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감수(甘受)속에 열린 사랑의 열매들 - 김미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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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의 징검다리 「하나원」 수많은 북한이탈주민들이 대한민국 입국 후 사회에 첫 발을 내딛기 전까지 생활하는 곳, 하루도 조용한 날 없는 이곳 ‘하나원’은 나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다. 하나원에는 이곳 직원들과 전국 각지에서 초빙된 강사와 자원봉사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하나원은 같은 민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이탈주민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곳은 체제와 문화가 상이한 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우리는 한민족이자 함께 나가야 할 동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나의 일터 「하나원」 이 소중한 집에서 생활지도사로 일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4년째 접어든다. 보람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에 앞만 보고 뛰었지만 간간이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다지 순탄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비록 능력은 미천하지만 같은 동포라는 생각에 밤낮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우리 북한이탈주민들을 이 사회의 천덕꾸러기가 아닌 대한민국의 성숙한 시민으로 거듭 태어나 사랑 받을 수 있는 이웃으로 이끌고자 하는 욕심에 한시도 마음 편히 지낸 날이 없었다. 사실 난 꿈에도 내가 이렇게까지 중요한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내세울 것 없는 나를 인정해 준 대한민국 정부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험난한 입국과정에서 생긴 거칠어진 성품과 말못할 상처들만 안고 온 동료들에게 먼저 입국한 선배로서 후배들을 보듬어 주며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과 이탈주민의 상처를 체험해 보지 못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이탈주민을 이해시키는 남과 북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경험이 축적되면서 노하우가 쌓이고 그 과정에 나의 인생관도 차츰 변화하였다. 후배들에 대한 실망만큼이나 사랑도 커져갔고 나 자신도 많이 성장한 듯 하다. 생활지도 과정에 잊을 수 없었던 일들을 비롯한 지난 이야기 몇 가지 나누어 볼까한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나는 월 90만원의 월급을 받기로 하고 서울시내 한 모텔에서 첫 직장을 구하였다. 막연하게나마 청소만 하겠지 생각했지만 생각과는 달리 다양한 일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침대 시트를 갈아야하는 일은 나에게 생소했다. 침대 시트를 서툴게 갈고 있는 내 모습을 본 사장님은 “아니 그 나이에 시트도 제대로 못 갈아요. 이름 석자나 제대로 쓸 줄은 아세요”라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나에게 면박을 주더니만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날랜 손동작으로 침대시트를 반듯하게 갈아 끼우는 것이 아닌가. 무능한 탈북자라 깔보는 듯한 모멸감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꾹 참고 마음을 다 잡으며 “사장님, 저는 남한에 온지 얼마 안되어 부족하고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차근차근 가르쳐 주세요.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시간만 있으면 짬짬이 시트 가는 연습을 했다. 삼일만에 침대 시트를 갈아 끼우는데 성공했더니 사장님께서는 너무나 만족스러운 듯 “남한 사람보다 훨씬 낫네요. 눈썰미도 있고 성실히 일해주니 너무 고마워요. 북한 여자들 다 아줌마처럼 성실해요? 다음달부터 월급을 더 드릴 테니 열심히 일해주세요”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을 보는 순간 ‘내가 인내심을 갖고 참고 잘 견디었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고 했던가. 나의 열매는 인내심만큼이나 달콤했다. 일당 4만 5천원을 위하여 나는 일당 4만 5천원을 받기로 계약하고 70대 중반의 괴팍한 성품을 지닌 치매 노인을 간병하였다. 우선 할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 또한 무더운 여름철이라 자주 씻겨주고 옷도 깨끗하게 갈아 입혀야 했다. 그런데 워낙 괴팍한 할머니라 정성을 다해 간병을 해도 “이 가시나야 좀 살살 못 할꼬 등신 같은 가시나야”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 아닌가. 오죽하면 주위 사람들마저 “저 할머니 비위 맞출 사람 세상에 어데 있담. 아줌마 그 성격을 어떻게 견디겠다고 할 일 없어 그 일을 하세요? 벌써 아줌마가 다섯 사람 째구먼. 다른 간병인들도 이틀을 못 넘기고 나갔어요”라며 나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는 순간 이 괴팍한 할머니를 어떻게 간병해야 하나 막막했다. 하지만 옆에서 누가 뭐라 말해도 나는 꾹 참고 이겨내리라는 신념이 있었기에 할머니의 온갖 투정과 불평불만을 참아내며 정성을 다해 간병했다. 그렇게 괴팍하던 할머니도 퇴원하는 날 “북한 아줌마 그동안 수고 많았다. 니 내 딸 보다 낫다. 북한 여자들은 다 너같이 성실하고 이뻐? 정말 수고했다”라며 두손을 꼭 잡아 주었다. 할머니는 두툼한 돈 봉투를 내 손에 쥐어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 눈물이 앞을 가렸다. 무엇보다 “북한 여자들은 다 너같이 성실하고 이뻐?”라는 말 한마디가 왜 그리도 마음을 설레게 하였던지… 나는 지금도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당당하게 이 이야기를 교육생들에게 들려주곤 한다. 야, 네가 뭐야? 너도 같은 탈북잔데 2003년 겨울, 점호하던 중 김미영 교육생의 방순서가 되어 총무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만취가 되어 머리를 푹 숙이며 “선생님 안녕하심까? 저 한잔 했슴다”라고 말하며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한 모습을 보였다. 순간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김미영씨 하나원에서 술을 마시면 안된다는 사실 아시죠. 지금 무슨 행동이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네게 “야, 네가 뭐야? 너도 나와 같은 처지의 탈북자인데 탈북자 심정도 몰라 줘”라며 소리를 질렀다. 순간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그녀에게 할 말을 잃었다. 이미 만취가 된 상태라 같은 방의 동료들에게 “김미영씨가 많이 취했으니 우선 자리에 눕혀주세요”라고 말하고는 방을 나왔다. 점호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김미영씨는 대인관계도 좋고 지금까지 성실하게 생활한 사람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그래도 여자가 저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오늘 있었던 일은 다음 날 그녀를 만나 따끔한 충고와 함께 다독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이 채 지나지도 않아 또다시 술을 마신 그녀를 엄하게 나무란 탓인지 그녀는 말 한마디도 없이 하나원을 떠났다. 나의 마음을 몰라주는 교육생들에 대한 원망과 함께 실망감은 커져만 갔다. 인사 한마디도 없이 떠나버린 후 마음의 상처를 달래며 기억을 잊으려는 순간 그녀에게서 편지가 한 통 왔다. “선생님, 저에게 실망 많으셨죠. 저도 제 자신이 실망스럽습니다. 짧은 하나원 생활도 제대로 못해 술을 마시며 추태까지 보였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사회에 나오면 자유롭고 주머니에 돈도 있으니 마냥 행복할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원에 있을 때 저에게 하신 말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쓴 편지를 읽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니꼬운 선생님 선생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남녀간의 도리를 지켜가며 성실하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실 때면 일부 교육생들은 뒤에서 “흥, 자유 세상에 와서 누가 힘들게 일하겠냐. 돈 많은 사람 만나서 살면 인생이 활짝 펼 텐데…”라는 핀잔을 듣기도 하셨죠. 저 또한 하나원 시절 비록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였지만 속으로는 너무 사사건건 통제한다며 선생님을 아니꼽게 생각했어요. 선생님 저의 짧은 생각을 용서해 주세요. 하나원 생활동안 선생님과의 만남은 적었지만 하나원을 떠나고 보니 선생님의 위치, 그 자리가 저에게는 너무 소중한 자리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생활하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이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라고 교육생들에게 말씀하셨죠. 무엇보다도 일부 이탈주민들의 불성실로 인하여 우리가 아직까지 이방인으로 맴돌고 있다는 느낌에 마음이 아픕니다. 선생님, 무식한 저들과 우리가 같습니까 “우리는 평양에서 내노라 하며 살다 왔는데 정말 무식한 저들과 함께 하나원에 있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백씨가 저들보다도 더 무식해 보입니다. 나보다 배운것 없고, 평양에서 좋은 신분으로 살다 왔다고 해서 서민으로 살다온 동료들을 업신여기는 백씨가 더 가련하고 무식해 보이니 앞으로 그런 말 꼭 삼가 해 주세요”라고 말하면서 다시금 생각합니다. “선생님 분해 죽겠슴다. 저따위들이 여기까지 와서 행세를 합니까? 글쎄 저보고 꽃제비로 살다온 거지같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럴 때 가만있어야 합니까? 분해 죽겠슴다”라며 한 교육생이 찾아와 분을 못 참아 씩씩대며 울분을 토해낸다. “박씨 그런 말 듣고도 상대와 싸우지 않고 참고 저한데 찾아 온 것이 참 잘하셨어요. 박씨는 그 사람보다 훨씬 현명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런 말을 하지 않도록 꼭 잘 타이를게요” “그럼 어쩌겄슴까. 싸움하면 벌점 받고 정착금도 삭감되는데 그것보다도 탈북자들의 이미지가 나빠진다고 선생님께서 말하지 않았슴까? 저 정말 겨우 참았씀다” 이렇게 신분의 차이로 교육생 사이에 갈등이 자주 일어난다. 계급과 신분, 이성, 입국비용, 부부간의 갈등 등 수시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갈등을 다소나마 해소하기 위하여 밤낮없이 뛰어다닌다. 지난날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그것을 감수하며 가치 있고 보람있는 열매도 많이 수확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무능한 내가 이 사회와 우리 이탈주민들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의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그날까지 끝없이 정진할 것이다. 2005년 8월 김미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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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하나원 44기 교육생입니다
선생님도 저를 기억 하실겁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교육기간 선생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백번 지당한 말씀이였습니다
앞으로도 이땅에 새로 입국하는 탈북자들을 위하여 항상 수고 하시고 그들의 아픔을 헤아려 보살펴주시는 어머니. 언니. 누이가 되여주세요
새삶이 시작되는 곳에서 아주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너무 멋지세요.^^
감사합니다..
어이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