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혁명분자의 딸 - 최순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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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희(가명) 함북 회령 출신 북한에서 함경북도 회령시는 백살구꽃으로 유명하다. 봄이되면 시(市) 전체가 백살구꽃으로 뒤덮인다. 원래 회령은 군(郡)이었는데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의 고향으로 주목받았으면서 90년대 초 시로 승격됐다. 1965년 경 우리 가족이 평양에서 이곳으로 추방될 때만 해도 회령은 국경지역의 척박한 땅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장하면서 회령은 국가의 지원으로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았고, 마침내 관광지로도 부상하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아버지의 형제들은 평양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정치적 사건의 외풍을 맞아 이곳으로 추방돼 내려왔다. 설상가상 내가 4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다. 아버지뿐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백부, 중부, 가족 모두 아버지처럼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모두 직장에 나간 뒤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할머니는 집에서 국가안전보위부에 잡혀갔다. 보통 사람들은 네살 때 기억은 거의 없다고 하지만, 나는 네살 때 본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를 잃으려고 그렇게 기억했나 보다』며 항상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눈시울을 붉힌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아버지는 반동집안이고 어머니는 출신성분이 좋아 대우받는 집안으로 알고 자랐다. 아버지는 머리가 비상하고 그 시대에는 드물게 피아노에 능숙해 학교 발풍금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비록 반동의 출신이지만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았다고 한다. 반동가족이었지만 아버지의 재능과 인물에 반해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했고, 나를 낳았으며, 동생은 뱃속에 남겨둔 채 아버지와 생이별을 했다. 회령서 인민학교와 여자고등중학교를 다니면서 체육무용반 시절 실력을 인정받아 전국 축전이나 행사에 곧잘 동원됐다. 사람들은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내며 나에게 관심어린 눈길로 『너의 아버지가는 누구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 때마다 나는『사망했어요』라고 풀죽은 목소리로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가끔 심술궂은 친구들이 『너의 아버지 정치범이지! 어디 사망했느냐(사망하긴 뭘 사망했느냐)』고 놀려대 울음을 터뜨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도 『반동의 딸인 주제에…』 라는 말이 나오면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울음부터 나왔다. 그랬다. 나는 반동의 딸이었고, 정치범의 딸이었다. 성장해 철이 들면서 나에게는 네 살 때 보았던 아버지로 인한 어떤 암울한 장막이 처져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좋은 대학에 갈 수가 없고, 출세는 물론 배경이 좋은 집안에 시집도 갈수 없다는 사실을… 세상을 알 만큼 나이가 들어서 왜 우리 가족이 반동의 가족이 됐고, 최씨 성을 가진 모든 남자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야 했는지 어머니로부터 들어 알게 됐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가족사는 이랬다. 할아버지는 6.25전쟁 직후 북한 권력기관에서 근무했고 우리 집안은 북한에서 내로라하는 상류계층이었다.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1956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강하게 비판하고 당의 집단지도체제를 요구했다가 「종파분자」로 낙인돼 숙청된 부수상 최창익이 우리 할아버지와 6촌이었다는 사실이다. 최창익은 일제시기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광복 후 평양으로 들어와 북한 정권수립에 참여한 고위 인사였고, 경제학과 역사학을 공부한 유명 학자이기도 했다. 56년 8월의 이 역사적 사건을 「8월 종파사건」이라고 하는데 최창익을 비롯해 윤공흠, 김강, 이필규, 서휘 등 연안파 인물들과 박창옥 등 일부 소련파 인사들이 김일성의 개인숭배와 독주를 비판했다가 된서리를 맞고 중국으로 망명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간 사건이다. 북한 영화에도 『당시 종파분자들의 책동으로 수령님(김일성)의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만큼 8월 종파사건은 북한 최고의 「반체제사건」으로 북한 사람이면 삼척동자도 아는 사건이다. 바로 이 엄청난 사건에 우리 가족이 연좌돼 화를 당했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1997년 망명한 황장엽 선생이 북한에서 정치범수용소가 생겨나서 오늘의 형태로 정착하게 된 것은 8월 종파사건 때부터라고 증언한 바 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우리 아버지가 수용소에 끌려가게 된 것은 7촌 아저씨벌 되는 부수상 최창익의 숙청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고, 태어나서 나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에 대한 오해도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좋은 출신성분 때문에 강제 이혼하게 돼 나와 내 동생은 수용소 행을 면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최창익 때문에 최씨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고, 내 남동생은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 남동생은 간신히 살아남은 최창익의 유일한 핏줄이라면 핏줄인 셈이다. 백모는 전쟁고아 출신이어서 역시 강제 이혼당한 뒤 정신분열증으로 고통 받다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둘째 삼촌의 가족은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모두 수용소에 끌려갔다. 사촌 형제 네 명을 포함한 여섯 명이 지금까지 행방불명된 상태다. 숙모의 출신성분이 별로 좋지 않아 강제이혼 당할 여지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 4형제와 그 가족들을 다 꼽아하니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만 18명에 이른다. 최창익의 7촌 조카의 가족이 이 정도이니 최창익의 직계와 그 가족의 운명은 더 말해서 무엇하랴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선생이 망명한 후 사돈의 팔촌까지 모두 잡혀 수용소에 끌어갔으며, 끌려간 사람이 200명에 달한다는 말을 들었다. 황장엽 선생의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먼 친척들이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는 이런 나라가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우리 아버지도 평생 본 적도 없는 7촌 아저씨 때문에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수용소에 끌려갔고, 이제 어언 30년이 다 된다. 이미 북한에 있을 때부터 회령에 있는 22호수용소며, 함남 요덕의 15호수용소 등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인간말살의 현장에 대해 동료들로부터 어렴풋이나마 들을 때면 그곳에 끌려가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와 최씨 가문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피눈물을 삼키곤 했다. 한편으론 김일성ㆍ김정일 체제하에서 애매하게 죽어간 사람이 어찌 우리 가족뿐이랴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추슬르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남한에 와서 남북대화며, 민족화해니 하는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북한 주민들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것을 보며 정말 분노를 느낀다. 인민을 억압하고 전대미문의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는 독재권력과 과연 진정한 협력과 화해가 가능할지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봤으면 한다. 민주화를 이룩했고, 북한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인권문제를 경험한 이 땅의 사람들이 정작 김정일정권의 만행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을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다. 이 문제는 나중에 통일이 된 뒤 북한 인민이 청산해야할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지 나는 누구보다 북한인권문제에 관심이 많다. 수용소 출신 탈북자들을 만나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 그리고 수용소 출신 탈북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인권단체에도 적극 참여해 북한의 인권실상을 알리고 북한민주화를 위한 길에 내 인생을 바치고 싶다. /nk.조선 2004년 8월 최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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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만 들었지 직접 느껴보지 못한 것들이고, 그렇다보니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거죠 이건.
그리고 한국정부는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닌.. 공식적인 대표기관
입니다. 대표기관이 북한주민들과 1:1로 협력을 주고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걸 안한다고 나무라는 것은 억지스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이 북한의 대표인사들과 접촉할 수 밖에 없는 거죠.
게다가 나름대로 북한주민들에게 이르기까지 조금이나마 해택을 주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북조선은 죄인들만 사는곳입니까? 왜 그리 인민들의 문화궁전을 못 꾸릴망정 죄인들의 수영소들은 많답니까?
참 답답한것입니다.
인민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죄인을 위한 나라인가봅니다.
그것도 죄인도 아닌 죄인을 놓고 말이지요
애매한사람들까지 붇잡아가두면 나라의 일은 누가 도맏하하는것인지 모를지경입니다.
정치인들이 정치하는것을 보면 다 아참재들과 다름없습니다.
답답한 북한주민들이 참 비참하고 불쌍합니다.
옆집의 지독히 못된 아비가 있다고 칩시다.
그 애비는 날마다 자식과 마눌을 패고,때로는 옆집이고 이웃이고간에
맘에 아들면 칼을 휘두르고,마당에서 큰칼을 숫돌에 갈아대며 언젠간
수틀리면 다죽인다고 위협하는 그런 애비입니다.
그런 애비와 원수처럼 지내면 덕이 없다하여 그런 애비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 자식과 부인의 참담함에는 말한마디 안하는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요?..
지금의 정부 처신과 꼭 같습니다..
어떻하던 그 나쁜 아비의ㅡ형제와 의논하더라도 그애비의 나쁜 버릇을 고치던지 아예 아버지의 자리에서 끌어 내는것이 옳치 않을까요?...
암튼 답답합니다.
어서 김정일 정권을 끌어내리고 북한의 동포들을 구출하여야 할텐데..
체제의 성격상 절대로 북한 주민의 봉기에 의한 혁명을 없을것으로 보입니다.
그렇ㄷ면 방법은 하나..
남한과 미국이 힘을 합하여 서서히 김정일의 목을 죄는 것입니다..
그러면 측근중의 한명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입니다.]
어서 그날이 오기를....
북한의 최고위급만을 상대로한 남북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피비린내 나는 북녁 동포의 한스런 인생을 우리는 생각하여야 한다..
성씨도 최씨구요~
할아버지가 미해명자인걸로 해서 인생전환시기마다 걸림돌이 되군했어요~
그런던중 탈북을 했구요 지금은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최순희 님도 힘내서 살아가시길 바래요~
대학에서만.. 민주당에 대부분 인사들이 김정일 김일성 추종하는 무리죠.. 왜냐?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서요.. 저도 다른 남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그런생각이 없는건 아닙니다만...(반대하는)
적어도 야당 ( 김저일이 민족에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 야당하고는 (민주당)
같이 갈수 없습니다.
중학교 중퇴생인 김일성에 비할 수 없는 인테리들이었지요.
그 열등감으로 더욱 숙청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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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모르고 인간고생 다했네요.
그끝에 탈북하셔 이렇게 글을 올리니
최창익가문에 대성공을 하셨네요.
통일되면 최창익가문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겠어요.
누가 그일을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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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인권불모지를 향해 저도 풍선을 열심히 날리렵니다.
대북풍선단장 이민복
8월 종파로부터 인민무력부장 김창봉의 사건 , 류장식사건 청진 7군단 사건 이렇게 큰사건들때마다 가족친척 과 연류관계자들을 처형하였습니다
그외에도 크고작은 사건때마다 그렇게 처형된사람들이 수백수천에 달합니다
언젠가는 김부자의 역사적인 만행을 심판하는날이오고야말것입니다
우리는 북한독재정권이 변하될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지만 변하된다고해도 용서치않을것입니다 공산당의 악질간부들이 다시 붉은 자본가로 변신한다면 인민들의 피맻힌원한을
갚지못할것이기때문입니다
반드시 갈아엎고나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야할것입니다
그래서우리는 대화와 협상이나 경협을 통한 변화가 아니라 반드시 붕괴시켜야만 한다고주장합니다
이제 북한인민들은 세계를 보면서 눈을터가고 있습니다
반드시그땅에서 인민들이 반인민적 독재정권을 뒤집어엎을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철의흐름 은 그렇게흘러가고있습니다
미국이나 남한은 간접적인 영향을 줄뿐입니다
미국은 북한민중의 민주의식변화에 커다란영향을 주고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정부로서는 한계를 넘어서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북한정권의 지속적인 연장을 부추길뿐입니다
북한은 지금 외부적영향에 의하여 북한민중들의 의식이 점차준비되여가고있습니다
김정은 의정권을 붕괴시키기위해서는 그의손에있는 검과방패(케스타포)를 마비시켜야합니다 김정은 케스타포의 망책입니다
북한을 외부로부터의 정치군사적대응 은 무의미한것입니다 내부의 검과방패를 와해시키면 김정은 무장해제하는 것입니다
그가 군과 당 정부를 무엇으로 관리합니까 바로 케스타포입니다
당근로단체조직도 감시통제기능을 수행하지만 공개되여있고 눈에보이는것이지만 케스타포 의 정보선은 보이지않는 조직망입니다 망책인 보위원이 먹고 살기바쁘게되면 마비가되고 외부세계에 빠져들게됨니다
이것은 1995년에 경험한 사실입니다 나느그때 보위원의 비호밑에 탈북을 하였으니까요
나는 그때 보위원을 보고 <...언제까지 이렇게살거요 지금은 자기살구멍은 자기가 찾아야합니다 그자리가 영원하지않아요 언제어떻게될지 모루는겁니다 ...그리고 내가중국에가서
돈가져올테니까 ...2부지도원에 증명서떼주라고 이야기해주시오...그리고 그후나는 북한을 탈출할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