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탈북동기와 북한군의 도망병 처리 조회 - 한성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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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한 재중 탈북 남성이 인편을 통해 북한인권시민연합에 전해온 글이다. 북한사투리를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싣는다. 나의 아버지 한택섭은 1940년 2월 14일생이고 당별은 조선로동당, 직장은 함북도 연사군 석수리 부기장을 하였습니다. 1987년 이후에 함북도 연사군 삼포리 축산작업반장을 하다가 1995년에 차사고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나의 어머님 김란은 1942년 2월 7일 함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고, 1987년 4월 7일 병(고혈압)으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나의 동생 한경숙은 1973년 4월 8일에 함북도 연사군 석수리에서 태어나 석수인민학교 4년, 석수고등중학교 6년을 졸업하고, 함북도 연사군 삼포리 남새작업반에서 일을 하다가 1991년 결혼하여 슬하에 딸(김향미)을 낳고 (연사군 광양리) 1998년 5월에 병(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나 한성룡은 1971년 4월 29일 함북도 연사군 석수리에서 태어나 석수인민학교 4년, 석수고등중학교 6년을 졸업하였습니다. 어린시절 저의 생활은 아버지의 직업 덕분에 남이 부럽지 않을만큼한 생활을 보냈습니다. 졸업후 1987년 9월 4일에 김일성 동지의 생일을 기념하여 상등병 군사칭호를 수여받고, 1990년 2월 16일에 김정일 동지의 생일을 기념하여 하사의 군사칭호를 수여받고, 대대 경비분대 부분대장으로 임명받았습니다. 1988년 상등병 군사칭호를 받은후 나의 목표 첫째는 조선로동당에 입당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군관(장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나의 하루일과는 4시간 잠자기와 나머지 시간은 훈련과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우리의 대상물은 평양-개성 사이에 굴을 뚫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아의 군사칭호를 수여받았고, 경비분대 부분대장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때에도 하루 4시간 립초근무와 2시간 대기근무, 2시간 잠자기, 나머지 시간은 훈련과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후 1995년 4월 15일에 평양시 통일거리 건설장에서 입당을 하고 그해 4월에 군관학교(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입학하였습니다. 1996년 4월에 나는 군관학교 최우등으로 졸업하여 7623군부대 16대 소대장으로 배치되었고, 그 이듬해 10월 10일에 주위로 7623군부대 16대 소대장으로 사업하다가, 1998년 3월 비편재축소에 걸려 제대하여 함북도 연사군 광양리에 배치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농민이기에 나도 농민으로 있다가 1998년 6월 1일에 중국으로 탈북하였습니다. 탈북하게 된 동기는 나의 동생 한경숙이 제대되는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당시 증상은 머리아픔 뿐이어서 일없겠거니 하였는데 훗날 머리아픔이 심하여 리 인민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여보니 결핵성 뇌막염이었습니다. 병원에 입원을 시키자니 식비를 댈 경제원천이 없고 하여 집에다 두고 한쪽으로 돈을 꾸어 약을 사서 주군 하였습니다. 병원 사람들의 말이 이 병은 죽지않으면 머저리가 된다고 하니 나의 가슴은 불안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에게 동생을 맡기고 저세상으로 갔건만 나에게 능력이 없고보니 정말 답답했습니다. 1998년 5월 중순경 일을 나갔다가 퇴근하여 동생 병문안을 가니 동생이 나에게 진통제 주사를 놔달라고 부탁해 병원에 가시 병원에는 진통제가 없다는 것이 의사의 말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다가 동생의 소원을 못들어주는 것이 원망하여 다시 병원에 가니 초급당 지도원아주머니가 주사를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병원에 현재 진통제가 있는데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만 놔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말에 열이나 병원 의사를 때렸는데 그만 까무라쳐 군안전부에 10일간 구류처벌을 받고 나오니 그날이 동생 장례날이었습니다. 동생의 얼굴을 마지막까지 보지 못한 내가 동생을 뭍고 집으로 오니 초급당 집행회의에 참가하라는 통지가 와 있었습니다. 회의에 참가하니 당적으로 엄중경고가 떨어졌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생각 또 생각 끝에 이 땅에서 살아갈 용기와 이 사회를 위해 일한다는 것, 이런 사람들 이런 비인간적인 사람들 밑에서 사업한다는 것이 나의 자존심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온 사람들의 말도 몇 번 들은 적이 있고하여 중국으로 들어갈 결심을 한 후, 6월 1일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탈북하였습니다. 군사복무 시절, 아마 내가 경비분대 부분대장을 하던 때인 1993년도로 기억됩니다. 우리 분대에 다른대에서 강직조동되어 온 대원이 있었는데 분대장과 나이기 비슷했습니다. 분대장의 성질이 매끄러워 자주 그와 충돌이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니 그가 무기(자동보총) 1정과 탄약(300발)을 가지고 도주한 것이었습니다. 3달후 그를 잡아 려단에서 전 려단이 다 모인 가운데 군사재판을 하였는데 그의 죄는 우선 당과 수령, 조국을 배반하고 부대를 도주한 것, 둘째 무기와 탄약을 가지고 나간 것, 셋째 무기와 탄약을 가지고 강탈, 강간을 한 것이었습니다. 판결은 창형으로 되었습니다. 하여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과 녀동생, 전 려단이 보는 앞에서 창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집행은 려단 작전참모의 지휘 밑에 우리 분대(근무성원 제외) 7명이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은 분대장, 다음은 부분대장인 나, 다음은 1자동보총수, 2자동보총수, 3총수 이런 차례의 순서였습니다. 전투준비 완료자세에서 순서대로 나갔는데 찌른건 전사(이름은 생각안남)였습니다. 찌른 후 그는 정신을 잃었고 병원에 후송된 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내가 못찌른 것은 1m 앞까지 달려가 총창을 뒤로 비끼고 그를 보니 나를 두눈으로 자세히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오락회때 함께 춤을 추던 생각,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던 생각, 그가 들려주던 그의 고향, 동년시절이 떠올랐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전사가 쓰러진 후 그의 총창 구멍으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나의 총창은 그의 배에 가 꽃혔습니다. 현장에서 그의 어머니와 녀동생은 까무라쳤었고 남동생과 아버지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저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워 밥을 먹을 수 없었던 것밖에……. 그 다음부터 우리 6명(전사를 제외함)은 2주일간 려단본부(야전본부)에서 휴식하고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죄책감에 그의 가족이 상황을 물으니 아는 사람은 우리 부대에 1명도 없었습니다. :112 한성룡 2001-7-25 (02 :10) * 다음은 한 재중 탈북 남성이 인편을 통해 북한인권시민연합에 전해온 글이다. 북한사투리를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싣는다. 나의 아버지 한택섭은 1940년 2월 14일생이고 당별은 조선로동당, 직장은 함북도 연사군 석수리 부기장을 하였습니다. 1987년 이후에 함북도 연사군 삼포리 축산작업반장을 하다가 1995년에 차사고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나의 어머님 김란은 1942년 2월 7일 함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고, 1987년 4월 7일 병(고혈압)으로 세상을 뜨셨습니다. 나의 동생 한경숙은 1973년 4월 8일에 함북도 연사군 석수리에서 태어나 석수인민학교 4년, 석수고등중학교 6년을 졸업하고, 함북도 연사군 삼포리 남새작업반에서 일을 하다가 1991년 결혼하여 슬하에 딸(김향미)을 낳고 (연사군 광양리) 1998년 5월에 병(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나 한성룡은 1971년 4월 29일 함북도 연사군 석수리에서 태어나 석수인민학교 4년, 석수고등중학교 6년을 졸업하였습니다. 어린시절 저의 생활은 아버지의 직업 덕분에 남이 부럽지 않을만큼한 생활을 보냈습니다. 졸업후 1987년 9월 4일에 김일성 동지의 생일을 기념하여 상등병 군사칭호를 수여받고, 1990년 2월 16일에 김정일 동지의 생일을 기념하여 하사의 군사칭호를 수여받고, 대대 경비분대 부분대장으로 임명받았습니다. 1988년 상등병 군사칭호를 받은후 나의 목표 첫째는 조선로동당에 입당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군관(장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나의 하루일과는 4시간 잠자기와 나머지 시간은 훈련과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우리의 대상물은 평양-개성 사이에 굴을 뚫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아의 군사칭호를 수여받았고, 경비분대 부분대장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때에도 하루 4시간 립초근무와 2시간 대기근무, 2시간 잠자기, 나머지 시간은 훈련과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후 1995년 4월 15일에 평양시 통일거리 건설장에서 입당을 하고 그해 4월에 군관학교(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입학하였습니다. 1996년 4월에 나는 군관학교 최우등으로 졸업하여 7623군부대 16대 소대장으로 배치되었고, 그 이듬해 10월 10일에 주위로 7623군부대 16대 소대장으로 사업하다가, 1998년 3월 비편재축소에 걸려 제대하여 함북도 연사군 광양리에 배치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농민이기에 나도 농민으로 있다가 1998년 6월 1일에 중국으로 탈북하였습니다. 탈북하게 된 동기는 나의 동생 한경숙이 제대되는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당시 증상은 머리아픔 뿐이어서 일없겠거니 하였는데 훗날 머리아픔이 심하여 리 인민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여보니 결핵성 뇌막염이었습니다. 병원에 입원을 시키자니 식비를 댈 경제원천이 없고 하여 집에다 두고 한쪽으로 돈을 꾸어 약을 사서 주군 하였습니다. 병원 사람들의 말이 이 병은 죽지않으면 머저리가 된다고 하니 나의 가슴은 불안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에게 동생을 맡기고 저세상으로 갔건만 나에게 능력이 없고보니 정말 답답했습니다. 1998년 5월 중순경 일을 나갔다가 퇴근하여 동생 병문안을 가니 동생이 나에게 진통제 주사를 놔달라고 부탁해 병원에 가시 병원에는 진통제가 없다는 것이 의사의 말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다가 동생의 소원을 못들어주는 것이 원망하여 다시 병원에 가니 초급당 지도원아주머니가 주사를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병원에 현재 진통제가 있는데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만 놔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말에 열이나 병원 의사를 때렸는데 그만 까무라쳐 군안전부에 10일간 구류처벌을 받고 나오니 그날이 동생 장례날이었습니다. 동생의 얼굴을 마지막까지 보지 못한 내가 동생을 뭍고 집으로 오니 초급당 집행회의에 참가하라는 통지가 와 있었습니다. 회의에 참가하니 당적으로 엄중경고가 떨어졌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생각 또 생각 끝에 이 땅에서 살아갈 용기와 이 사회를 위해 일한다는 것, 이런 사람들 이런 비인간적인 사람들 밑에서 사업한다는 것이 나의 자존심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온 사람들의 말도 몇 번 들은 적이 있고하여 중국으로 들어갈 결심을 한 후, 6월 1일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탈북하였습니다. 군사복무 시절, 아마 내가 경비분대 부분대장을 하던 때인 1993년도로 기억됩니다. 우리 분대에 다른대에서 강직조동되어 온 대원이 있었는데 분대장과 나이기 비슷했습니다. 분대장의 성질이 매끄러워 자주 그와 충돌이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니 그가 무기(자동보총) 1정과 탄약(300발)을 가지고 도주한 것이었습니다. 3달후 그를 잡아 려단에서 전 려단이 다 모인 가운데 군사재판을 하였는데 그의 죄는 우선 당과 수령, 조국을 배반하고 부대를 도주한 것, 둘째 무기와 탄약을 가지고 나간 것, 셋째 무기와 탄약을 가지고 강탈, 강간을 한 것이었습니다. 판결은 창형으로 되었습니다. 하여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과 녀동생, 전 려단이 보는 앞에서 창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집행은 려단 작전참모의 지휘 밑에 우리 분대(근무성원 제외) 7명이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은 분대장, 다음은 부분대장인 나, 다음은 1자동보총수, 2자동보총수, 3총수 이런 차례의 순서였습니다. 전투준비 완료자세에서 순서대로 나갔는데 찌른건 전사(이름은 생각안남)였습니다. 찌른 후 그는 정신을 잃었고 병원에 후송된 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내가 못찌른 것은 1m 앞까지 달려가 총창을 뒤로 비끼고 그를 보니 나를 두눈으로 자세히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오락회때 함께 춤을 추던 생각,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던 생각, 그가 들려주던 그의 고향, 동년시절이 떠올랐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전사가 쓰러진 후 그의 총창 구멍으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나의 총창은 그의 배에 가 꽃혔습니다. 현장에서 그의 어머니와 녀동생은 까무라쳤었고 남동생과 아버지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저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워 밥을 먹을 수 없었던 것밖에……. 그 다음부터 우리 6명(전사를 제외함)은 2주일간 려단본부(야전본부)에서 휴식하고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죄책감에 그의 가족이 상황을 물으니 아는 사람은 우리 부대에 1명도 없었습니다. 2001년 7월 한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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