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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 어엿한 사업가랍니다 -박강인
동지회 18 4551 2004-11-19 20:52:55
가을의 한복판에서

한여름을 뜨겁게 달구던 태양 아래서 더위 걱정을 하던 것도 잠시, 이제는 바람이 제법 쌀쌀해 진 것이 어느덧 가을의 중턱에 다가와 있다.길거리에 널려있는 은행 열매와 낙엽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시간의 속도와 함께 하루하루 이곳 생활에 적응해 가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는 이곳 대한민국을 우리나라로, 과거 내가 태어난 곳을 북한이라 부르기도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어제 저녁에는 해외출장을 다녀온 후 인근에 사시는 거래처 사장님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세상사는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어려운 경제여건, 그리고 얼마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다녀간 북한 응원단 등을 소재로 열을 올리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정말 스스로도 나라 걱정을 할 줄 하는 진정한 국민이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뿌듯해 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일원이 되고자 과거의 나를 버리기 위해 몸부림치던 지난 3년간의 노력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켰을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 탈바꿈의 역사라고나 할까.

시련과 도전

북한에서의 삶과 오랜 해외 도피중의 경험으로 그늘지고 어두운 면에 길들여진 탓에 처음 도착한 서울은 미개척지에서 느낄 수 있는 동경 반, 두려움 반의 땅이었다. 사고무친한 내 처지에 어떻게든 살아가려면 이미 기반을 잡고 있는 사람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가 과연 여기에 잘 정착할 수 있을까? 아무리 용기를 내어 보아도 낯선 환경에서 오는 이질감은 쉽게 극복되지 않았고, 그렇게 배회하는 사이 일부 부도덕한 사람들에게 사기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정말 의지할 것 하나 없는 사회에서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고 좌절감에 주저앉기도 하였다.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가끔은 술에 만취된 채 택시기사와 시비를 벌이기도 하고 지나가는 행인과 이유 없이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방황하다가도 나 하나만을 믿고 있는 가족들을 떠올리면 더 이상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 찾아 온 희망의 땅이란 말인가?
死線을 넘나들면서도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한가지 생각으로 꼭 손을 부여잡고 눈물로 함께 하던 처자식이 아니던가?
마음을 고쳐먹고 어떻게든 살아 보기로 하였다. 그날부터 낮에는 자동차 정비학원에서 공부하고 저녁에는 컴퓨터 앞에서 필요한 정보를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상식을 넓혀 나갔다. 이때 컴퓨터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는데, 만약 컴퓨터를 몰랐다면 정착과정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정비 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처음에는 낯선 자동차 관련 용어에 고생하기도 하고, 부속을 분해해 놓고선 정작 조립할 줄 몰라 애를 먹은 적도 여러 번 이었다. 하지만 기름때를 묻히면서 동료들과 함께 배워 가는 사이 나 자신을 위해 흘리는 땀의 소중한 가치도 함께 배워갈 수 있었다.

힘들게 6개월 교육을 마치고 마침내 자동차 정비 기능사 자격시험에 응시했다. 그때 다니던 학원 수강생 20명중 3명은 일찌감치 시험을 포기했고, 나머지 17명 응시생 중 4명이 합격했는데 그 중 당당히 내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사회에 와서 처음으로 본 시험에 당당히 내 이름 석자를 올리고 나니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다. 한번 해 보자구!"

어엿한 사업가가 되다

정비사 자격증으로 카센터에서 취직해서 쉽게 살아 볼까도 생각했지만, 아직 사회 초년생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가지를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싶어 공부를 더 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왜 취직을 않느냐며 주위로부터 따가운 시선도 받았지만 정비사 자격취득은 나의 정착의지와 능력을 테스트하는 정도라고 생각하고 좀 더 욕심을 부려 공부에 전념하기로 했다.

북한에서부터 관심 있던 무역 관련 업무를 한번 제대로 배워 보기로 하고,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검색한 끝에 경기도청에서 저렴한 비용에 개설한 야간 무역실무 교육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바로 등록해서 수개월간 교육을 받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늦은 밤 공부를 끝낸 뒤 지하철을 타고, 또 마을 버스를 갈아타며 집으로 돌아 올 때는 비록 몸은 무거웠지만 앞날에 대한 부푼 꿈으로 마음만큼은 가벼웠다.

그렇게 나름대로 꾸준히 준비한 덕분에 정착 1년만에 무역업 신고를 하고 정식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사업이라고 해 봤자 변변한 사무실도 없고, 직원도 고작 한두 명 거느린 채 시작한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내 꿈을 키우는 나만의 공간인 만큼 내게 있어서는 여느 재벌기업 부럽지 않았다.

무역업 간판을 내걸고 국내에서 팔다 남은 재고상품을 중국으로 수출하기도 하고, 또 국내 업체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중국에서 구해 수입을 대행해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애초부터 일이 쉽지는 않았다. 거짓 오퍼에 속아 손해를 보기도 하고 처음부터 불가능한 거래조건에 매달리다 일을 망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던 것은 死線을 넘나들며 내 나라에 대한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고 그 속에서 사람의 중요성을 몸소 체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늘상 先사람 後재물 원칙을 굳게 지키며, 장사를 하더라도 사람부터 먼저 생각하는 경영철학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나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이 작은 수확이지만 조금씩 사업성과도 거둘 수 있었고, 이제 어엿한 무역상으로서 명함을 내밀 정도가 되었으니 예전에 비하면 크게 성공한 셈이다.험란했던 탈북자의 여정이 어찌 보면 내 삶의 소중한 자산이요, 밑거름이 되는 것 같다.

꿈꾸는 자의 행복

요사이는 중국 현지에도 직원 한 명을 두고 국내에서 철 지난 계절상품을 중국으로 수출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아무리 경제여건이 어렵고 불경기라고는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왜 길이 없겠는가?

남들보다 먼저 깨어서 부지런히 노력하기만 하면 환경 탓 할 것 없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얻은 교훈이요, 삶의 철학이다. 아직 남들과 비교하면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나 정말 보잘 것 없는 나 자신이지만, 반기는 사람 하나 없던 낯선 남쪽 땅에서 나를 걱정해주고 늘 잘 되라고 격려하고 도움 주신 많은 이웃들을 가지게 된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 든든하고 남 부러울 것 하나 없다.

이제까지는 사랑을 받기만 하는 처지였지만 앞으로는 더 열심히 살아서 받은 사랑 倍加하여 이웃에게 나누어 줄 줄도 아는, 그런 넉넉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오늘도 나의 비좁고 허름한 사무실은 물건 박스로 가득차 있다.하지만 내 마음만큼은 저 푸르고 넓은 가을 하늘처럼 한껏 부풀어 있다.

"저 자신 있습니다. 저 해 낼 겁니다. 지켜 봐 주십시요!"

2003년 10월 박강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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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리산 ip1 2017-01-17 02:02:42
    남한에 잘정착하신같아서 보기가 좋읍니다
    글을읽다가 문득 이런생각이 들었읍니다 이땅에 외국인근로자들이 수십만명이 일하고
    있는대 그들은 몆년일하고 번돈을 가지고 미련없이 자기나라로 가버리죠
    반대로 탈북민들은 같은 동포이고 남한에서 벌고 또 소비도 하고
    출산율도 최악인대 인구증가효과도 있고 제3국에서 떠도는 탈북자분들 남한으로 빨리 오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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