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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와 좌절을 넘어 희망의 미래로 - 윤인호
동지회 15 3806 2004-11-19 04:05:03
나는 1975년 함북 회령에서 2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성년이 되어 함북 체육선수단 핸드볼 선수, 회령시 금생지질탐사대 시추공 등으로 일하다가 새로운 희망을 찾아 1997년 7월 두만강을 건넜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1998년 11월 대한민국에 귀순했다.

관계기관의 조사를 마치고 1999년 4월초 경기도 광명시에서 제2의 인생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정착초기에는 낯선 곳에서 혼자 산다는 것이 너무나 외로워 밤이 되면 부모님의 사진을 보며 훌쩍거리기도 했다. 다행히 정착초기 자매결연을 한 광명시 모교회의 목사님과 장로님께서 물질적·정신적으로 많이 도와주셔서 그나마 큰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종교생활은 남한에서 혼자 생활하는데 대한 심리적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종교에 관심을 가진 것은 중국에서 은신생활을 할때 교회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부터였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국내에 들어와서도 교회에 계속 나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불교로 개종했다. 개종할 때는 마음의 부담감과 주변의 시선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으나 내 자신의 판단을 믿고 개종을 결정했다. 현재는 조계종 소속 금강정사에 다니며 마음공부를 하고 있다. 아마도 이제야 나에게 맞는 종교를 찾은 듯싶다. 정착초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교회 분들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같은 신앙인으로서 이 사회에 사랑과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광명시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광명시립도서관에서 임시 사서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신변보호 담당형사님의 노력 덕분이었다. 북한에서 공장생활만 하던 나로서는 새직장에 적응하기가 다소 힘이 들었지만 도서관 관장님이나 사서계 직원분들이 잘 대해 주신 덕분으로 즐겁게 지냈다. 직원들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관심도 보여주고 도와주려고 애썼으며 밥도 사주면서 격려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서관에서의 생활은 처음 정착하는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고 앞으로의 정착생활에 나름대로의 기초가 된 듯 싶다. 도서관 임시사서직은 9개월 정도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후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도 하고 궁리도 해보았지만 마땅히 할만한 일이 없었다. 생각 끝에 선택한 것이 음식점 경영이었다. 그 당시 먼저 온 선배들이 음식점을 운영하여 성공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고, 나도 선배들처럼 음식점을 해서 성공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어 음식점을 낼만한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가진 돈은 일천오백만원이 전부였다. 주위 분들은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느냐면서 걱정하는 눈치였다. 돈도 없고 나이도 어린 네가 무엇을 하겠느냐고 비꼬는 것으로도 느껴졌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이왕에 결심하고 시작한 일이니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식당개업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대전, 진주, 울산, 부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음식점 낼 만한 자리를 알아보았다. 영업이 될만한 곳이다 싶으면 보증금, 권리금, 가계세가 너무 비싸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러던 끝에 경남 진주에 있는 아는 분의 소개로 진주시 상대동에서 음식점을 시작하게 되었다. 힘든 준비과정을 거쳐 개업을 하고 보니 금방 사업이라는 것은 섣불리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엎어진 물, 가게를 그만둘 수 없는 상황에서 안간힘을 쓰고 인내심있게 가게를 끌고 나갔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직원들의 월급과 원료비까지 낼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결국 음식점 문을 닫았다. 실패 뒤에 배운 것은 철저한 사전준비없이 너무 성급하게 일처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가게를 유지하려면 최소한 개업 이후 1년 정도는 큰 영업이익 없이도 가게를 꾸려나갈 만한 밑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음식점을 하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느꼈다는 점에서 나의 첫 사업은 실패만은 아니었다.

식당문을 닫은 후 나는 사회경험을 더 쌓기 위해 우유 배달, 공공근로, 막노동 등을 하였다. 자존심을 죽이며 고된 노동을 하면서 느낀 결론은 이 사회를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해 서울 시내 모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후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면서 조금씩 성숙해가는것 같은 나 자신을 느낀다. 대학 입학전의 내모습이 남의 눈치나 보고 체면치레를 중시하며 하루빨리 성공하려는 한탕주의심정에서 무모하게 도전하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학생으로서 단지 하나라도 더 배워보겠다는 신념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사회준비생이다.

대학생활을 마치고 나면, 내 적성에 맞는 분야에 뛰어들어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고 싶다. 성공이 이루어지고 여력이 생긴다면 북한동포들의 삶을 살찌우고 남북통일을 앞당기는 일에도 일조하고 싶다.

2001.12 윤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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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락요새 ip1 2018-03-11 11:11:38
    두만강을 건느던때가 어제같은데 강산이 한번하고도 더 변했어요
    달빛에 경비대원을 뒤로 한채 누가 목덜미를 잡을가 잽싸게 옷을 벗고 강가에
    들어섰습니다 물이 목까지 올라왔어요 동물적인 본능으로 발끝을 차고 몸을 위로
    솟구치니 가라앉지는 않다라구요 허둥지둥 강의 반을 넘어오니간 뒤를 돌아볼겨를도
    생겨 얼른 돌아보니 누구도 없었어요 기슭에 도착하여 몸이 물밖에 나오니 추위가
    몸이 오그라 들었어요 젖은 몸에 옷을 들쳐입고 중국변방의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
    나무뒤에 숨었다가 또 뛰고 하여 도로에 도착 ,,,차가 몇대 지나 가니 살작 업드렸다가
    변방의 마을을 지나 산에 올랐어요 산꼭대기 올라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워 둘러보니 한쪽은 어둡고 한쪽은 불빛이 반짝거리고 ...이곳이 중국쪽이구나 가늠을 할수가 있었어요
    ㅁ몇고개를 넘어 어느골자기를 지나던때 갑자 기 개짖는 소리가 나더니 오토바이 소리에...사람소리에,,, 개소리에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누가 덜미를 잡는것같아 작은
    나무들사이를 정신없이 올라깟어요 한참뛰다가 누가우리를 따라오는 지 확인하구싶어
    걸음을 멈추는 순간 와작와작 소리가 딱끊어쪘어요 오토바이소리도 점점 멀어지고
    이제 야 숨을 돌릴수가 있었답니다 그러나 거기서 움직이면 주변에 숨어서 우리를
    살펴불것같아 우리는 거시서 가랑잎을 깔구 잠시 하늘을 쳐다보며 날이 새기를 기다
    렸어요
    불빛도 없어졌으니 또 방항을 잃었어요 그래서 해가 뜨는 쪽이 동쪽이니 반대쪽으로
    가면 되겠다하여 겨우 좁은 길을 찿아 나섰어요 인기착이나면 재빨리 풀숲에 숨고
    오토바이 소리나면 또 숨어서 사람의 동향을 살피고 하며 반나절을 지나 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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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만강을 ip2 2018-03-11 12:16:26
    무척 힘들게 넘었군요.

    나는 코노래를 부르며 넘었는데... 두만강물이 발목까지 차고 따따사던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중국땅에 발을 붙였어도 저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어요. 두만강을 넘어서 중국땅에 발을 붙이는 순간, 여기가 항일혁명선열들의 피가 스민 땅이구나. 하고 생각하니 중국이라는 생각이 없고 항일혁명전적지, 항일혁명사적지에 답사가는 심정이더라고요.

    돈도 없고 불알쪽 두개만 가졌으니 대로를 따라 힘차게 활개치며 행진해갔는데 그만 지신진근처에서 지나가는 중국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저를 공안으로 잡아가더군요.

    그 사람들의 말인 즉, 어떤 조선사람한테 사기를 당해서 나한테 화풀이 하는거라더군요.

    .............

    조선에 갔다가 다시 올때부터는 중국사람들을 믿지 않았으며 야간행군으로 단행하여 용정까지 도보로 돌파하여 연길로 입성.

    연길에서는 별로 위협을 느끼지 않음. 돈이 있으니 누구도 터치 않함. 마음대로 여행. 도적질이나 남에게 해를 안하면 무사통과.

    이것이 중국의 좋은점. 남의 일에 관섭안함. 남조선처럼 국가보안법 없음.
    중국 노래방에 가서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목청껏 불러도 신고하거나 잡아가지 않음.

    남조선노래방에는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없더군요.

    ..................

    게시글에서 진주에 식당을 오픈했단는데 식당을 하려면 서울에 해야지 왜 남조선시골구석인 진주에 했는지 매우 의문됨.
    아무리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랐다고 해도 자본의 원리를 그렇게도 모른다니 안타까움.

    그리고 서두에서 귀순했다고 했는데 남조선똥펄을 너무 못받음. 제3자인 나도 그저 불쌍하고 측은해 보임.

    2001년 글이니 이제는 18년 지났는데 지금은 어찌 사는지? 궁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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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락요새 ip1 2018-03-11 13:12:21
    중국산골에서 한2일간 있은것같아요 우리초막과 멀지않은 곳에 어떤 두 아이가
    있었어요 하나는 여자아이고 하나는 남자 아이고 20살안팍이 되여 보였어요
    여자아이는 임신하고 있었구 북한에서 연락오기를 기다린대요 북에 가서 아이를 없애고
    다시온대요 남자 아이는 매우매우 불안해보였어요 여친이 가면 다시 만날수 잇을지
    걱정이 되나봐요 여친이 올때까지 초막에서 기다린대요 남친이 없는 사이 우리가
    물어보았어요 누구 아이인지 ? 중국사람 아이래요 둘이서 도망칠려구 약속했대요
    그런데 임신중이라서 북에 가서 아이를 없애구 와서 다시 산에서 둘이 살기로 했대요
    중국집에 가서 개밥을 흠치고 쌀빌어다 군용 밥통에 해먹더라구요
    주변 중국인들이 고발하라 두려워 초막을 몇번 옮겼대요 남친은 여친이 올때 까지 한달간 머무르기로 하였대요 우리는 거기서 먼저 떠났구요
    지금도 그아이들이 생각나요 저도 아이들을 두고 왔어 요 지금도 못찿고 있어요
    행방을 몰라서요 그래서 지금은 잠도 못자서 수면제의 도움을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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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락요새 ip1 2018-03-11 13:33:09
    여기서는 열심히일하여 먹구 사는데 별 어려움 없지만 노년은 걱정이되죠
    직장은 언제까지 나를 써먹을건지 알수가 없잫아요
    그때는 알수 없었지만 지금은 알수있어요 어떤게 행복인지
    이미 알았었더라면 여기 있지도 않을수 잇어요
    직장이 있어서 조금이나마 불안한 마음이 덜한것같아요
    여자는 자식이 전부인것같아요 남자에겐 여자 가 전부일수도 잇지만 ....
    이제는 더 울기운도 눈물도 말라 버렸어요
    잠시만이라도 잊어버리고 살구 싶어요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나때문에 가족이 파산되였으니간 죄책감에 요
    어디서나 살아있겠죠 살아만 있어라 하고 언제든지 만나껬지
    지금은 직장이 내집같지만 처음에는 원쑤들만 있는곳이 였어요
    어떻게 하나 트집잡고 쓰레기통 다뒤지며 서류 를 찿아 생트집을 찿아내고
    병원이라 환자 보호자 다보는데서 서류 집어던지고 주어오게 하고 연장근무
    시키고 야간근무 20일씩 하구 그것도 14시간 근무요 그래도 모자라 집에 보내지 앟고
    한국사회가 너무너무 나쁜 사회라 생각했어요
    그것들에게 복수할려구 쉬는날이면 서점가서 책사구 밤을새며 독학했어요
    5년을 공부하니깐 답이 나오더라구요 인수인계할대 다 영어로 하고 잘난체를 하며
    스트레스 날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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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가막혀 ip3 2018-03-11 16:31:50
    알피2번 이놈은 대가리에 똥통만 들어있나 글쓴꼬라지하고는..
    지금때가 어느때인데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목청껏 불렷다 이거 아주미친놈이구나..
    야 이븅신아 그만큼 돼지집안노예로 개고생하고도 그노래가생각나니?
    이놈은 탈북자로 가장한 사이버개놈들일거야..
    글을쓴거보면 정상적인놈이 쓴글이 아니다...이그 노예근성 못버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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