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 아기에게 족쇄를 채웠어요" - 김춘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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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끔찍한 일도 있구나, 어떻게 다섯 살 아기에게 수갑을 채우려고 생각했을까. 저는 정말 그때 다섯 살 난 아기에게 수갑을 채운 것을 보고 등골이 오싹해 졌어요. 동시에 눈물이 났습니다. 지금도 이따금 꿈속에서 고사리 같은 손목에 수갑을 차고 눈물을 흘리던 5살 어린 아기의 얼굴이 떠오르군 합니다. 내가 중국에 나왔다가 공안에 붙잡혀 화룡 변방대 구류장 생활을 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나는 두 차례에 걸쳐 화룡 변방대 구류장에 50일간이나 잡혀있었습니다. 함께 있던 어떤 사람은 2~4번, 심지어 6번씩이나 갇혔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나와 몇 명은 한번 잡혀가서 35일이라는 기간을 구류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잡혀 들어온 북한사람들은 들어온 날부터 한주일이 지나면 곧바로 처리, 북한 무산군 보위부로 북송 되군 했는데 나는, 조금, 특수했던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덕분이라 할까요, 그 기간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변방대에 잡혀오면 모두 손에 수갑을 채웠습니다. 어느 날인가 젊은 청년 몇 명과 8살쯤 나 보이는 소년, 그리고 5살짜리 소년이 들어왔는데 얼마나 못 먹었는지 바짝 마른 것이 그냥 애기 같았습니다. 그 어린것의 이야기에 따르면 “하얀 쌀밥이 그리워” 형님을 따라 두만강을 건넜는데 강을 건느다가 바지가랭이도 채 마르기 전에 붙잡혔다는 것입니다. 그때 중국의 변방대 간수들은 두 소년에게도 수갑을 채웠는데 하도 손목들이 가늘어 두 아이의 손을 합쳐도 수갑이 헐렁거렸습니다. 그러자 변방대 간수들은 소년들의 발목까지 합쳐, 그러니까 손발을 족쇄로 묶어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는 정말 소름이 끼치고 무서워서 어쩔줄 몰랐습니다. 철없는 그들은 아직 엄마의 품에서 한창 응석과 재롱을 부리며 피어야 할 꽃망울들이었습니다. 다섯 살 난 꼬마 애는 막 우는데 8살 난 소년은 발에 족쇠를 차고서도 실쭉,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래도 우리는 중국 흰쌀밥 먹구 간다. 이따가 또 오자. 다음엔 잡히지 말구 오자”라고 하면서 동생을 달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겪는 북송이라 처벌받을 것을 생각하며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그 어린 “꽃망울”들 때문에 번쩍 정신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하늘 땅에 대고, 산신령 할아버지에게 대고 밤낮으로 빌며 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노래도 막 불러대며 불안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변방대 간수들과 참모들은 감옥 규정을 어겼다고 우리를 윽박지르고 때렸지만 어떤 친구들은 외국인 대우를 하라고 소리도 치군하였습니다. 그때 변방대 구류장에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한 언니가 있었답니다. 무산에 사는 언니였는데 남편은 이미 1990년에 비법(不法)월경으로 무산 감옥에서 죽었고, 먹고살기 어려워 중국 한족에게 팔려와 살았다던 언니였습니다. 후에는 함께 탈북해온 딸의 처지가 어려워져서 중국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냈었는데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공안에 고발하여 인신매매 혐의로 붙들려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변방대에 잡혀 들어온 날부터 딸을 팔았다는 죄 아닌 죄로 남들과 다른 처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전기곤봉과 고무로 된 제압곤봉으로 늘 두드려 맞곤 했습니다. 때로는 남들이 다 자는 밤에 불러 내여 엉덩이와 잔등, 종아리 등을 골라 맞았(때린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는데 얼마나 맞았는지 시퍼렇다 못해 석탄을 바른 것처럼 새까맣고 반질반질 했습니다. 그 언니는 밤마다, 너무 억울하여 잠도 못 자구 울기만 하였습니다. 조선족참모는 딸을 팔지 않았는지 확인하겠다면서 시집보낸 곳을 대라고 했고, 그곳을 알려주면 딸도 북송되기 때문에 엄마인 그 언니는 가혹한 고문을 참고 견디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변방대 장교들은 언니가 겪는 고문 후유증 때문에 인차(빨리) 북송시키지 못하고 다른 사람보다 몇 배나 더 늦게 북송시켰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어느 날엔가는 한쪽 다리가 없어 의족을 한 남편과 그의 아내가 3명의 아이들과 함께 붙잡혀 왔습니다. 화룡시 승선 산속에 숨어 살다가 온 가족이 잡혀왔다는 것이였습니다. 변방대 간수들은 남편을 끌어내다가 누구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는지 대라고... 고무몽둥이로 마구 때리는데 그들의 아츠러운 비명소리 때문에 감방의 모든 사람들이 잠을 자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한주일 만에 북송을 시키면서 “다리 없는 병신이 어떻게 왔는가”고 소리 소리를 지르며 빨리 걸으라고 밀쳐댔습니다. 이렇게 중국의 공안 관계자들은 굶어죽기 싫어 탈북 했거나 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한 우리 탈북자들을 짐승처럼 다루었습니다. 지금도 중국 변방지역의 변방 대에는 우리의 무고한 고향사람들이 갇혀 있을 것이고, 그 수많은 탈북자들이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억울함과 분함은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합니까. 강제 북송만을 기다리며 그렇게 죽어가는 탈북자들은 과연, 어느 나라를 향해 살려달라고 외쳐야 합니까. 2005년 12월 김춘애(2003년 입국) 자료제공 : 자유북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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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힘드시겠어요/...
이러한 현실은 태어난 곳을 탓하기만 하기에는.....지도자들의 악함때문인데....
암튼 힘내세요...
모르던 사실을 알앗네요 알고보니 중국넘들도 일본넘을 욕하고 하더니
이젠 지네들이 사람짓을 안하고 있네요
어서 빨리 우리민족이 힘을 모아야 하는데...
중국공안국새끼들 언젠가는 저들의 죄값을 맛볼때가 잇을거에여~
물론 공안이라구 해서 다 그런건 아니지만 하튼 북한사람이라구 업수이 여기면서 마구 때리구 짓밟앗던 인간쓰레기들한테 천추가 내려지길 바래여
미련한 새기들 그새기들은 귀신도 역겨워서 씹어안가나벼
언젠가 자기지은 죄에 멸망한다. 멀리가라 지구밖으로 니놈이 새끼들도 역사의 족쇄를 차고 지구밖으로 내몰린다 좀 인간성을 가지고 살아봐라 얼마나 맘이 편한가...씹팔~드러워서 못산다 드러운 세상구석
하지만 이런 글을 보다 보면 머리의 이해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닌, 가슴으로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은, 끊을 수 없는 어떤 끈 때문일까요.
너무 단절된 채 오랜 시간이 흘러서 민족이란 개념으로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다면, 탈북자분들이 "사람", 지금 글을 보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
이라는 생각을 가져보아야 할 듯 합니다..
나도 잡혀 본적은 없지만 너무나 꿈찍한 말이 떠돌고 하니까 항상 숨도 못쉬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한국에 오니 꿈만 같았고 두고온 부모 형제들 생각에 죄책감에 잠기군하였어요 언제면 통일되여 이같은 행복을 누릴수 있을지 북한의 독재정치가 끝장날 날이 언제면 올까.....
때리면 군사 법정에 사야 합니다
중국도 인권에 중시 하기때문에
웬만 하면 북한주민들 안잡아요
신고 오면 어절수 없이 잡아요
그러고 북한 주민들 월북 할때 아편이랑
가져 오니 어쩔수 없이 출동 합니다
자기 구역으로 아편이 건너오면
징계당하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