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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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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행길1 - 김영권
동지회 21 9487 2005-11-09 10:21:27
이국 땅에 흘린 피


저녁 7시쯤 되었을까. 감방문 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간수가 나더러 나오라고 한다. 웬일일까. 저녁에는 찾을 수 없는데 …. 나가보니 웬 낯선 조선인 한 명과 러시아인 한 명, 그리고 감옥소 경찰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낯선 조선 사람이 조선말로 나에게 물었다.

『앉으시오. 북조선공민 김영권지요?』

말투를 보니 조선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 그래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하바로프스크 경찰서 상급 지도원 김와실리요, 내가 당신을 호송하려고 왔소.』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긴 축인데 말투는 건방지고 어딘가 모르게 틀을 차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어디서 그를 본 기억이 났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하바로프스크 체크도민 러시아 경찰서 수사과 책임지도원이었다. 그는 사할린에서 태어난 조선인 교포다. 들리는 말이 그의 부모들은 남조선 출신이라고 한다. 그는 체크도민 경찰서에서 근무하면서 북조선 안전부 사업을 잘 도와주고 있었고 그들에게서 선물도 받고 명절 때면 초청도 받는다는 말들이, 많이 돌아 벌목장 우리 노동자들은 은근히 그를 피하였다.

바로 그러한 사람이 나를 데리러 온 것이다.

『나를 언제 호송하게 됩니까?』
『내일 아침 7시 비행기로 가게 되었어요.』
『그럼 당신에게 두 가지 요구 조건을 제기하겠는데 들어 주시겠습니까?』
『뭐요?』
『첫째는 오늘 저녁에 마야를 만나는 것이고, 둘째는 여기 경찰들에게 내가 법에 어긋나는 아무러한 죄도 없다는 것을 당신이 법관으로서 증인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잡혀가면 끝인데 그런 게 필요 있어? 그리고 나는 좀 자야겠어.』

나는 그의 거만한 태도에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아 참기 어려웠다.

『당신이 만약 그 요구 조건을 들어 주지 않으면 나를 순조롭게 데리고 가기가 힘들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는 나를 한참 쏘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순조롭지 못하면 어쩔 셈이야.』
『뛰던가, 아니면 최후 발악이라도 해야지요.』
『흥, 총으로 쏘면 어떻게 된다는 걸 알아?』
『알지요, 내가 바라던대로 되지요.』

그러자 그는 나를 무사히 데리고 가는 것이 자기 임무라고 생각했던지 얼르기 시작했다.

『김선생은 그런 생각을 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야 해요. 방법은 있지요. 당신이 러시아법을 위반한 것으로 하고 러시아 재판을 받고 러시아 감옥으로 가면 되지요.』

그의 말이 맞았다. 북조선 벌목장에서 그러한 사건이 몇 번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야에 대하여 상세히 이야기하고 카자흐스탄 경찰들이 나를 큰 죄인으로 생각하는데 그들에게 옳은 인식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감옥소 경찰들도 역시 나에 대하여 알고 싶었던지 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을 알고 모두가 아깝다고 혀를 차고 나와 마야를 두고 사랑을 주제로 한 인도 영화의 주인공처럼 묘사하면서 떠나기 전에 마야를 만나게 하자고 하였다.

이렇게되자 김와실리는 자기가 직접 마야를 데려오겠다고 나갔고 나는 감방으로 돌아와 소지품을 정리하고 칼을 몸에 깊숙이 감추었다. 그 칼은 나와 한 감방에 있던 러시아인이 흘레브(러시아 빵), 칼바스(러시아소시지)를 썰어 먹으려고 몰래 가지고 들어온 것인데 내가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나는 그 칼을 거의 한달 동안 몸에 깊숙이 감추고 있었고 그 러시아인은 칼이 없어진 것으로 하여 은근히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경찰들이 그가 칼을 가지고 감방에 들어 왔다는 것을 알면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그 칼을 다시 꺼내어 만지고 또 만졌다. (내가 혹시 실수하면 어쩌나…. 대담해야 해. 북조선으로 절대로 끌려가면 안 돼. 두 손으로 힘껏 찌르고 위로 쭉 올려 째야 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간수가 와서 소지품을 다 준비해 가지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아침에 떠나는데 왜 벌써 다 준비하고 나 가느냐고 하자 그는 나와 마야를 생각해서 아침까지 사무실 한 칸을 내줄테니 마야와 같이 있으라는 것이었다.

면회실에 들어서자 기다리던 마야는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소리내며 울었다. 나는 쾌활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아니 잡혀가면 죽는다면서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어요.』
『운다고 풀릴 문제도 아닌데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우는 것보다 웃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자 마야는 정색해 가지고 모스크바 남조선 대사관에 연락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나는 맥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느덧 아침 6시가 되었다. 경찰들이 와서 시간이 되었으니 비행장으로 나가자고 하였다. 드디어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김와실리가 나에게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야가 가슴 아파할 것 같아 수갑은 채우지 않겠는데 비행장까지 조용히 나갑시다.』

우리는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으로 내려서면서 곧 바로 나가면 현관 출입문이고 양옆으로 긴 복도로 되어 있다. 현관 출입문 앞에는 호송차가 발동을 걸어 놓은 채 세워져 있었다. 나는 1층에 내려서면서 현관 출입문으로가 아니라 옆으로 돌아서 복도로 뚜벅뚜벅 걸었다.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을 경찰들도 알았던지 부러 말리지 않았다.
약 3~4m 복도를 따라 걸었다. 나는 칼을 뽑아 들었다. 하나- 두울- 세엣! 실패다. 온 몸에 식은땀이 쭉 내뱄다. 뒤에서 김와실리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김 선생, 이젠 시간이 되었어요. 늦으면 비행기를 못 타요. 그만하고 나갑시다.』

나는 그냥 복도를 따라 걸었다. 다시 한 번, 하나- 둘 - 셋! 아 또 실수다. 내가 왜 이럴까. 눈을 딱 감았다. 다시 한 번, 하나- 두울- 셋! 제기랄 또 실수다. 이상한 생각 이 들었던지 김와실리가 급히 따라왔다. 바로 등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손이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순간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흠칫 놀라며 악- 하고 소리쳤다.
퍽- 칼이 뱃가죽을 뚫고 들이 박혔다. 그 순간 또 다시 그 무엇에 놀란 것처럼 아-악 하며 칼을 위로 쭉 올려 당겼다. 어느 정도 뱃가죽이 찢어지면서 칼이 쭉 빠져 나왔다. 비틀거 리다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예상 못 했던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경찰들의 다급한 외침소리가 들렸다. 마야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나에게로 다가오다가 내 손에 쥐여져 있는 피묻은 칼을 보더니 악 소리치며 쓰러진 내 위에 푹 고꾸라졌다. 나는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마야를 흔들었다.

『마야, 마야, 아니, 왜 이래.』

마야는 정신이 좀 들었던지 급히 내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며 물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짓을 했어요. 빨리 말해요. 예, 빨리.』

나는 마야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마야, 고마워.』

너무도 당황한 경찰들은 어쩔바를 모르고 온통 뛰어다닌다.
나는 김와실리를 찾았다.
구급차를 부르려고 달려갔던 김와실리가 급히 달려왔다.

『김와실리, 미안해요. 나는 아무래도 갈 것 같지 못해요. 후 - 그러니 돌아가면 김일성에게- 내- 인사를 전해주세요. 그리고 내가 김일성이 죽으면 한 달 동안 큰 잔치를 차리고 싶어했다고 전해주세요.』

나는 그를 보며 더없이 만족한 사람처럼 웃음을 지었다. 이상하게도 생각했던 바와 같이 아프지 않았고 다만 잠자고 싶었다. 구급차가 달려왔고 나는 경찰들과 마야, 의사들과 함께 담가(들것)에 실려 구급차에 태워졌다. 차가 한참 달릴 때 나는 잠들어 버렸다. 누군가 자꾸 흔들어 깨운다. 갑자기 콧마루가 찡해지며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화가 났다. (이것들은 왜 자지 못하게 할까.) 자지 못하게 알코올 솜뭉치를 코에 가져다 댄 것 같았다. 차가 멈춰서고 나는 담가에 실려 내리면서 잠들어 버렸다. 꿈을 꾸었다. 나는 그때 그 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참으로 재미있는 꿈이었다. 처음 내가 탈출하였을 때 하바로프스크에서 나를 도와준 할머니의 집에서 한국방송공사에서 보내온 책을 보았는데 그 내용이 꿈속에 나타났다. 그 책은 미국의 의학박사가 쓴 책을 국문으로 번역한 것인데 사람이 육체에서 영혼으로, 영혼에서 다시 육체로 돌아오는 내용이다. 내 꿈속에 나타난 것은 심장마비를 일으킨 사람이 영혼에서 아무런 장애도, 구속도 받지 않고 공중으로 떠다니다 자기를 치료하는 의사들을 내려다보고 웃고 있었다는 책의 내용이었다.

『기분이 참 좋은데. 저 사람들은 바로 그 책에서처럼 수술하고 치료를 하는 거야. 야! 좋구나. 내가 이렇게 좋아하다 죽지 않을까. 응, 그래. 알만해. 책에서 죽은 사람이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곳으로 날아다녔다고 했지. 나도 그렇게 안될까?』

나는 그때 꿈속에서 본 책의 내용이 참으로 재미있었다. 꿈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온 천지가 캄캄해지면서 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정신을 차린 후에 울고 있는 마야에게 처음으로 한 꿈 이야기였다. 그럼 내가 왜, 무엇 때문에 할복이라는 끔찍한 짓을 하게 되었는지 한 번 돌이켜 보기로 하자.


벌목장 탈출


내가 북조선의 독재정치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여름부터라고 생각한다. 그때 나는 자유 외출하여 하바로프스크에 와서 정시하라고 하는 조선인 교포 할아버지를 알게 되어 그의 집에서 이틀 동안 유숙하면서 그를 통하여 북조선의 김일성은 자기의 본명이 아니며 원래 진짜 김일성은 1930년대 초에 조선 사람들 속에 널리 알려진 공산주의 투사라고 하면서 원래 김일성이 죽은 다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김일성의 이름을 가로채어 자기를 김일성이라고 자처하였으며, 그의 아들 김정일이도 북조선에서 는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의 고향은 소련의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아무르스크 강변이고 당시 그의 소련 이름을 유라라고 불렀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이 소련에 많다고 하였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노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이도 많으신 분이 젊은 사람 앞에서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가?』고 하면서 그 집에서 하룻밤 더 자려고 계획하였던 일정을 바꾸어 여관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 후 노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나는 북조선은 독재정치이며 인간의 초보적인 자유도 보장되지 않는 신격화된 사회, 폐쇄화된 사회라는 것을 알았어도 김일성이 자기의 독재를 위해 희생된 투사의 이름까지 가로채어 인민을 기만하는 파렴치한 인간이라는 것은 몰랐다.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도 북조선에서는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면서 백두산 일대를 대로천 박물관을 건설하였는데 거기에 소비된 자금은 아마 내 키를 넘을 것이다. 나는 김정일의 고향이 소련의 아무르스크 강변이라는 말을 들은지는 오래됐으나 그것은 남조선에서 북조선을 헐뜯기 위한 악선전이라고 생각했다. 백두산 일대에 가보면 김정일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를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부터 나의 사상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 같다. 마치도 온실에서 곱게 피어난 한 떨기의 꽃송이가 찬바람 부는 들가에서 당장 시들어 버리듯이….

1991. 8. 23. 일이다.

나는 저녁에 친구들과 함께 3년간 처와 가족을 떠나 징용살이를 하다보니 고이고 쌓인 가족에 대한 달콤한 정, 냉동기와 텔레비전 몇 대를 사가지고 조국에 돌아가 야매 가격으로 팔면 돈벌이가 잘 될 것이라는 야릇한 생각, 친구들 호상간 오는정, 가는정 찰찰 넘치게 술 몇 잔 맛있게 마시고 있었다.
친구들은 술 몇 잔씩 마시고 기분들이 좋아지자 돌아가는 정세를 놓고 말을 주고받았는데 기본은 소련방의 민주화 노선에 따라 변화된 세계적 흐름이었다.

나는 그때 기분도 좋은 김에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이번 8월 군사정변은 세계정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번 사건은 러시아에서 민주주의가 실시되느냐, 아니면 공산독재가 실시되느냐하는 중요한 계기였는데 인민들의 거센 항거로 하여 쿠테타는 실패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개방, 개혁 정치를 해야하며 민주주의가 실시돼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그 날 술판이 끝난 다음 나는 자기의 실수를 크게 느꼈고 어딘가 모르게 무서운 생각에 사로 잡혔다.

아닌게 아니라 다음날 아침에 벌써 당위원회의 호출을 받았다. 나는 당위원회에 가서 아무 말도 한 것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그러나 당위원회 종합 지도원은 시간을 줄테니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노골적으로 돈을 가져다 바치라는 소리나 같았다. 내가 만약 조국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 그 즉시로 어떻게 처형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시베리아 벌목장에서는 간부들이 돈을 받아먹고 소위 죄인들에 대한 문건을 작성하는데 성한 사람을 정신병자로도 만들고 충실한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도 만든다. 나는 많은 생각을 하였으나 비굴하게 돈을 먹이고 살아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때 나는 더 지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단호한 결심을 내렸다. 뛰자. 탈출하자. 그리하여 바로 그날(8월 24일) 체크도민-하바로프스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마치 금방 누군가 뒷덜미를 잡는 듯한 조바심으로 오돌오돌 떨면서….

8월 25일 6시 30분, 하바로크스크 역에 도착한 나는 난처하였다. 어디로 갈 것인가. 탈출할 생각만 하였지 구체적인 목표도 계획도 없이 떠나고 보니 어떻게 할지 몰라 망설이기만 하였다. 나는 두 시간 가량 역 주변을 돌면서 생각을 정리하였다. 우선 목표를 설정해야 했는데 그 목표란 뚜렷한 것이었다.
남조선, 남조선 밖에 더 갈 곳이 없었다. 남조선으로 정치 망명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이미 고르바쵸프 대통령의 개방 개혁 정치로하여 아득하게 멀어 보이던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간 냉전의 종말은 일시에 태풍마냥 세계를 휩쓸고 마치도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소련의 수도이며 세계적인 대도시인 모스크바에 남조선 대사관이 자리를 척 잡고 있는 때다.

그런데 모스크바는 어떻게 가고 남조선 대사관은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던 나는 일전에 만나 본 일이 있는 조선인 교포 정시하 할아버지가 남조선에 친척 방문으로 갔다 온 일이 있다고 하던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나는 버스를 타고 그 노인의 집으로 찾아 갔다.
당시 노인은 꽃장사를 하면서 살았는데 장마당으로 막 나서려 던 찰나에 내가 들어섰다. 내가 인사를 하자 노인은 들어오라고 하면서도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였다. 아마 전번에(1년 전) 좋지 않은 말 몇 마디 한 것으로 하여 노여움을 사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하든 노인의 도움으로 남조선 대사관으로 가야 했다.

『자네 어떻게 되어 다시 왔나?』

나는 양해부터 구했다.

『할아버지, 작년에 있었던 일은 양해하여 주십시오. 저는 할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고 많은 생각을 하였고 또 할아버지와 같은 분이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김일성의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여 연구해 보았는데 할아버지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정말 북조선의 독재자들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우리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얼마나 무참히 짓밟고 있는가를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남조선으로 망명하려고 뛰쳐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새삼스럽게 나를 다시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남조선으로 가면야 좋기야 좋지, 그런데 그게 헐한 일이 아니야. 자네 이제 잡히기만 하면 끝이야. 그리고 북조선에 있는 자네 부모 형제들은 어떻게 하나? 들리는 말이 그들도 모두 잘못된다는데…』

그 말을 들은 나는 내가 그렇게도 고심하던 문제가 현실로 닥쳐왔음을 피부로 느꼈다. 이젠 정말 온 가족 친척들의 불행과 고통의 장본인으로 된 것이다. 열차를 타고 오면서도 줄창 그 생각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는데 처음으로 남에게서 그 말을 직접 듣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할아버지, 됐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성공 할 수 없어요.』

그러자 노인은 『됐네, 진정하라구. 밤잠도 제대로 못자고 쉬지도 못했을텐데 좀 쉬라구. 내 이제 시장에 나가 뭘 좀 알아보고 꽃도 좀 팔고 점심시간이면 돌아오겠네.』하고는 노친을 불러 식사도 시키고 잠자리도 깔아 주라고 당부하고 나갔다.

한국대사관을 찾아가는 길


할아버지는 그 날 오후 2시경에 돌아왔는데 자기가 잘 아는 교포 할머니 한 분이 친척 방문으로 일시 남조선으로 가게 된다고 하며 그 수속 때문에 모스크바 남조선 대사관에 일시 떠난다는 것이다. 그 날 저녁 나는 노인과 함께 그 집으로 찾아갔다. 할머니는 나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북조선 사람들이 불쌍하다느니 김일성이 죽지 않고 오래 산다느니 하면서 한참 말하고 나서, 자기는 모스크바에 못 가고 자기 사위가 자기 여권 수속 때문에 일시 모스크 바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집에서 자고 아침에 사위를 만나 토론해 보자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사위(오쎄르게이)를 만났는데 그는 아무런 증명서도 없이 어떻게 가겠느냐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증명서 없이 가자면 열차로 가야 하는데 열차는 7일간 가야 해요. 그런데 나는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시간을 낼 수 없어요.』

할머니가 옆에서 어떻게 잘 생각해보고 도와주라고 하자 쎄르게이는 한 가지 방법은 남의 신분증을 빌려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인데 이건 위험하고 또 신분증을 빌리자면 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담하게 한 번 해보리라 마음먹고 신분증을 빌리는데 돈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다. 2~3천 루블이 면 된다는 것이다. 그때 나에게는 미화 100달러와 소련돈 4,500루블이 있었는데 100달러를 내주면서(당시 1달러는 40루블 정도) 신분증도 빌리고 비행기표도 준비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쎄르게이는 내일 당장 떠나자고 하면서 잠간 나갔다 들어오더니 신분증을 빌리려고 했던 친구가 출장가고 없으니 며칠 후에 떠나자고 하였다.

며칠 후인 9월 6일 저녁 쎄르게이는 나를 찾아와 신분증과 비행기표를 다 준비했으니 내일 아침 11시 비행기로 떠나자고 하면서 신분증의 이름과 생년월일 같은 것을 외우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오쎄르게이와 그의 처 오따찌야나와 같이 비행장으로 나갔다. 우리는 혹시 북조선 안전원들이라도 있을까봐 으슥한 곳에서 약 15분가량 기다리는데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타실 분들은 개찰구로 나오라는 안내 방송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극도의 긴장으로하여 쿵쿵 울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귓가에까지 울렸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경찰은 신분증을 대조하지도 않고 그냥 통과 시켰다.
후- 하나님! 그때 시간은 하바로프스크 시간으로 오전 10시 30분경이었는데 7시간만에 모스크바로 날아오니 모스크바 시간으로 아침 10시 40분이었다.

모스크바 공항에 내린 후 나는 『후- 이젠 됐구나.』하고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날씨는 안개가 꼈는지, 구름이 꼈는지 분간하기 어렵게 음침하고 안개같은 가는 이슬방울들이 쌀쌀한 바람에 실려 온 몸을 감싸며 우수수 떨려났다. 그때 음침한 모스크바의 날씨와는 달리 나의 가슴은 성공하였다는 기쁨으로 가볍게 설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의 앞길에는 기쁨이 아니라 죽음으로의 언덕과 간고한 시련의 가시 덤불길이 놓여 있었다. 파란 곡절이 놓여 있는 자기의 운명을 내가 어찌 알 수 있었으랴.
우리는 공항에서 모스크바 안내 약도를 하나 사들고 대사관을 향하여 떠났다. 달리는 차에서 차창 밖을 내다보노라니 생각했던 모스크바와는 너무도 달랐다. 어둠에 잠긴 듯한 음침한 날씨에 건물들도 대체로 구식 건물, 말 한 마디 없이 차를 모는 운전수 역시 무뚝뚝한 표정이다. 그러나 여기가 바로 세계적인 대도시라고 생각하니 잠자고 있는 크나큰 괴물과도 같았다.


한국대사관에서 일어난 일


대사관에 도착한 나는 오쎄르게이에게 대사관의 대사님을 좀 찾아보라고 하였다. 한참 후 오쎄르게이는 대사관 관원 한 명을 데리고 나왔다. 그 관원은 나를 보더니 『안녕하세요, 북한에서 오셨다지요. 이 방에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대사님은 안 계시구요. 참사님을 찾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회의실 같은 방을 가리 켰다. 순간적으로 이상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바로 이 사람이 북한에서 타협할 수 없는 원수로 알고 있던 남조선 사람이로구나. 하 고 생각하니 등골로 식은땀이 쭉 흐르는 것 같았다.

그가 가르키는 방에 들어가니 대사관 가족인 듯한 중년 여인과 처녀 한 명이 포도를 먹으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들은 앉으라고 의자를 권하였다.
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한 쪽 벽에는 남조선 대통령 노태우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앞에는 남조선 국기가 세워져 있고 맞은편에는 세계 지도와 책장이 놓여 있었다. 처녀가 우리에게 포도를 먹으라고 권하면서 소련에서 사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처녀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아마 소련에서 산다고 하니 흥미를 느낀 것 같았다.

『예, 친척 방문으로 남조선에 가려고 여권 수속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처녀는

『아이, 한국말을 참 잘하시네요.』

하면서 뭔가 더 물으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며 키가 후리후리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는 들어서면서 여자들에게 옆방에 가 있으라고 일렀다. 그들이 나가자 그 사람은 자기는 대사관의 최 선생이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자기 소개를 하였고 나 역시 내소개를 하였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왔느냐는 최선생님의 물음에 남조선으로 망명하려는 나의 결심을 이야기하고 오쎄르게이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런데 오쎄르게이 말을 듣던 최 선생은 순간에 낯색이 달라지면서 쎄르게이더러 밖에 나가 좀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가 나가자 최 선생은

『김 선생이 망명하겠다면서 저 사람을 믿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가. 이런 일은 그런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면서 미안하지만 몸을 좀 볼 수 있는가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좀 불쾌하였다. 몸수색을 하다니…. 그러나 나는 남북간의 대립상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필요하다면 보십시오.』

하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는 내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고 절대로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며 말했다.

『지금 북한 대사관에서 자주 도발을 걸어옵니다. 얼마전에도 몸에 녹음기를 감춰가지고 망명을 신청하는 것처럼 하면서 대사관 관원들의 말을 녹음하여 가지고 러시아측에다 대고 한국에서 북한 사람들을 납치해 간다고 제기하여 러시아측 경찰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시베리아 벌목장 노동자 한 명이 남조선으로 가려고 남조선 대사관에 찾아 왔다가 성공 못하고 서구라파로 넘어가는 국경에서 소련 경찰에 체포되어 북조선 대사관에 잡혀갔다. 그는 심문에서 자기는 남조선 대사관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북조선 대사관으로 알고 찾아갔는데 들어가 보니 남조선 대사관이었다면서 남조선 대사관에서는 자기를 남조선으로 망명하라고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남조선 대사관에서 겨우 빠져나와 열차를 탔는데 잘못 타서 헝가리 국경까지 가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결국 북조선 대사관에서는 그를 이용하여 남조선 대사관을 비방 중상하는 데 써먹은 것 같다.
북조선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 사람들이 남조선으로 망명하는 것이다. 북조선 사람들이 탈출하여 러시아에서 사는 것과 남조선으로 가는 것은 그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르게 취급되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처벌한다.
그 외에도 최 선생은 여러 가지 실례를 들면서 북조선 대사관에서는 사람이 없어지면 남조선 대사관 주변에서 감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더러 이름과 생년월일, 간단한 경력을 쓰고 망명하겠다는 전향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이름 김 영권
생년월일 1955. 1. 13
출생지 양강도
사는 곳 양강도

경력
재소임업대표부 제8사업소 노동자


전향서
나는 북조선의 독재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남조선으로 망명할 것을 원하면서 한국 정부에서 받아줄 것을 요청합니다.
1991. 9. 7 김 영권

내가 다 쓰고 펜을 놓자 그는 여권은 무슨 여권을 가지고 있는 가고 물었다. 나에게는 여권이 없었다. 북조선에서는 도주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 최 선생 은 자기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여권이 없이는 못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내 귀를 의심했다. 여권이 없이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한 개 국가를 대표하는 대사관에서 이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는가 하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갈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재차 물었다.

『아니 그래 갈 수 없습니까?』
『여권이 없이 어떻게 가겠습니까. 다른 서방국가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 러시아는 아직 공산권내에 있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은 외교관계를 맺은지 얼마 안 되지만 북한은 40여년간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자칫 잘못 하여 외교상 문제가 크게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한국정부는 한 민족으로서 당신과 같은 사람을 도와주고 싶지만 지금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김 선생이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너무 안타까와 또 물었다.

『다른 무슨 방법은 없겠습니까?』
『방법은 이제 당신이 우즈백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 가서 살면서 잘하면 소련 여권을 만들 수 있는데 소련 여권을 가지고 한국에서 초청장을 받아 가지고 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탈출한지 며칠 안되는데 다시 북한으로 돌아 가든가.』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런 소리를 하는가. 남조선에 못가면 못 갔지 다시 돌아설 사람 같은가.) 하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좀 어렵기는 하나 당신이 헝가리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은 헝가리와 대단히 관계가 좋으므로 여권 없이도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헝가리로 가는 것도 신통치 못한 방법이라는 것을 느끼면 서도 도와주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고, 비로서 한국에로의 망명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뛰쳐나온 나 자신을 뼈저리게 뉘우쳤다.


어디로 갈 것인가?


대사관을 나선 나는 허탈감으로 하여 머리가 띵하고 도무지 무슨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어디로 갈까. 나에게는 갈 데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쎄르게이는 옆에서 보기가 안됐던지 넓고 넓은 소련땅에 살 데는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말고 여관에서 쉬자고 하였다. 엎친데 덮친다고 그날따라 찾아가는 여관마다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온 거리를 헤매며 자리를 찾던 우리는 밤 12시나 되어 개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여관에서 목욕을 한 다음 식사하자고 하였으나 나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침대에 드러누었다. 그러자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꼬냑 한 병을 가지고 와서 속이 답답할 때는 한 잔 하면 좋다고 잡아끌었다. 나는 혼자서 그 한 병을 거의 다 마시다시피 하고 거나하게 취한 김에 정신없이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8시경에 일어난 나는 세수를 하고 자리에 드러누었다. 쎄르게이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고 물었다. 나는 도리어 그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가고 물었다. 그러자 쎄르게이는 타쉬켄트나 알마티아에 조선인 교포들이 많은데 거기에 가서 좀 살면서 증명서를 해가지고 남조선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은가고 물었다. 그러나 그쪽으로 가서 아는 사람도 없이 어떻게 살며 여권은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생각하던 끝에 말했다.

『쎄르게이 아무래도 내친 걸음인데 헝가리로 가는 것이 어때. 국경까지 열차로 가고 국경을 넘을 때는 걸어서 넘으면 되지 않을까?』

쎄르게이는 아무튼 잘 생각해 보고 결심하라고 하며 오늘은 모스크바 구경이나 하고 저녁에 다시 토론하자는 것이다.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크레믈린으로 갔다. 크레믈린 앞거리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파편에 맞은 듯 창유리가 깨지고 타이어가 터지고 충돌하여 찌그러진 승용차들과 대형 짐차들 이 거리에 꽉 차있고 바리케이트를 쌓았던 자리들로 하여 엉망진창이다. 나는 쎄르게이에게 여기가 왜 이렇게 지저분한가고 묻자 여기가 바로 지난 8월 쿠데타가 일어났던 자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새로운 기분으로 그 자리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리고 혼자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때 공산당 집권자들이 승리하였다면 세계 정세가 어떻게 변했을까?) 크레믈린을 다 돌아 본 다음 우리는 레닌사적관, 백화점까지 다 돌아보고 여관으로 돌아 왔다.

다음날 아침 나는 헝가리로 가려고 모스크바의 키예브쓰카야 역으로 나왔다. 그때 우리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모스크바-부다페스트행 열차를 타고 키예브까지 가면서 국경 통과 질서를 알아보고 열차에 몸을 숨겨 가지고 국경을 통과할 수 있으면 열차원을 돈으로 매수한다. 다음은 국경까지 열차로 가고 국경을 넘을 때는 산을 외돌아 걸어서 넘으면 되는데 나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걸어서 국경을 넘는 것은 자신이 있었지만 넘어선 다음이 문제였다. 국경에서 부다페스트까지 가자면 헝가리 돈이나 달러가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4,000루블 밖에 없었다. 쎄르게이가 나에게서 받은 100달러도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해결 방도가 서지 않았다.
무작정 열차에 올라탄 우리는 열차원을 만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탄 방통은 헝가리로 넘어가지 않고 앞으로부터 3방통 만이 헝가리로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쎄르게이가 자기 혼자서 헝가리행 방통에 가보겠다며 나갔다가 한참 후에 돌아와서 안될 것 같다고 머리를 저었다. 열차원은 쎄르게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왜 증명서가 없는가고 오히려 따지려는 것이었다. 갈수록 태산이라고 일은 자꾸만 꼬이기만 했다.
어쩌면 좋은가. 어디로 갈까. 헝가리 국경을 넘다가 잡히면 끝이야. 그렇다고 타슈켄트나 알마타아에 가면 누가 여권도 없는 사람을 믿고 도와주겠는가. 생각할수록 기막힌 노릇이었다.
되든 안되든, 죽든 살든 타슈켄트나 알마타아 밖에 더 갈데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다음날 아침 키에브에서 내려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나는 타슈켄트에 가 보기로 결심하고 열차 시간을 알아보니 다음날 아침 7시에 열차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표를 사고 역에서 자기로 했다.


쎄르게이의 우정


역에서 기다리노라니 또다시 머리가 복잡했다. 이젠 날짜도 퍽 지났음으로 쎄르게이는 빨리 돌아가야 했고, 나는 혼자서 행동해야 했다. 쎄르게이는 내 앞길을 두고 자꾸 걱정하면서 뭐든지 하나라도 더 주려고 애를 썼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 없어. 괜찮아. 젊은놈이 아무렴 제구실을 못할까. 내 이제 타슈켄트에 가서 기어이 성공하고야 말겠어.』
『꼭 성공하라구. 그리고 조심해야 해. 자네 잡히기만 하면 끝이야. 타슈켄트에 갔다가 정 바쁜 일이 생기면 나에게 전보를 보내라고.』

그는 주소를 적어주고 아침이면 헤어지겠는데 다시 못 만날지 모르니 헤어지기 전에 술이나 한 잔 같이 하자면 카페로 이끌었다. 그런데 밤 12시경에 김일성의 초상 휘장을 단 사람 몇 명이 카페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극도로 긴장하여 눈짓으로 쎄르게이더러 밖으로 나가자고 하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한참 후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그들도 역시 대합실에서 밤을 새울 작정인지 오래도록 앉아서 음식을 먹으며 일어설 줄 몰랐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생각할수록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제 사람들을 무서워 피해다니며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밤을 새우자니 한심하기만 했다.

작 별

김일성. 김일성이라는 존재가 도대체 뭐길래 사람들을 이렇게 만드는지 저절로 화가 치밀어 올라 쎄르게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이제 김일성이 죽으면 돈을 주어서라도 한달 동안 잔치를 차리겠네.』
쎄르게이는 웃으며 그때 자기도 잊지말고 꼭 청해 달라고 하면서 북조선 사람들은 왜 김일성 김정일을 그냥 놔두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북조선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를 정치사상적으로 목숨으로 옹호, 보위하자는 술어가 하나의 대명사처럼 사용되는데 이따금 방송에서 방송원이 그 구호를 목청껏 외치면 영리한 강아지들까지 덩달아 꼬리를 흔들며 같이 곡조를 맞추어 짖어댄다고 말했다.
쎄르게이는 좋다고 웃어대면서 자기가 총으로 그들을 쏘아 죽이면 훈장을 주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에게 훈장뿐 아니라 김일성 대신 북조선의 대통령 자리에 앉혀 주겠다고 말하자 그는 당장 가겠다고 덤벼서 또 다시 웃어댔다.

그러노라니 어느덧 차시간이 되어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뱃심을 든든히 가지라고, 맥을 놓으면 안 돼. 그리고 돈이 떨어지면 굶지말고 어디서 도적질해서라도 먹어야해. 나는 며칠 안되었지만 자네 배짱이 마음에 들어. 우리 꼭 다시 만나자구.』
그리고는 러시아식대로 굳게 포옹하고 살뜰히 입을 맞추어 주는 것이었다.
『고맙네. 돌아가기 전에 자네 장모와 처에게 일이 모두 잘 되었다고 말하라구. 여자들이 걱정하면 일이 잘 안되는 법이야.』
나는 돌아서 열차로 돌아갔다.
밖에서 쎄르게이가 주먹을 쳐들어 보인다. 나 역시… 건투를… 하고 주먹을 쳐들었다.
기적소리 울린다.
열차는 출발하였다. 마치도 새로운 운명의 길을 걷기 시작한 나의 첫 출발을 알리는 듯 기적소리는 가슴속에 긴 여운을 남기고 사라질 줄 몰랐다.

사랑하는 어머니
집 떠난 이 아들 걱정으로
사립문 가에서 울지 마시고 마음 좋게 가지세요.
오늘은 내 비록 그대들의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실었어도
내일은 그 집에 날개가 돋혀
아늑한 꽃밭으로 그대들을 싣고 가리.

그대들이여.
들어 보시라.
세계는 민주의 함성 요란타.
대지는 민주의 아침 노을 불탄다.
기다려다오.
조금만 참아다오.
나도 그 영광의 대오, 민주의 함성과 함께…

사랑하는 아들 청석아.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너의 어린 가슴에
불행과 고통을 안겨주는 한이 있어도
정의로운 그 영광의 대오.
민주의 함성과 더불어 나는 영생하리!

타슈켄트의 고려인들

모스크바를 떠난지 3일만에 타슈켄트에 도착하였다. 날씨는 무덥고 공기는 건조한 느낌이 들었고, 사람들 역시 모두 조선사람 비슷하게 생겨서 누가 조선인이고 누가 우즈베크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먼저 시장으로 찾아갔다. 아무데 가나 조선인 교포들은 김치장사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꾸일육이라고 한 농민시장에 찾아가니 정말로 많은 조선인 교포할머니들이 조선말로 주고받으며 김치를 팔고 있었다.
나는 반가운 김에 조선말로 인사를 하고 김치를 하나 사들고 이것저것 물었다. 나이는 60세 이상인 듯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말씨가 다른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어데서 왔는가고 물었다. 내가 북조선에서 왔다고 하자 할머니는 반가와 하면서 무슨 일로 왔는가고 물었다.
나는 좀 볼일이 있어서 왔다며
『처음 오다보니 잠자리도 불편하고 뭘 좀 알아보자고 해도 힘들군요. 할머니 혹시 집에 자리가 좀 있으면 이틀만 묵어 갈 수 없습니까?』
하고 묻자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좀 있으면 영감이 오는데 한 번 말해 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저기 시장을 돌아보고 다시 찾아갔는데 할머니는 사정이 있어 그렇게 못하겠다며 딱 잡아떼는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옆에서 김치장사를 하던 교포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꼴이 좋지 못한 생각이 떠올랐다. 왜 이럴까… 나는 모욕을 당한 듯 너무도 부끄러워 대충 인사를 하고 급히 자리를 떴다.

내가 시장을 막 나서려는데 교포 한 사람이 나를 붙들고 좀 도와달라고 러시아어 절반 조선말 절반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그는 한 손에 쌀자루를 쥐고 한 손에 남새를 비롯한 부식물을 들었는데 쌀자루를 좀 메달라는 것이다.
얼결에 나는 그를 보고
『어디까지 가는지 제가 들어다 들이지요.』
라고 말하자 그는 말씨가 다른 나를 빤히 쳐다보며 어데서 왔는가고 물었다. 나는 또다시 모욕당할까봐 잠시 망설이다 북조선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미안해하며
『이거 참 안됐소. 나는 여기서 사는 고려 사람인줄 알고….』
하면서 우물쭈물 하는 것이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여기서 사는 고려 사람이나 조선에서 사는 고려 사람이나 다 같지요. 사양말고 제가 메다 드리지요.』
하고는 쌀자루를 냉큼 둘러메고 어디로 가는지 가자고 하였다. 버스 정류소에 나오자 그는 이제 버스를 타면 된다며 담배 한 대 권하는 것이다.
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그가 무슨 일로 왔는가고 물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이 나갔다.
『장사를 좀 할까 왔는데 말도 잘 통하지 않지, 잠자리도 온전치 못하지. 그래서 이렇게 다니며 거처할만한 곳을 찾던 중입니다.』
그러자 그는 지금 여관들도 시원치 못하고 특히 조선 사람들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힘들거라고 하며 누추하지만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는데 처와는 이혼하고 15살짜리 어린 딸을 데리고 살았는데 여름에는 우크라이나에 가서 수박, 참외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집에서 화투놀이나 하면서 산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분명 나를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보다도 장사를 한다는 말을 듣고 나의 돈주머니를 바라보고 데려왔다고 생각했다.

당시 타슈켄트 역시 소련의 다른 도시들처럼 중국 교포상인들이 장사로 많이 쓸러 들었는데 그는 중국상인들을 집에서 재우고 그들에게 돈을 받아먹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중국 사람들이 돈이 많다느니, 어느 때 누구는 돈을 얼마 주고 월 선불하였다느니 하면서 한참 엮어댔다.
나는 아무래도 그에게 불행한 나의 신세를 솔직히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저녁 식사 후 말하려고 했으나 돈을 기대하고 있는 그 에게 차마 말할 수 없어 그냥 잠들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난 나는 그에게 타슈켄트에 오게된 사연을 이야기하고 어디서 일할 만한 곳이 없는가고 물었다. 북조선에서 도주했다는 말을 들은 그는 대번에 태도가 달라졌다. 그는 여기서는 위험하기 때문에 살 수 없다느니, 북조선에서 도망친 사람들은 모두 북조선에서 체포해 갔다느니 하면서 빨리 딴 곳으로 자리를 옮기라는 것이다. 나는 도랑물처럼 얕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하룻밤 자고난 숙박비를 물고 일어서면서 물었다.
『여기 조선인 꼴호즈(집단농장)들이 많다는데 주소를 좀 알려 주실 수 없습니까?』
그는 꼴호즈 이름들을 적어주었다. 김병하 꼴호즈(협동조합), 레니쓰까야 꼴호즈, 빨리따지역 꼴호즈, 우즈베쓰꺄야 꼴호즈 등 6개의 꼴호즈 이름들을 적었다.

꼴호즈 순례

나는 먼저 김병하 꼴호즈를 찾아갔다.
꼴호즈에 들어선 나는 처음 한동안 어리둥절하였다. 북한의 농촌처럼 어지럽고 그야말로 촌 냄새가 확 풍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을의 소도로와 집마당까지 모두 시멘트로 포장하고 집집마다 앞마당에는 포도 넝쿨이 우거지고 매 가정마다 큰 단층 주택들이다. 북한의 농촌 전경과는 대비할 바 없이 부유한 살림이라는 생각이 들어 저절로 어깨가 처지는 것 같았다.
꼴호즈 사무실이라고 생각되는 큰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집은 사무실이 아니라 꼴호즈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여관이었다. 내가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등뒤에서 어디로 들어가느냐고 묻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조선인 젊은 여인이 행주치마를 두른 채 올롱하게 쳐다보며 어디서 온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인사하고 회장이 조선 사람이냐고 물었다.
여인은 회장은 우즈베크인이고 부회장이 조선 사람인데 부회장이 지금 남조선에 가고 없다며 어디서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북조선에서 왔다고 대답하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일을 할까하고 찾아 왔는데 받아주겠는지… 회장이 조선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러자 여인은 희죽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순간 당황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고 물었다.
『우리 꼴호즈에 북조선에서 온 사람 두 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잡혀가고 한 명은 어디로 피신했는데 지금 어디서 사는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도 처음에 일자리를 찾았지요.』
그 말을 들으니 저절로 한숨이 나갔다.
(후- 이렇게 개값도 안되는 김일성을 위대한 인간으로 칭송해 온 내가 어리석지. 이제 어디가서 어떻게 산단 말인가. 실로 그는 위대한 인물이야. 우리가 못사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데 가서나 살 수 없게도 하는 특출한 축지법을 쓰는 것 같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녀가 또 물었다.
『앞에 달고 다니는 초상휘장을 어떻게 했어요. 도망치면서 버렸어요.』
나는 입이 쓰거워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대충 대답했다.
『뜯어서 개를 주었는데 흠, 흠 냄새를 맡더니 버리고 그냥 가더군요. 그럼 나는 가보겠어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는 기어코 식사를 하고 가라는 것이었다. 식사로는 국수를 들여왔다.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여인은 이것 저것 꼬치꼬치 물었다.
북조선에는 먹을 게 없다던데 사실인가. 고기를 먹어보기 힘들다던데 정말인가. 등 등.

다음 나는 우즈베쓰까야 꼴호즈로 찾아갔는데 역시 아무러한 성과도 없이 돌아섰다. 하루 종일 이렇게 헤매다노니 날이 저물었다. 이젠 또 잠자리가 걱정이다. 어디 가서 잘까. 갈 데가 없어 할 수 없이 역 대합실로 찾아갔다. 그런데 역 대합실은 안전한 곳이 못 되었다. 경찰들이 계속 순찰하면서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증명서 검열도 하고 데려가기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밖에서 왔다 갔다 하며 서성거리다 비디오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거기가 제격이었다. 경찰들의 감시도 피할 수 있고 돈만 내면 밤새껏 구경하면서 새벽 5시까지 앉아있었다. 나는 위생실에서 세수를 하고 차 한잔 마신 다음 또 살길을 찾아 떠났다.

이번에는 빨리따 지역 꼴호즈를 찾아갔다. 사무실에 가보니 회장도, 부회장도 없었다. 오전 한결을 기다렸으나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 4시경에야 부회장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인사를 하고 북조선에서 왔다고 하자 그는 공식인다운 태도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참 반갑습니다. 앉으십시오. 작년에 북조선의 초청을 받고 평양을 방문하였는데 대접도 잘 받고 구경도 잘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솔직하게 말했다.
『부회장동지. 저는 북조선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여기 저기 다니며 알아보니 이 꼴호즈에 조선인들이 많고 사는 것도 괜찮다고 하여 왔는데 좀 도와주실 수 없습니까. 저에게는 지금 아무러한 증명서도 없는데 조선인들이 사는 곳이면 꽤 의지하여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찾아왔습니다.』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될 것 같습니다. 우리 꼴호즈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북조선에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여기 경찰들이 허용하지 않습니다. 숨어가면서 일할 수 있겠지만 그러다 잡히면 북조선과의 관계상 문제도 있고 하여 구원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는 어느 정도 진실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부회장동지 잘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가지 물어볼 것 이 있는데 여기 다른 꼴호즈들도 다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레니쓰게야 꼴호즈가 있는데 거기에 한 번 가 보십시오. 회장이 조선 사람인데 이런 일에 경험도 있고, 또 무슨 방법도 알 수 있을 겁니다. 마침 나도 그 방향으로 갈 일이 있는데 함께 갑시다.』
나는 그의 차를 타고 레닌쓰게야 꼴호즈로 찾아갔다. 부회장은 나에게 방향을 가르쳐주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사무실로 막 들어서려는데 한 사람이 마주 나오기에 회장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고 물었다. 마침 그는 자기가 회장이라 고 하면서 무슨 일인가고 물었다. 찾아온 사연을 대충 이야기하는 데 그는 내 말을 다 듣지 않고도 알만하니 여기서 서성거리지 말고 딴 데로 가라는 것이었다. 내가 좀 불쾌한 기색을 짓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우리 꼴호즈에 북한 내무원들이 와 있소. 얼마 전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여기로 와서 일했는데, 북조선에서 알고 찾으려 왔는데 다행히 그는 딴 곳으로 피신했소.』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고 빨리따 지역 부회장의 소행이 괘씸했다. 그는 분명 이런 내용을 알고 나같은 사람의 처지를 보여주려고 나를 여기로 데려 온 것 같았다. 회장은 나에게 덤비지 말고 조심하라고 이르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 역시 더 있을 곳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돈도 물지 않는 나의 훌륭한 거처지 타슈켄트역으로 돌아왔다.

진눈깨비 속에서

이젠 어떻게 할까? 나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세어보니 1600루불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주머니 돈까지 떨어지면 정말 길가의 거지 신세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금새 온몸에 맥이 풀려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눈까풀이 저절로 스스로 내리감겼다.
바람이 분다.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닌 진눈깨비가 내린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이렇게 추운데 입지도 못하고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비틀거리며 방향없이 이리저리 가고 있다. 길가던 남녀 로시아인들이 『에이 더러워, 저리 비켜』 하며 막 밀친다. 나는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졌다. 차가 마주온다. 일어서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차는 나를 깔아뭉개듯이 그냥 달려온다. 10m 5m 삐-익 급제 동한다. 그런데 차는 서지 않고 그냥 나를 덮친다. 아-악 깨 보니 꿈이다.
온몸에 식은땀이 내뱉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어둠에 잠겼고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자유롭게 자기 행동을 한다. 허탈감으로 머리가 아팠다.
내가 왜 이럴까. 그렇지 오늘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 뭘 좀 먹고 머리를 식혀야 해.

카페로 들어간 나는 커피, 칼바스, 흘레브, 우유를 사서, 먹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다 먹었다. 카페에서 나오는데 꾀죄죄한 늙은이가 손을 내밀었다. 돈을 비는 것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래도 아직 너보다는 낫구나. 주머니를 뒤져보니 20전짜리 잔돈이 있어 그의 손에 쥐여주고 위생실에 들어가 찬물에 세수를 하니 정신이 좀 들었다.
그날도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어떻게 할까. 어디로 갈 까. 다시 돌아갈까. 아니야 죽으면 죽었지 돌아갈 수는 없어. 그럼 어떻게 할까. 옳지 나는 갑자기 좋은 수가 생겼다.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가서 중국 상인들을 사귀고 그들의 도움을 받자.
그러나 나는 다시 도리질했다. 하바로프스크는 위험해. 북조선의 원동개발의 기본 거주지인 하바로프스크는 온통 북조선 사람 천지다.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로 갈까. 나는 아무데건 가야 했다.

역 대합실로 들어가 소련 철도 약도를 쳐다보았다. 타슈켄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르쓰라는 도시가 눈에 떴다. 나는 무작정 아르쓰로 떠났다. 4시간만에 아르쓰에 도착한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조선인 교포들을 찾았으나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고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나는 조급해졌다.

어디로 가볼까. 어떻게 할까. 나는 또다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 보았다. 다행히 15살나 보이는 남자애가 한 집을 가리키며 김이라는 조선인이 산다는 것이다. 그집으로 다가간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난데없이 러시아 여인이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여인에게 김씨 집이냐고 묻자 자기 남편이 김씨인 데 그는 출장가고 없다는 것이다.
맥이 탁 풀렸다. 후- 겨우 찾은 김이 출장가다니. 그 집에서 나온 나는 땅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문득 북한에서 당 학습회나 강연회에서 당과 조국을 배반한 자들은 개보다도 못하며 참다운 삶과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배우던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정말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아니야. 아니야. 맥을 놓으면 안 돼. 맥을 놓으면 다시 일어설 수 없어. 나는 조국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한 참다운 길 남행길을 걷는 거야.
탈출하여 수기를 쓰고 있는 오늘까지 남행길은 내 마음 속의 기둥이었다. 조국으로 가는 길, 남행길이라는 하나의 의지가 없었다면 나는 시련을 이겨내지 못했으리라. 그 후 나는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왔다.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오는 길은 10여일이나 걸렸다. 물론 그 기간 아슬아슬한 위험의 고비를 몇 차례 겪었다.


다시 하바로프스크로

아닌 밤중에 나는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하여 혼자 살고 있는 쎄르게이 가시어머니 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아니 이게 누군가. 어떻게 이렇게....." 남조선으로 가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어디가서 굶 어 죽지나 않았는지 계속 걱정하였는데 이렇게 왔구만. 빨리 들어오라구. 그래 어디서 이렇게 오는 길인가. 어이구 세상에 쯔쯔....."
할머니는 놀랍고 반가운 김에 옷을 빌려주고 밥을 끓이고 야단이었다. 할머니가 나를 이렇게 반겨 주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한달 정도 방황하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쳐버린 나는 할머니의 정성에 가슴 짜릿한 사랑을 느끼며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어떻게 된 일인가. 여기 하바로프스크는 온통 북조선 사람들 천지인데 어쩌자고 여기로 돌아왔나."
결심하고 떠났던 길을 되돌아 온 것이 부끄러웠다.
"할머니 오랫동안 열차를 타고 왔더니 피곤하군요. 좀 자고 일어나서 얘기하지요."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아침이었다. 할머니가 나를 급히 흔들어 깨웠다. 나는 얼결에 자리를 차고 후다닥 일어났다.
"이 사람아, 누가 찾아왔어. 빨리 일어나라구."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누가 왔어요."
"그걸 어떻게 알겠나. 혹시 북조선 사람들이 우리집에 자주 다녔는데 그들이 아닌지. 오, 빨리 이 밑으로 들어가라구."
할머니는 황급히 식료품을 넣어두는 지하실 문을 열었다. 나는 미처 옷도 입지 못하고 사다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희미한 전등불이 비치는 지하실은 숨이 헉 막히도록 곰팡내가 풍기고 바닥에 물이 차있고 어느 한 구석에선가 벌레가 살아있는 듯, 쥐가 다니는 듯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온 몸이 써늘해지는 것 같아 움크리고 사다리 층계에 앉아서 온 신경을 집중하여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이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를 들어보니 여러 명이 온 것 같았다.
무슨 말을 주고받는 듯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더니 성난 듯한 할머니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분명 나를 잡으러 왔구나. 혹시 역에서부터 나를 미행하지 않았을까.) 머리카락이 곤두섰다.(어떻게 할까. 여기서는 빠져나갈 길도 없는데.) 금방 지하실 문을 열고 뒷덜미를 잡을 것 같아 맨 발로 바닥에 내려섰다. 물이 발목까지 잠겼다.
지하실 맨 끝까지 가보니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나는 아무 준비도 없이 맥을 놓고 잠잔 것이 얼마나 후회되었는지 모른다. 주위를 두루 살펴보니 호미자루가 눈에 띄었다. 반항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호미자루를 잡았다.

이때 지하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아, 빨리 나오라구."
(아 더러운 늙은 마귀. 제 입으로 나오라구 소리치다니.)
늙은이한테 얼리었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원통하고 분하여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아뜯었다. 또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 사람아, 뭘 하나. 빨리 나오라구. 이젠 됐어, 다 돌아갔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돌아가다니.....)
`아니 이 사람이 거긴 왜 들어갔나. 맨발로 거기가 어디라고..., 빨리나와 발을 씻으라 구."
나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호미자루를 틀어쥐고 문 어귀로 나갔다.
"할머니 누가왔어요."
"우리 손자 녀석이 제 동무들을 데리고 왔댔어. 나는 너무 놀라서 그 녀석을 막 욕해서 쫓아버렸네."
그 말을 듣자 호미자루가 맥없이 떨어졌다.
첨벙. 물방울이 튀면서 다리를 적셨다. 그제서야 나는 쥐와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차디찬 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등골이 오싹 해졌다.
지하실에서 나와 발을 씻고 있는데 할머니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오늘은 맥이 풀려 아무 일도 할 것 같지 않아. 다 준비해 놓았으니 제 손으로 식사하라 구."
그리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 역시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 이 생각, 저 생각하는데 할머니가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 모서리에 앉아 하염없이 나를 내려다 보았다.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가랑가랑 고여 있다. 고향의 어머니 생각이 났다.
"자네 말하지 않아도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알만하네. 자네 어머니가 알면 속이 타서 아마 죽을 거야."
내 손등으로 할머니의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오래간만에 고향의 따스한 어머니 품에 안긴 것 같아 격해지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할머니 나는 할 수 없이 여기로 돌아오면서도 할머니가 저를 반가워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였는데 ....., 정말 고마워요."
"이 사람아, 날씨도 추워졌지. 자네 옷도 변변히 입지 못했지. 그러니 딴 생각말고 겨울이 지날 때까지 우리집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구. 나도 늙은 게 혼자 살다보니 자네에게 겨울 솜옷 한 벌 사줄 형편이 못되네."
"고마와요. 그런데 할머니 남조선에는 누가 있습니까."
"수원군에 윤정순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있네."

할머니의 지난날

할머니는 자기의 피눈물나는 과거사를 들려주었다. 수원군에서 한 가정의 3형제 중 맏딸로 태어났다. 해방 전 몹시 빈곤하게 살던 할머니의 가정에서는 기둥같이 믿고 살던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 혼자 세 자식을 먹여 살리기 너무 힘들어 11살 난 할머니를 북쪽에 있는 먼 친척에게 주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생이별하고 모진 고역살이를 겪다가 나이도 채 들기 전에 남편을 만났고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다시 이민했다. 중국으로 건너온 후 아들, 딸 두 자식이 생겼는데 남편은 가족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그후 할머니는 어린 두 자식을 데리고 또다시 소련의 원동 땅으로 흘러 들어왔다. 지금 남조선에는 여동생 하나가 있고 남동생은 사망하였다며 한번 만나 보지도 못한 남동생 일이 제일 가슴 아프다는 것이다.
"자네 남조선으로 갈 생각은 참 잘했네. 한국방송공사에서 나에게 동생을 찾아주고 나 같은 게 뭐라고 설 명절에는 신년장까지 보내주곤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늙은 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뭔가 좀 보답할 생각도 있는데 궁리가 떠오르질 않네. 글도 변변히 쓰지 못하니 인사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지."

나는 할머니가 얼마나 기구한 운명을 살아왔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할머니 내 이제 기어이 남조선으로 가겠어요. 남조선에 가면 할머니의 동생도 만나보고, 팔뚝에 힘이 뻗치고 심장에 피가 한동이씩 끓는 젊은놈이 가자구나 하면 못 할 일이 있어요. 그런데 할머니 여기 시장에 중국 장사꾼들이 많던데 그들을 좀 소개해 줄 수 없어요? 좋은 사람 한 두 명 친해가지고 그들을 통해서 중국을 거쳐 남조선으로 가던가. 아니면 다른 한가지 길은 몽골로 가던가. 라디오를 들으니 몽골 대통령이 한국도 방문하고 한국에서는 몽골에 원조를 주었다는데 몽골을 통해서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할머니는 아직 젊어서 철없이 덤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글세 중국에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 갈 수 있다 치고 몽골에는 어떻게 가겠나. 말도 모르지. 아는 사람도 없지. 괜히 덤비지 말고 잘 생각해 보라구" 하고는 나가서 차를 마시자고 하며 일어섰다.
차를 마시며 할머니의 기색을 살펴보니 모진 고생의 흔적인 듯 주름살이 많은 얼굴에 나에 대한 걱정으로 더 늙어 보이는 것 같았다.
"할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힘든대로 시장에 나가 중국사람들을 좀 데려 오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숨어있어 가지고는 아무 일도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들과 사귀고 친교도 맺고 도움도 받고 도와줄 일이 있으면 도와도 주고 그러노라면 무슨 방도가 서겠지요."
할머니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여기로 사람을 데려오자니 어쩐지 속이 떨리네. 나는 지금 앉아 있는 것만도 힘들어. 금시 누가 올 것 같은 게...."

바로 이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제기랄 범이 제 소리를 하면 온다더니.) 나는 황급히 지하실로 뛰어 들어갔다.
한참 후 할머니가 지하실 문을 열고 옆집 러시아 영감이 가스통을 빌리러 왔다갔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머리가 아픈 듯 한참 손으로 싸쥐고 있었다.
"좋아. 내 먼저 몽골 사람들을 만나 보겠어."

남조선 상품

할머니는 나에게 잠이 오지 않으면 노래나 들으라고 녹음기와 테이프를 가져다 주고는 부엌 에서 설거지를 하였다.
녹음기는 휴대용으로 작은 것인데 참으로 맵시있게 만들어 졌다. 나는 대뜸 아는 체를 했다.
"일본제로군요. 그 쪽발이들이 뭘 만드는 걸 보면 깜찍한 것들이야."
그러자 할머니는 웃으며
"그건 남조선 녹음기야."
상표를 보니 정말 남조선 상품이었다. 남조선 경제가 발전했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이렇게 질 좋은 녹음기는 처음 본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 만져보고 테이프를 끼우고 녹음을 틀었다.
노래들은 대체로 얼음이 녹아내리는 듯, 가슴을 간지럽히는 유행가들이다. 저절로 흥이 난 나는 침대에 누워 콧노래로 따라 불렀다.
노래들 중에서도 "아름다운 서울, 서울에서 살렵니다."라는 노래가 제일 듣기 좋았다. 가 사도 곡도 좋지만 낭만에 넘쳐 활달하게 부르는 가수 또한 명가수였다. 노래를 듣노라니 지나간 일들이 영화 화면처럼 떠올랐다.

1990년 아른 봄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소연방의 개방, 개혁 정치에 따라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을 둘러싸고 있던 철의 장막은 물거품 마냥 녹아 내리기 시작했고 마약과도 같은 자유세계의 진한 향기는 공산독재하에서 자유바람에 굶주린 자들의 폐부를 간지럽히면서 들뜨게도 만들고 두려움에 망설이게도 하였다.
정세변화에 맞추어 날쌘 한국 기업체들은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기들의 상품을 굶주린 러시아인들에게 들이밀었다. 한편 북한의 독재자들은 때가 늦었다. 아마 김일성이 몸이 너무 비대하여 동작이 굼뜬 모양이다. 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가 망하는 것과 우리 노동자들이 한국에 대해 환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에 많이 퍼져있는 우리 노동자들은 이제 한국의 강대함과 발전정도를 알게 되었다. 그 어떤 선전보도 수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 시작했다.
때늦게 정신을 차린 김일성은 엉기적거리며 호령을 내렸다. 그의 비대한 체격에 맞게 목소리 또한 호랑이의 울음소리와도 같아 즉시로 그의 어용나팔수들은 우리 재러 임업노동자들에게 더러운 남조선 괴뢰들의 상품에 손을 대지 못하게 대대적인 선전을 벌였다.
하루는 나는 상품을 구입할 목적으로 신우프갈로 갔다. 어느 한 식료품 상점에 들어가 보니 놀랍게도 비누가 많았다.


남조선 비누 소동

하루는 나는 상품을 구입할 목적으로 신우르갈로 갔다. 어느 한 식료품 상점에 들어가보니 난데없이 비누가 많았다.
나는 얼른 비누 한 지함을 샀다. 당시 러시아에 상품이 고갈되면서 우리 사람들에게 상품을 제대로 팔지 않았으므로 러시아인에게 돈을 더 주고 샀다.
나는 조국에 있을 때 비누가 없어서 어머니가 양잿물에 정어리기름을 섞어서 쓰던 생각을 하니 마음이 흐뭇하여 발걸음도 가벼이 버스(북조선 벌목장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가 부러워하며 소련 상품 같지 않은데 어느 나라 상품인가고 물었다.
얼결에 상표를 본 나는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흠칫 놀랐다. 다시 쳐다보니 분명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써 있다.
나는 급히 상표를 감추느라고 하였지만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드는 통에 할 수 없이 내보였다.
"아니, 이거. 남조선 상품인 것 같아."
그러자 사람들은 저마다 쳐다보며 한마디씩 했다.
"여, 큰일나기 전에 도로 갔다 물리는게 좋아."

며칠 전 토요 강연회에서 선전비서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의 주체조선. 영웅조선의 노동 계급들이 더러운 남조선 괴뢰들의 상품에 손을 대는 것을 씻을 수 없는 수치스런 행동이다. 러시아에 남조선 괴뢰들의 상품이 나들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자들과 남조선 괴뢰들의 반사회적 모략 선전이다.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은 현정세의 요구에 맞게 혁명적 경각심을 높이고 오직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두리에 철통같이 뭉쳐 원쑤들의 온갖 파괴 암해책동을 단호히 짓부수고 사회주의 완전 승리를 이룩하겠다는 굳은 각오와 신념을 가져야만 한다."
버스에는 한 두 명도 아니고 상버소 간부들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피할 길이 없었다. 이때 앞쪽에서 특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동무는 어디서 왔어. 상표나 보고 살 노릇이지 그게 뭐야. 내다 버리라. 비누와 정치적 생명을 바꾸겠어!"
그렇다. 정치적 생명과 바꿀 수 없다. 북조선에서는 정치적 생명을 잃은 사람은 개와 같은 신세이다.
나는 지함을 들고 밖에 나가 길바닥에 둘러메쳤다.
비누에도 사상이 있다는 김일성의 전사답게… 그리고는 운전수보고 깔아뭉개라고 소리쳤다.
운전수는 깔아뭉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비누는 형체도 없이 납작하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이 거지같은 북조선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누를 만든 남조선의 노동자들이여!
용서하시라.
그러나 용서하지 마시라!
당신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노동의 열매를
깔아뭉개라고 호령하는 독재자들을.

나는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혼자서 웃었다.
"아니, 자네 뭐가 좋아서 혼자 웃나?"
"할머니 노래들이 재미있군요. 난생 처음으로 재미있는 노래를 듣는 데요."
"응, 노래들이 모두 좋은 것들이야. 나는 혼자서 적적할 때마다 듣곤 하는데 마음이 좋아지곤 하지. 그런데 북조선에는 그런 노래들이 없는 것 같아."
"허 참, 할머니 북조선에서는 이런 유행가들은 들을 수도 부를 수도 옶어요. 들으면 붙잡아가고 부르면 체포해 가지요."
나는 노래를 하여 기분이 좋아져 할머니를 도와 장판도 씻고 집안도 깨끗이 거두었다.

다시 유랑의 길로

이런식으로 한 달이 지나갔다. 물론 매일 한두 번씩은 지하실로 뛰어 들어가야만 했다. 할머니는 시장에 몇 번 나갔다가 중국 상인도, 몽골인도 찾지 못하고 돌아오곤 하였다.
할머니는 차츰 앓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심장을 놀래우며 곰팡내나는 지하실로 뛰어 들어가고 어느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살다보니 젊은 나까지도 신경 환자가 될 지경인데 늙고 연약한 할머니야 오죽했으랴.
죽기보다 더 고통스런 일이었다.
더욱이 힘든 노릇은 할머니의 딸 따찌아냐가 알고 하루 건너씩 찾아 와서는 할머니를 욕하는 것이었다.
나는 더는 참기가 어려웠다. (떠나자. 아무데건, 무조건 떠나야 해.) 이렇게 생각한 나는 밤에 할머니를 데리고 몽골 사람들이 사는 기 숙사로 찾아갔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 저마다 도리질을 했다.

몽골과 러시아 국경 지대는 시베리아 내륙지대로서 날씨가 대단히 춥고 그 지대는 험한 수림 지대인데 사나운 짐승들이 많아서 대단히 위험하다며 그 길은 죽음의 길이라고 모두가 한마디씩 했다.
그래도 나는 기어이 떠나리라 결심하고 집에 돌아와 고생살이 속에 쌓이고 쌓인 할머니의 헌 누더기를 뒤져서 솜옷 한 벌과 겨울용 신발을 하나 찾았다. 너무 더러워서 손대기가 끔찍한 누더기였으나 나는 깨끗이 빨고, 깁고, 수리하였다.
할머니는 나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때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고 심정은 어떠했으랴.
"이 사람아, 며칠만 더 참아보라구. 내 중국 사람들을 한 번 찾아보고 그들과 한 번 토론해 보고 안될 것 같으면 떠나라구."
다음날 할머니는 중국 조선인 교포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이름은 김경식. 나이는 44살. 중국의 계서시에서 왔다고 한다. 나는 그와 통성(명)하고 저녁에 마주앉아 술 한잔 같이 하면서 나의 기구한 운명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중국으로 갈 수 없겠는가 물었다. "은,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자. 국경을 걸어 넘던가 아니면 남의 여권을 빌려가지고 건너가서 다시 들여보내도 될 수 있지. 여기 내가 잘 아는 중국 사람들이 많아."
그리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거, 북조선에서는 김두부 때문에 잘 못 살아. 북조선 사람들이 불쌍해. 북조선에서는 감두부를 왜 그냥 놔두는지 이해할 수 없어."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김두부라는 사람이 누군가고 물었다.
"김일성이 자기 생일날 사람들에게 두부 한모씩 선물하지 않나. 그래서 우리 중국에서 사는 교포들은 김일성을 김두부라고 부른다네." 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사탕과자는 선물로 받았으나 두부는 선물로 받은 일이 없었다. 내가 그런 일이 없다고 하자 그는 왜 없는가고 하며 오히려 자기가 북조선 사람인 것처럼 나더러 북조선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그와 통성하고 중국으로 가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때 그의 가시어머니가 타슈켄트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먼저 타슈켄트에 가서 그의 장모를 데리고 하바로프스크에 다시 왔다가 중국 국경을 넘기로 했다.
그는 알고 보니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와 함께 1991. 11. 2일 열차를 타고 타슈켄트로 떠났다.
"조카(그는 나를 조카라고 불렀다), 이제부터 너는 철저히 중국 사람이야. 절대로 북조선에서 왔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해." 그 말이 옳았다. 북조선에서 왔다고 하면 아무데 가서나 발 붙이기가 매우 힘든 것이다. 제나라, 제땅, 자기의 조국을 두고 중국 사람이라고 해야 한다.
부끄러워서 나는 더는 북조선에서 왔다는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이게 바로 김일성 부자가 만들어 놓은 주체의 조국, 사화주의 모범의 나라이다.
북조선에서 그렇게 떠드는 김일성, 김정일의 위대성, 권위와 위신은 이게 전부이다.

마야와의 만남

하바로프스크에서 타슈켄트까지 7일간 가야 한다.
우리는 그때 열차에서 위딸리라는 조선인 교포를 만나 그와 동행하였다.
그는 성격이 온순하고 고지식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외국인이라고는 처음 상대하는 그는 우리를 좀 어려워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중국 교포 김경식은 푸접이 좋고 거짓말도 잘 했다.
4일째 되는 날 아침에 우리는 노보씨비리스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타슈켄트행 열차를 갈아타야 했는데 밤 11시에 타슈켄트행 열차가 있었다.
우리는 그 기간 시내 구경도 하고 소풍도 하면서 보내고 있었다.
김경식이 나더러 조용히 만나자고 하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조카, 내 위딸리하고 좀 의논하여 보았는데 네가 원한다면 너에게 처녀를 한 명 소개해 주겠데."
나는 놀랐다. 생각조차 하지 않던 문제다.
"아니, 삼촌. 그것도 말이라고 해요. 나한테 처가 있고, 아이까지 하나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럼 말을 해요?'
그는 내 생각이 답답한 듯 설복하기 시작했다.
"조카, 잘 생각해봐. 네가 도망쳤는데 북조선에 가서 네 처를 데려 올 수 없어. 천만에, 내가 너를 중국으로 데려가겠다는 것도 너를 데리고 가서 먼저 장가를 보내고, 결혼을 하고 그 다음에야 여권 수속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지는 거야. 여기서도 같애. 하루 이틀은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질 수 있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도와줄 사람이 없어. 그러나 장가만 들면 자기 가정을 가지게 되고, 도와줄 수 있는 믿음직한 반려자가 생기고, 할 일도 찾을 수 있을 거야. 네가 처를 그렇게 잊지 못하겠다면 무엇 때문에 도망쳤어. 친척도 아는 사람도 없는 너에게 누가 곱다고 여권을 만들어 주겠어. 네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장가를 드는 길이야. 네 처만이 너를 도와줄 수 있어. 잘 생각해봐."

그의 설복은 끝이 없었다.
나 역시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를 기둥같이 믿고 기다릴 처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사람이 그런 짓을 할 수 없어.
나는 처음으로 나에 대한 처의 사랑을 생각했다.
조국을 떠날 때 어린애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손저어 바래주던 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 나는 사람이 아니야. 짐승같은 놈이야. 그 불쌍한 여인이 이젠 어떻게 될까! 내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어느덧 열차는 카자흐스탄 공화국권내에 들어섰고 위딸리는 내릴 준비를 하였다. 그는 카자흐스탄의 잠불에서 내려야 했다. 우리는 서로 주소를 교환했고, 위딸리는 기다릴테니 손님으로 꼭 오라고 신신당부했다.

위딸리가 내리자 그는 집중적으로 설복하기 시작했다.
타슈켄트에 도착하여 우리는 그의 장모를 만났는데 그의 장모 또한 그런 식으로 설복했다. 놓친 기회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장모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중국에 가기만 하면야 집을 팔아서라도 너를 도와줄 수 있어. 그런데 네가 어떻게 국경을 넘어. 국경에서 잡히면 죽어. 죽는다는 것이 뭔지 알기나 해. 김일성이 너 같은 건 파리 잡듯 하는 사람이야." 그들의 말이 모두 옳았다. 친척도, 친구도 없는 나를 누가 도와주겠는가. 그렇다고 처가 살아 기다리는데 장가들 수도 없고… 처의 편지 구절이 생각났다.
"… 청석이 아버지. 빨리 귀국하세요. 들리는 말이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다 망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되었다면서요. 우리 나라에서는 자본주의사회 물을 먹은 사람들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알지 않아요. 자신과 청석이를 생각해서라도 빨리 나오세요. 그리고 청석이는 매일 아버지를 찾는답니다. 집에 찾아오는 사람마다 붙들고는(우리 아빠 소련에서 사탕이랑, 고자랑, 텔레비전이랑 사 가지고 곧 나온대)라고 자랑하며 매일 아버지한테 편지를 쓰라구 야단입니다…" 나의 고민은 끝이 없었다.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어떻게 할까'라는 말이 머리속에 꽉 들어찬 채 3일이 지나갔다. 그런데 3일이 지나간 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위딸리한테로 가야 한다는 그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91년 11월 15일 위딸리 집으로 찾아갔고 12월 10일 위딸리의 동생 리 마야와 살기로 약속하였다.

올가미에 걸려들어

당시 나에게는 안착된 생활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여권을 만들어 가지고 남조선으로 가야한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었던 것 같다.
1992년 2월 중순경이었다. 나는 여권을 발급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던 중 마야의 사촌 오빠 윅또르를 통하여 여권 발급 담당자 한 사람을 만났다. 내가 그에게 여권을 부탁하자 그는 자신있게 대답하였고 돈 1만 루블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며칠 후 2월 18일이다. 나는 윅또르의 집에서 그와 차를 마시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여권 수속 담당자한테서 온 전화인데 여권 수속을 하려고 하니 나를 데리고 오라는 전화였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어떻게 할까. 내가 혹시 올가미에 걸려든 건 아닌가. 그렇다고 부탁해 놓고 찾아가지 않으면 그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형세가 더 불리해질 수 있는 것이다.)

윅또르 역시 미덥지 않았던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윅또르, 내가 직접 경찰서로 찾아가는 것은 위험하기는 하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체포령을 내릴 수도 있고 감시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어찌보면 여권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쳐버릴 수도 있고 …"
나는 윅또르 차를 타고 경찰서로 찾아갔다.
여권 담당자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는 반가워하면서 신분 카드를 내주고 성명, 생년월일을 비롯한 간단한 경력을 쓰라고 하였다.
윅또르의 이름으로 여권을 발급하기로 한 나는 그의 경력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출입문이 열리며 사민복 차림의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여권 발급 담당자는 벌떡 일어서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순간적으로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찰 책임자는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으나 나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내 생각만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3년간 일하면서 도주하였던 사람들이 체포되어 가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하였는데 바로 이 순간 그 생각이 떠올랐고 내가 친구들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저렇게 잡혀갈 바에야 무엇 때문에 도주하는가. 바로 저런 것들을 보고 개죽음을 당했다고 말하는 거야. 멍텅구리 같은 것들…"
그런데 이젠 내가 그렇게 된 것 같다.

심문

심문은 오늘까지 3일째다.
경찰과는 매일 오전과 오후 두 번씩 불러내다 심문하였지만 나는 그의 심문에 전혀 귀기울이지 않았고 경찰관은 짜증을 내기 시작하였다.
"당신은 중국에서 왔다는데 중국 어디서 왔는가? 당신이 로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자 이걸 좀 보라구.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어딘지 한 번 짚어봐."
경찰관은 내 앞에 지도를 꺼내놓고 살고 있는 곳이 어딘지 한 번 짚어보라고 안타까이 말했다.
나는 지도를 보지도 않고 밀어버리고 로어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했다.
"마야, 마야. 이, 야."
하면서 손시늉으로 마야를 만나게 해당라고 흉내를 냈다. 경찰관은 성난 듯 나를 한참 쏘아보더니 소리쳤다.
"안 돼, 간수 이 사람을 가두라."

이때 출입문 밖에서 누군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당직 간수가 들어오더니 경찰관에게 윅또르와 마야가 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항의한다는 것이었다.
경찰관은 한참 생각하더니 심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지 들여보내라고 하였다.
체격이 좋고 성격이 과격한 윅또르는 밖에서 누구와 다투고 아직 성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들어서면서 경찰관에게 삿대질하며 대들었다.
"젠장, 왜 이 사람을 가두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마야가 가져온 음식

경찰관이 소리쳤다.
『네가 왜 모르는가. 이 사람은 불법으로 여권을 발급 받으려던 외국인이야. 아직 국적도 밝히지 않고 있어.』
그들이 한참 다투고 있는 사이 마야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26살인 그녀는 겉보기에는 19~20세 나이 어린 처녀 같았다.
어리면서도 당돌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는 그녀는 마치 자기가 잘못하여 일이 이렇게 된 것처럼 내 손을 꼭 잡고 미안해하며 말했다.
『그 더러운 감방에서 식사랑 어떻게 하고 있어요. 김영권. 경찰서 책임자가 말하는데 중국에서 신분을 확인하는 문건이 와야 내놓는다고 해요. 그런데 아직 자기 신분도 밝히지 않고 있으니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왜 자기 신분을 속이세요. 왜 북조선에서 왔다고 말을 못해요.』
『마야 그건 괜찮아.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지?』

나는 황급히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아니 돌로 빚어낸 사람처럼 괜찮다는게 무슨 말이예요. 어머니는 당신 때문에 식사도 못하고 잠도 못자고 있어요. 당신 대신 내가 말하겠어요. 북조선에서 왔다고….』
마야는 참으로 안타깝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한참 쳐다보았다.
『마야 심정은 알만한데 그건 말하면 안 돼. 며칠 후에 내가 스스로 얘기하겠어.』
『아니, 혹시 당신은 뭘 잘못하고 도망친 게 아니예요?』
『아니야, 내 신상엔 마야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있어.』
나는 마야에게로 온 다음 같이 살면서도 북한에서 도망쳤고 잡히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야는 북한의 독재정치를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마야는 안타까운 듯 내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전혀 이해할 수 없어요.』
『거기선 무슨 말을 하는가.』
윅또르와 다투느라고 우리에게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던 경찰관이 꽥 소리쳤다.
『우리가 무슨 죄인이라고 말도 못하겠는가.』
마야가 총알같이 내 쏘았다. 경찰관은 마야와 윅또르를 진정 시키고 의자에 앉힌 다음 마야에게 물었다.
『마야는 이 사람하고 살면서 어느 나라말로 통하오.』
『내가 조선말을 좀 알기 때문에 조선말로 통해요.』
『그럼 마야는 이 사람의 신분을 모를 수 없겠는데.』
『그래요. 신분을 몰라도 같이 살 수 있어요. 다만 중국에서 왔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좋아.』
경찰관은 간수를 불러 나를 감방으로 데려가라고 하였다. 마야가 발딱 일어서면서 소리쳤다.
『아니 죄인도 아닌 사람을 왜 가둬요? 나는 당신에게 아무말도 할 수 없어요.』
『마야, 진정하라고. 이건 법이기 때문에 나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이 사람을 하루라도 빨리 구하려면 신분을 확인하여야 해.』
그러자 마야는 황급히 음식꾸러미를 책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저 사람을 여기서 식사시키고 들여보내세요. 감방 안에서 저 사람은 식사를 제대로 못할 거예요.』
경찰관은 얼러서라도 나에 대한 문제를 빨리 마무리짓자고 생각했던지 나더러 식사를 하겠는가고 물었다. 나는 사양했다.

감방에 들어선 나는 딱딱한 철침대에 맥없이 드러누웠다. 길이 3m, 너비 2.5m 작은 감방에 네 명이 잘 수 있게 양옆으로 2층 침대를 설치한 감방인데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악취가 풍겼다. 특히 하수도 시설도 되어 있지 않고 한쪽 구석에 높이 50cm, 직경 25cm 정도의 소변통이 세워져 있는데 소변통을 열 때마다 얼마나 악취가 심했던지 눈이 쓰릴 정도였다.
나는 눈을 감고 이미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내 운명에 대해서는 더 신경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젠 죽는데는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죽는가. 북조선에 끌려가 일생을 정치범수용소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아니면 순간의 고통을 참고 자결해야 하는가 하는 두 길 중의 한길이 남았다.
오직 나의 생각은 나로 하여 고통을 겪어야 할 처와 어린 아들, 부모형제들에 대한 생각 뿐이다. 그리고 마야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하여 생각했다.



2001년 12월 5일 김영권(가명)

자료제공 : 북한인권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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