1개월 숙식을 마치고 정부에서 마련해 준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 이틀동안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침대에 꼼작 없이 누워서 지냈다.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이다. 4일째가 되어서야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몸을 추스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공장에서 숙식하며 얻은 자신감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휘황찬란한 거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웬일인지 나는 그들과 다른 이방인처럼 느껴졌고 거리는 황량하게만 보였다. 나 자신이 무력하게만 느껴졌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조급했던 나는 우선 급한대로 서울 석관동 빌딩 신축현장에서 일하기로 했다. 일당 5만원을 받으면서 보름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출근했다. 참으로 힘든 나날이었다. 소규모 3층 빌딩 신축현장이라 모든 일을 인력에만 의지하고 있어 더욱 힘들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쓰러졌고, 아침에 눈을 뜨면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딸은 나를 붙잡고 "그러다가 쓰러지면 저는 어쩌란 말이예요, 아빠"하며 일을 그만 두라고 애원했다. 결국 나의 약한 체력으로는 육체노동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다른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거듭 거듭 고심한 끝에 북한에 있을 때 대학에서 배운 한약 지식과 약제사를 하던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운이 좋았던지 어떤 고마운 분의 소개로 경동시장에 있는 한약방과 연결이 되었다. 월급은 받지 않고 일손을 거들어 주면서 한약의 유통과정과 한약방 경영 노하우를 배우는 조건이었다. 그곳에서 6개월 가량 일을 배우면서 남한 한약업계의 실상을 어렴풋이 나마 터득할 수 있었다. 일을 배우면서 많은 교훈도 얻었다. 북한과 달리 남한은 모든 것이 대량화.과학화.체계화되어 있지만 너무 영리만 추구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약방 일을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난 어느날 당뇨병 환자가 약을 짓기 위해 찾아왔는데 환자 상태로 보아 장기간 꾸준히 치료해야 할 것 같아 "약을 지으면 돈이 많이 드니까 약제를 사다 집에서 꾸준히 다려 드세요"하고 권유한 후 처방을 가르쳐 주었다. 손님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약방을 나서자 사장님은 대뜸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다니 장사를 망치려는가"라면서 나에게 노발대발하는 것이 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잘못했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앞으로 돈을 위해서 환자를 이용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6개월 동안의 체험을 바탕으로 98년 3월 숭인동에 고려한약방이란 상호로 조그마한 한약방을 차렸다. 그러나 의욕만 앞섰을 뿐 물가에 어두워 약제를 구입하면 바가지를 쓰기 일쑤였고, 곧 갚겠다는 약속만을 철석같이 믿고 약을 지어준 후에는 약값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현상유지도 힘든데 집세, 전화세, 전기료 등 각종 세금을 내야 하는 날은 왜 그리도 빨리 찾아오는지 … 결국 몇 개월도 못가 한약방 문을 닫아야 했다. 낙담했던 나는 건강 보조식품 쪽으로 사업방향을 바꾸기로 마음 먹었다. 관계 공무원들을 찾아가 자초지종 나의 처지를 알려주고 건강 보조식품 제조.영업허가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물었는데 뜻밖에 행운이 찾아왔다. 관계 공무원들은 준비가 부족한 나에게 허가에 필요한 절차를 하나하나 친절히 가르쳐 주었으며 창업자금을 대출 받는 길도 알려 주었다. 정말 눈물이 날만큼 고마운 일이었다. 99년 4월 기대 속에 경동시장에 금강산식품이라는 상호를 걸고 건강 보조식품 사업을 시작했다. 북한에서 익혔던 나름대로의 비법이 있어 제조 영업허가만 떨어지면 사업이 잘 되리라고 기대했지만 쉽게 정상궤도에 오르지 않았다. 소문을 듣고 거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지만 외상거래가 대부분이어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심지어 전록탕(보혈제)을 100여 박스나 가지고 간 후 단돈 10원도 주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또다시 실망과 좌절, 허탈감이 엄습해 왔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좌절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를 다물었다. 거듭되는 실패를 통해 점차 사업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믿음이나 인간미도 중요하지만 사업가는 때로 냉철한 판단력과 결단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츰 요령이 생기면서 영업상 신뢰관계 없이는 함부로 외상거래를 하지 않고 열심히 가게를 꾸려 나갔다. 간혹 손해를 보는 적도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올라 있었다. 이제는 가게를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또한 같이 귀순한 딸이 연세대 치의예과에 특례입학을 했다. 딸의 대학 입학은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 주었으며 내가 더욱더 사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이제는 어느덧 규모는 작지만 어엿한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동안 번 돈은 얼마 되지 않지만 나한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돈이기에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재투자 할 것인가를 고심하게 되었다. 그러던중 귀순 후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해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정부와 국민은 내가 대한민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생활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딸에게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지 않았는 가? 나도 이 사회에 대해 작게라도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나보다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이리저리 궁리하던 차에 문득 고향의 부모님이 생각나 요양원이나 양로원에서 외로이 계시는 노인들을 위하여 무언가 할 일을 찾기로 했다. 다행히 한국노인복지시설협회와 연결이 되어 노인들의 건강을 위해 노인 1000명에게 위장환(위장치료제) 1개월분 (1인당 시가 12만원)을 기증하기로 결정하고 1차로 3월말에 수도권지역 57개 요양원 및 양로원에 계시는 노인 542명에게 위장환을 전달하였다. 조만간 나머지 분량도 전달해 드릴 예정이다. 나와 종업원이 1개월 동안 열심히 정성을 드려 만든 제품이 어르신들의 건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는데, 받아 주신 어른들이 무척 좋아 하신다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이제서야 비로서 떳떳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된 것 같아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도 힘이 닿는데 까지 불우이웃 돕기를 계속 할 예정이다. 그리고 사업도 더욱 열심히 하여 국민건강증진에 나름대로 기여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싶다. 통일된 어느날, 치과의사가 된 딸과 건강식품 사업가인 내가 망가진 북녘 동포들의 건강회복을 위해 조그마한 기여라도 하게 되다면 두고 온 가족. 친지들에게 나의 귀순이 커다란 보람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2000년 5월 허창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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