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24시 - 박철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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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를 돌머리 만드는 金家 혁명사 - 입학시험 합격기준이 ‘위혁’ ‘친혁’ ‘어혁’ 조선의 대학교원(교수)들 사이에는 "내 실력을 뛰어 넘는 학생들을 만나는 것이 교원으로서 가장 큰 보람"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조선의 대학생들은 교원들의 실력을 능가하기는커녕, 졸업장을 딸 때까지 교원들이 갖고 있는 실력조차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다. 그래서 최근 기성세대들은 "지금 젊은 세대들의 기술과 지식수준이 갈수록 뒤쳐진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렇게 세대가 변할수록 대학생들이 '돌머리'로 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혁명역사를 암기하느라 다른 공부를 제대로 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고난의 행군'(90년대 중반 식량난 시기) 이후 학제는 여러 번 바뀌었는데, 현재는 유치원 2년(6살 입학), 소학교 4년, 중학교 6년, 대학교 4년 6개월(교원대학은 3년)이다. 조선에서 말하는 의무교육은 중학교 과정까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따지자면 당연히 중학교 때다. 조선은 중학교 때부터 수재를 특화시켜 교육시키는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보다 '어느 중학교를 나왔는가'를 놓고 인재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한창 두뇌 개발에 신경 써야 할 중학교 학생들에게 혁명역사를 주입시키느라 정신이 없다. 이는 민족의 운명을 개척해야 할 사명이 있다며 국가차원에서 칭송하는 '수재 집단'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입학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혁명역사' 조선에는 각 도(道)마다 1중학교가 있고, 시(市)·군(郡)단위마다 또 1중학교가 있다. 각 도내 전체 소학교에서 최고 실력을 가진 학생들만이 도급 1중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시·군급 1중학교 역시 해당 시·군 지역 소학교에서 선발된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다. 수도 평양에는 현재 3개의 1중학교가 있다. 일제시대 김일성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이 교장이었다는 창덕학교와 동평양 1중학교, 모란봉1중학교가 바로 그곳이다. 도급 1중학교 중에는 양강도 혜산에 있는 김일성 고등물리전문학교를 더 인정해준다. 도급 중학교보다 더 알아주는 중학교가 딱 한 곳 있는데, 바로 조선 최고의 수재들만 선발된다는 평양 제1중학교이다. 이 학교의 원래 명칭은 남산고급중학교로 항일혁명열사 가족이나 고위 당간부 자식들만 다닐 수 있던 학교였다. 교육시설이 좋아 '귀족학교'로 유명했을 뿐이었는데, 김정일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조선 최고의 수재학교로 발돋움했다. 평양 제1중학교에는 보통 평양시내 소학교 출신들이 많이 진학한다. 평양의 대부분의 소학교에서는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따로 뽑아 평양 제1중학교 입학시험을 위한 '특별소조'를 꾸린다. 물론 입학시험에서 제일 중요한 과목은 당연히 혁명역사다. 혁명역사에는 '경애하는 아버지 김일성 대원수님의 혁명 활동기' 및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장군님의 혁명 활동기' 등이 있다. 이 혁명역사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를 시기별, 날짜별, 장(章)별, 절(節)별로 구구절절 암기해야 한다. 혁명역사를 잘 공부해놓은 학생은 유리한 점이 많다. 예를 들어 평양 제1중학교 입학시험이 5과목 10점씩 50점 만점에 과락(科落) 40점을 못 넘은 학생은 1차로 자동 탈락한다고 치자. 여기서 과락을 넘은 학생중 혁명역사 과목 성적이 우수한 학생부터 합격할 수 있다. '위혁' '친혁'에 '어혁'까지… "수령님 시절 조선독립한 것도 다행" 이러한 채점 방식은 조선 내 모든 학교의 입학시험에 적용되기 때문에, 학생들의 학습능력이나 지능수준은 거의 반영이 되지 않는다. 학생들은 오직 암기하는 머리만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혁명역사 학습이 입학시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치원 시절부터 대학교 졸업하는 날까지, 아니 태어나서 무덤에 들어가기 전까지 혁명역사를 외우고 또 외워야 한다. 조선의 학생들은 보통 '위대한 김일성 혁명역사'를 '위혁', '친애하는 김정일 혁명역사'를 '친혁' 혹은 '혁2'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혁명역사를 학습하는 데 더욱 경악하고 있다. 2000년부터 '어혁'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어혁'이란 '항일의 여성영웅 김정숙 어머님의 혁명역사'을 줄인 말이다. 나는 도대체 김정숙이 뭘 했기에 역사 교과서까지 나오는지 궁금해 그 책을 한번 봤는데, 김정숙이 '항일 여장군으로서 무장투쟁에 찬란한 공로가 있었다' ' 김정일을 백두광명성으로 안아 올렸다'는 짜증나는 이야기뿐이었다. 조선의 대학생들은 "수령님 시절에 일제로부터 독립을 했으니 망정이지, 김형직(김일성 아버지) 동지 시절에 독립을 했으면 혁명역사가 두 배(김형직 혁명역사와 김일성 어머니인 강반석 혁명역사)로 늘어날 뻔했다"며 조선의 교육실태를 비꼬아 말하기도 한다. 외국 사람들은 김정일이 조선의 국토와 경제기반을 황폐화시키고, 사람들을 굶어 죽도록 만든 것만 지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김정일은 지금 조선이 부강한 나라로 나갈 수 있는 최후의 토대마저 짓뭉개고 있다. 조선에 남겨진 최후의 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인적자원까지 소멸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미 굶어 죽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다음 세대들의 발전 가능성까지 망가뜨리고 있는 김정일의 죄과(罪科)는 참으로 엄중하다. 대학생 잡는 혹독한 교도훈련 - 北 대학생 "제발 공부좀 맘껏하자" 말못할 하소연 조선(북한)은 21세기 들어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김일성이 국가 권력을 틀어쥐고 반세기 동안 ‘주체’를 외쳤건만 결국 남조선과 세계 각국에 손을 벌려야만 먹고 살수 있는 ‘국제 거지’가 된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당이나 정부, 일반 백성들은 외국의 원조로 먹고 사는 것에 무척 익숙해졌다. 인간생활의 이치에서 따져볼 때, 어려울 때 잠깐 이웃의 도움을 받고 여유가 있을 때 이웃을 도와주는 것은 인간만이 갖고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항상 남에게 손을 벌려 먹고 사는 게 굳어지고, 이에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직업적 거지’로 전락하게 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우리 조선이 거지나라로 몰락하게 된 것은 국가를 국가답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인재들이 없기 때문이다. 남조선이나 외국 사람들은 조선 지식인들이 하나의 사상으로 획일화 돼있기 때문에 정치나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틀린 지적은 아니다. 하지만 사상의 자유가 없다는 이유가 자연, 응용과학의 낙후성을 해명하지는 못한다. 사상은 사상이고 지식은 지식이니까 말이다. 대학생활 중 군사훈련만 6개월 조선 지식인들의 수준이 점점 떨어지는 이유는 대학시절에 자기 전공과목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짧은 식견이지만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 대학생들은 세계에서 가장 바쁘고 고된 대학시절을 보내는 것 같다. 한국만 하더라도 일년의 절반만 강의가 있고 나머지는 다 개인적으로 보내는 시간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조선 대학생들은 군사훈련을 비롯해 농촌지원 전투, 국가에서 진행하는 행사 동원 때문에 전공과목을 공부할 시간마저 부족한 현실이다. 현재 조선의 대학교육 실태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의 정식 대학과정은 4년 6개월이다. 소학교나 중학교에 배치되는 교원을 양성하는 교원대학들만 3년 과정이다. 그런데 이중 6개월은 교도훈련이라는 군사훈련 기간이다. 조선의 대학생들은 누구나 대학 2학년 때 교도훈련을 받아야 한다. 복장도 군대복장으로 갈아입고 장구류까지 착용하면서 교도중대에서 군인생활을 해야 한다. 교도중대는 대체로 시 외곽에 있다. 교도중대의 중대장과 정치지도원, 사관장은 현역군인들이다. 이것은 대학생들에게 군대생활을 실지로 경험시키기 위한 조치로 군사복무를 마친 제대군인 대학생들에게도 예외가 없다. “군대면 군대답게 도둑질도 배워라” 교도생활은 여름교도(4월~10월), 겨울교도(11월~3월)로 나뉘는데 6개월간의 교도생활을 마친 대학생들은 ‘예비역 소위’의 칭호를 받는다. 첫날부터 한달 동안은 집중 훈련기간이다. 이때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야 한다. 특히 모포와 매트리스, 취침 시 머리 쪽에 정돈하는 군복에 ‘각’을 잡는 훈련이 반복된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제대로 해놓지 못하면 10번이고 20번이고 반복시키다. 밤새껏 반복할 때도 있다. 그래도 안 되면 새벽에 자기가 깔고 자는 매트리스를 등에 메고 산 위까지 뛰어와야 한다. 현역군인인 중대장이나 사관장은 대학생들의 인텔리 근성을 완전히 뿌리 뽑고 군대 물을 먹여야 한다며 훈련강도를 높인다. “우리가 땀에 절은 군복 입고 먼지 속을 달릴 때 너희들은 반반하게 차려 입고 공부나 했을 테니 이 혁명화 기간에 어디 한번 맛 좀 보라”는 식이다. 여름교도에 걸린 학생들은 농사일도 해야 한다. 각 교도중대는 자체 부업토지에 야채와 옥수수를 심어 가꾼다. 그런데 농사란 말뿐이고 수확이 얼마 없다. 밑거름도 없고 비료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식당근무도 대학생들이 떠맡는다. 재미있는 것은 여름교도의 경우 국을 끓이거나 반찬을 만들 채소나 부식물을 조달하는 것까지 식당근무 학생들에게 책임을 준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주위에 있는 농장 밭에 가서 알아서 훔쳐오라는 뜻이다. “군대면 군대답게 도적질도 배워야 한다”는 게 사관장들의 지침이다. 식당근무 학생들은 끼니때마다 3가지 이상의 반찬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음식 재료가 없으니 무 하나를 가지고 네모난 모양으로도 썰고, 둥근 모양으로도 썰고, 삼각형 모양으로도 썰어서 ‘3가지 반찬’이라며 만들어 놓는다. 기름도 없이 소금만 넣고 지지면 반찬이고, 물을 넣고 끓이면 국이 되는 것이다. 교도생활에서 가장 큰 고통은 뭐니뭐니해도 배고픔이다. 사관장이 중대에 나오는 쌀을 빼돌려 팔아먹는 일이 흔하니 학생들이 잡곡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날이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도훈련장 주변의 인가들에서는 교도생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밀가루 빵도 만들어 팔고, 술도 팔고, 두부도 판다. 하지만 인가에 나가 음식을 사먹다 중대에 들키면 처벌근무를 서야한다. 그래서 야간점검이 끝나고 취침시간에 돌입하면 많은 학생들이 몰래 부대를 빠져 나와 주변 인가에서 인조고기밥이나 빵을 사먹는다. 석탄 1톤 바치면 한 달 동안 집에서 놀아 하지만 그것도 돈이 조금이나 있는 집 자식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가난한 집 자식들은 그것도 사먹지 못하고 매일 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을 청해야 한다. 부잣집 자식들은 아예 교도생활에서 한달, 두달씩 제외된다. 교도생활이 워낙 힘들기로 소문이 나있으니 힘 있고 돈 있는 집 자식들은 교도중대 간부들에게 돈이나 물자를 뇌물로 바치고 그 기간 동안 집에서 노는 것이다. 실례로 석탄 1톤을 교도중대에 바치면 1달을 집에서 놀 수 있다. 그리고 1천5백원짜리 고양이 담배 1곽(갑)을 사관장에게 바치면 하루 외출을 허락해준다. 하루 이틀 정도는 사관장이 눈감아 줄 수 있지만 그 이상 훈련에 빠질 경우에는 중대장이나 정치지도원에게까지 인사차림을 해야 한다. 이렇게 돈 많은 학생들이 다 빠지고 나면 남아있는 학생들은 두 배로 고통스럽다. 인원이 부족해지면 남은 학생들의 근무시간이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이다. 기본이 2시간씩 ‘진지근무’(참호근무)를 서는 것이지만 외출하거나 열외된 학생들이 있으면 근무시간이 더 늘어난다. 결국 명절이나 설날 같은 때에는 못사는 집 자식들만 8시간에서 10시간씩 혼자 진지근무를 서게 된다. 조선에서 없는 사람의 설움은 대학생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교도생활에 들어간 여학생들은 머리를 귀밑 아래로 기르지 못하며 화장품도 소지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돈 있고 힘 있는 집의 여학생들은 교도기간 통째로 집에서 놀기도 한다. 아무리 교도기간이라도 강의는 이어진다. 그래도 대학생이기 때문이다. 교도기간의 기본강의 과목은 [조국통일사]와 [미일제국주의 침략사]이다. 여기에 전공과목 2~3개 강의가 추가된다. 농촌지원, 행사동원 때문에 강의시간도 축소 계산상으로 대학시절 동안 교도훈련기간을 제외하면 4년의 시간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날은 2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우선 해마다 봄철과 가을철에 농촌지원 전투가 있다. 대학생들의 농촌지원 전투는 봄 모내기철에 40일, 가을 수확기에 30~40일간이다. 또한 평양의 대학생들은 유명세를 누리는 대학일수록 국가동원행사에 많이 불려 다닌다. 행사 훈련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강의를 들을 수가 없다. 보통 2·16 김정일 생일이나 4·15 김일성 생일에 맞춰 진행되는 국가행사의 열병식 훈련기간(6~8개월)은 공부를 쉬게 만든다. 대학생 횃불행진 행사도 2~3달의 연습기간을 갖는다. 여기에 음력설이나 국경일에 평양의 대학생들을 모아놓고 김일성 광장에서 춤을 추도록 하는 경축무도회 행사 훈련도 2~3달씩 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각 대학들이 갖고 있는 농장에 가도 일을 하는 대학부업농장동원도 몇 달씩 소요된다. 또 혁명사적지 및 전적지 답사를 떠나는 학생들도 몇 달씩 강의에 참석하지 못한다. 이렇다 보니 계획된 강의가 계속 밀리게 되고, 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강의를 축소해버린다. 그러고도 수업일 수가 모자라면 일요일에도 강의를 하고, 하루에 다섯 강의씩 벼락치기로 끝내기도 한다. 한 강의시간에 두 강의 분 진도를 나가는 것은 이제 조선의 대학들에서 특별한 일도 아니다. 너희가 김일성 광장 열병식을 아는가? - 김정일 만족시키려고 1년간 훈련 조선에서도 평양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공부도 잘해야 하고 집안 토대도 문제가 없어야 한다. 필자는 아무런 배경 없이 실력으로 원하던 대학에 당당히 입학했다. 대학 합격을 통지 받은 당시에는 세상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것 같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으로서의 단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필자의 큰 포부에 찬물을 끼얹은 것 중에 하나가 열병식 참가였다. 대학 진학한지 3일만에 열병식 참가자로 뽑혔다. 결국 필자의 대학생활은 ‘멀쩡한 사람이 병신 되어 나온다’는 열병식에서 시작됐다. 열병식이라고 하면 남조선 동포들은 학교 재식훈련 정도로 생각하는데, 조선에서 열병식은 1년간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는 혹독한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다. 조선에서는 김일성, 김정일의 생일과 조선인민군 창건 기념일,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 등에 학생, 노동자, 군대, 일반 시민들을 동원하여 김정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열병식 행사를 갖는다. 관객은 오직 김정일 한 사람이다. 김정일 한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일년 내내 피땀을 흘리며 행사를 준비한다. 대학생 열병식 참가자를 선발하는 기준은 딱 한 가지다. 그것은 바로 '키'다. 열병식 참가가 결정된 대학에서는 학생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키재기’를 시작한다. 나는 작지 않은 키에 신입생이라는 이유로 단번에 선발됐다. 열병식이라는 것을 텔레비전에서나 가끔 봐왔던 나는 다가올 훈련이 얼마나 고되고 힘겨운 것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 대학이 1개 종대를 맡게 되었다. 1개 종대는 총 12개의 횡대로 되어 있다. 한 개의 횡대는 25명이 선다. 1횡대에는 키가 제일 큰 학생들이 서고 12횡대에는 키가 제일 작은 학생들이 서게 된다. 당 간부의 자제들은 훈련에서 제외돼 각 종대에는 종대를 책임진 대대장이 있고 그 밑에 정치부 대대장, 후방부 대대장이 정해진다. 또 그 밑에 중대장, 정치부 중대장이 있고, 그 다음 횡대장들과 부소대장, 비서들이 있다. 1개 횡대도 3개 분대로 나누어 분대장들이 또 있다. 이런 간부 역할은 보통 4학년과 3학년들이 도맡는다. 각 종대에서 간부 책임을 맡지 않는 학생들은 대부분 신입생들이다. 첫 훈련이 시작되었을 때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웃고 떠들면서 ‘실제로 장군님이 우리를 보러 나오시겠나?’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한 명, 두 명씩 훈련에 빠지는 사람이 생겼다. 당시에는 열병식에 참가하지 못할 사정이 생겼을꺼라고 생각했다.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훈련에서 빠진 대상들은 모두 당 간부의 자제들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결국 ‘키 재기’로 시작된 열병식 대오 선발은 철부지 1학년 학생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기숙사생들로 확정됐다. 한 개 대학이 1개 종대를 구성하기 때문에 열병식에 선발된 학생들은 오전에는 강의를 받고, 오후에는 학교 운동장에 모여 훈련을 한다. 학교 운동장의 그 먼지를 다 삼키며 훈련하면 저녁에는 입안에서 작은 모래가 씹힐 정도였다. 열병식 훈련의 첫 단계는 ‘몸 풀기’와 ‘발 끝 펴기’다. 예술 체조 선수들의 훈련 동작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훈련인데 매일 훈련과제들이 제시되고,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면 훈련이 끝나지 않았다. 첫 달은 대학운동장에서 훈련을 하고 다음 달부터는 주체사상탑 교양마당 아래에서 훈련을 했다. 그때부터 일부 학생들은 다리에 관절염이 생기기 시작한다. 강의시간에 밀려오는 졸음을 못 참아 교원들의 꾸중을 듣는 일이 빈번해지고, 환자가 계속 늘어났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훈련에 빠지면 엄한 추궁을 받았다. 주체사상탑 가로등불 모두 깨버리고 싶어 매일 오후 2시부터 시작된 훈련은 보통 저녁 7시에 끝나는데, 훈련이 끝나면 종대훈련교원이 훈련총화를 한다. 그때 지적된 학생들은 그 종대 차원에서 비난의 대상이 돼야 한다. 종대 총화가 끝나면 중대 별로 총화를 짓는다. 중대 총화에서는 훈련시간에 늦은 사람, 훈련에 불성실하게 참가한 사람, 훈련에서 지적 받은 사람들을 호되게 비판한다. 중대총화가 끝나면 소대, 분대 순으로 총화를 한다. 소대총화 역시 만만치 않다. 소대총화가 끝나면 분대별로 모이는데 분대장은 다음날 훈련에 늦지 말아야 하며 훈련에 성실하게 참가 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총화를 마무리 한다. 소대 총화까지 마치려면 보통 1시간 반이 소요된다. 그러나 총화가 끝났다고 해서 하루 훈련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총화에서 지적 받았던 학생들은 밤 9시에 또 다시 보충훈련을 해야 한다. 그때처럼 주체사상탑 공원의 환환 가로등 불빛이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다. 가로등 불빛이 없으면 보충훈련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건 말건 돌맹이를 집어 던져서라도 모든 가로등을 깨버리고 싶었다. 기숙사 학생들이 지친 몸을 끌고 대학 기숙사로 돌아가려면 보통 걸어서 30분~1시간이 소요된다. 그 시간까지 버스가 없으니 또 걸어야 한다. 기숙사의 저녁 식사는 이미 끝난 상태라 저녁을 먹을 수도 없다. 발이 퉁퉁 부어올라 잠자기도 힘들어 굶는 고통보다 더 괴로운 것이 ‘물’이 없는 고생이다. 기숙사에 물이 나오지 않으니 빨래는 둘째치고 세수도 하기 어렵다. 하루 종일 먼지를 뒤집어 썼기 때문에 도저히 그대로 잠자리에 들 수 없다. 그래서 몇 명씩 짝지어 대학주변 아파트 앞에 있는 물 펌프를 찾아간다. 얼굴에 물이라도 묻히고 나면 밤 11시가 넘는다. 잠자리에 누우면 그야말로 온 몸이 땅속으로 꺼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제대로 깊은 잠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찬물로 씻고 나도 발이 퉁퉁 부으며 열이 올라와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밤새 뒤척여야 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래도 여기까지는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삼복더위가 시작되니 그전에 고생은 고생 축에도 못 끼는 것이었다. 여름이 되자 오전 강의조차 못 듣고 하루 종일 훈련에 나가야 했다. 평양은 6월만 되도 무더위가 시작된다. 더욱이 우리 훈련장이었던 주체사상탑 교양마당은 나무 한 그루 찾아 볼 수 없는 콘크리트 바닥이다. 한낮의 따가운 햇빛이 콘크리트 바닥을 뜨겁게 달구어 놓으면 쉬는 시간에도 엉덩이를 붙일 수 없다. 아무리 더워도 두꺼운 적위대복의 단추를 풀지 못했고, 머리에 쓴 모자도 벗지 못하게 했다. 등을 흥건히 적시던 땀방울은 어느새 하얀 소금으로 변하면 몸 안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빨래도 제대로 못 하는 지경이었으니 제 몸에서 나는 땀 냄새가 그렇게 역겨울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게 됐다. 열병식 훈련은 휴일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루라도 쉬면 그만큼 다리가 굳어진다고 하여 일요일에도 계속 훈련을 시켰다. 그때 제일 얄미웠던 아이들은 부모의 권력 덕택에 훈련에는 참가하지 않고 '보장조'에 속해 놀기만 하던 학생들이었다. ‘보장조’란 열병식 훈련에 필요한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하여 종대마다 15명 정도의 보장성원들을 두는 특별 소조인데, 훈련하는 학생들을 위해 하는 일은 하나도 없고, 훈련지도교원들의 잔심부름이나 술상이나 차려주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열병식은 다리와, 배를 뒤틀리게 만들어 아예 훈련 대오에서 열외 될 만큼 부모의 배경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돈과 권력을 갖고 있는 중간 간부들의 자식들이 ‘보장조’에 속하게 된다. 열병식 대오의 표준 보폭 길이는 70cm이다. ‘120보 주악’에 맞추어 발끝을 곱게 펴고 두 발을 지상에서 60cm까지 교차차기를 해야 한다. ‘교차차기’라는 것은 한발로 땅바닥을 힘껏 때리면서 그 반동으로 다른 발을 들어올리는 것인데, 온 몸의 힘을 모아 힘껏 콘크리트 바닥을 하루 종일 차고 나면 내장이 온통 뒤틀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열병대오 내에서 기계처럼 움직일 것을 요구받았다. 말처럼 사실상 우리는 기계였다. 정치부대대장이나 정치부중대장들은 쉬는 시간마다 훈련대오 앞에 나서서 “행사를 사수하겠다는 투철한 의지를 가지면 육체적 고통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고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열병식 준비는 다리와 배 속만 뒤틀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 까지 뒤틀리게 만든다. 아침 7시30분에 종대차원에서 대열 검열이 있다. 그 때 목 칼라, 바지주름, 종대마크, 허리띠, 단추 등을 제대로 착용했는지 검열하고, 종대 별로 앉아서 노동신문사설이나 김일성 김정일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자료를 읽는 독보사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훈련의 쉬는 시간마다 정치교양사업을 진행한다. 잠시도 몸과 머리가 쉴 틈이 없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열병식 훈련 총지휘부에서 조직하는 훈련검열이 있는데 그때마다 훈련강도가 배로 올라 간다. 김일성광장 주석단 앞 도로의 길이는 216m다. 김정일 생일 2월 16일을 기념하기 위해 216m로 만든 것이다. 열병식 참가자들은 216m의 거리를 1분 40초 안에 통과해야 한다. 1분 40초! 얼핏 보면 너무도 짧아 보이는 이 순간을 위해 이 수 천 시간 동안 연습 해야 했다. 첫 훈련을 시작한지 거의 반년이 지나자 우리 훈련대오는 4.25여관으로 입소했다. 그 때 계절은 이미 겨울의 문턱에 이르렀다. 4.25여관에 입소할 때 훈련용 겨울 솜옷, 신발 등 모든 것을 학생들 자비로 구입했어야 했는데 동복과 허리띠를 구하는 일이 정말 어려웠다. 4.25여관은 평양시 사동구역 송신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국가적 행사나 회의에 동원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꾸려진 곳이다. 외국사람들 눈에는 한심하게 보이겠지만, 그래도 조선에서는 4.25여관의 시설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 방 하나당 1백 명이 생활해야 하지만 조선 기준으로는 최신 설비였다. 그리고 식사 질도 굉장히 높았다. 대학기숙사에서 강냉이 밥 한 숟가락 먹고 훈련하던 우리들에게 잡곡밥과 콩기름이 뜬 배추국은 진수성찬처럼 보였다. 일주일마다 달걀 1개씩 공급되었으며, 매일 사탕 15알씩 간식도 지급됐다. 北 집단체조 보면서 박수치고 웃지말라 - 열병식과 집단체조는 조선인의 피와 눈물 [4.25여관]에 입소하자 훈련대오의 지휘체계도 개편됐다. 우리대학 행정과장이 우리 종대(한 대학이 1개 종대를 구성) 총책임자로 임명되었고, 대학당위원회 부원 1명, 대학 보위원 1명, 후방책임자1명, 대학진료소 의사 1명, 대학 청년동맹일꾼 1명, 생활지도교원 1명 등이 종대 간부로 임명되었다. 300명이 안 되는 훈련 학생들을 위해 13명의 교원과 15명의 간부들이 파견된 것이다. 열병식 행사에 참가하는 종대는 군악단을 제외하고 총 50개가 넘었다. 생활도 더 규칙적이고 훈련도 더 강해졌다. 4.25여관에는 김일성광장을 그대로 모방한 주석단과 훈련장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하루에 한 번씩 전체 종대가 참가하는 종합훈련을 진행했다. 50개가 넘는 종대들이 실전과 똑같은 순서대로 훈련을 벌이는 것이다. 종합훈련은 조선인민군 대좌가 집행했는데 평양에서 벌어진 역대 열병식은 그가 모두 지도한 작품이라고 했다. 매 횡대들에서 발차기를 제일 못하는 사람들을 각 종대의 제일 마지막 25번 자리에 세웠다. 그 자리는 ‘후보자리’이다. 종대마다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한 인원공백에 대비하기 위해 ‘후보생’을 두게 되는데, 후보가 되면 훈련은 같이 하면서도 당일 행사에는 참가하지 못한다. 그 후보자리가 훈련생들을 다그치는데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훈련 지도원들은 훈련생들의 훈련태도가 조금이라도 불량해 보이면 ‘후보자리’로 내쫓겠다며 으르렁거렸다. 1년 동안 죽도록 고생하고도 정작 김일성광장 앞에 서지도 못한다는 것은 모든 훈련생들에게는 ‘죽음’처럼 느껴지는 위협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나도 훈련이 힘들 때면 ‘미국 놈들 미사일에 맞아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순간적인 충동을 느꼈지만, 후보자리로 내몰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항상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훈련기간 가족면회 일체 금지 4.25여관에서의 생활은 모두 군대생활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새벽 기상과 더불어 모포 각 잡기와 백포정돈, 대열검열, 독보, 식사, 훈련, 청소점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군대식이었다. 다른 것보다 모포 각 잡는 일이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제대로 각을 잡지 못하면 지도원들이 개인 물건을 모두 뒤 엎어놓고 사람을 달달 볶았다. 매주 일요일 오후에는 종합훈련이 없었다. 하지만 종대간의 경쟁심 때문에 종대 훈련지도 교원들은 훈련을 계속 시킨다. 열병식 훈련 총지휘부에서도 그것을 알지만 못 본 척 한다. 교원들은 “(훈련장 바닥에) 찰떡이 떨어져도 주워 먹을 수 있을 정도로(콘크리트 바닥이 반들반들 해질 정도까지) 밀라!(발차기 연습을 하라)”고 말했다. 4.25여관에서 훈련하는 기간 동안은 부모님이나 가족들의 면회는 일체 금지된다. 물론 돈 이 있거나 연줄이 있는 훈련생들은 언제든지 부모들을 만날 수 있었다. 4.25여관에서는 열병식 훈련만 하는 것이 아니다. 훈련생들을 사상적으로 무장 시키기 위해 별의별 정치행사를 다 벌인다. 한번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이라는 노래를 가지고 50개가 넘는 종대 전체가 합창 경연대회를 벌이기도 했다. 한자리에서 50번이나 넘게 같은 노래를 듣고 있자니, 그리웠던 장군님도 정나미가 떨어질 지경이었다. 또한 종대별로 ‘사회주의 경쟁’을 조직했는데, 그 경연에서 1등을 해보려고 우리 종대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모자이크 벽화 정성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행사 당일이 다가오면서 제일 강조하는 훈련은 ‘횡렬 맞추기’와 ‘사선 맞추기’였다. 출발 신호를 받으면 1사선을 기준으로 대열을 맞추어 나가다가 주석단 앞을 지날 때 “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며 최고조 높이로 발차기를 해야 한다. 그 횡렬이 미세하게나마 흔들리면 그 사람을 잡아내서 사상투쟁 무대에 올려 세워 온갖 모욕을 다 주었다. 우리 같은 대학생들은 아무리 열심히 훈련을 해도 군인들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강건군관학교 종대나 김정숙 해군대학 종대는 전체 종대 중 최고의 일사불란함을 보여줬다. "장군님 사랑 보답 위해 행사를 성과적으로 보장하자" 종합훈련은 겨울을 끼고 진행되기 때문에 훈련장에 눈이 오는 경우가 많았다. 눈이 오면 전체종대가 동원되어 눈을 치우곤 했는데, 그때 우리는 “미국 놈들 다음으로 미운 것이 바로 눈(雪)이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행사 두 달 전부터는 열차를 타고 김일성 광장에 나가 실전훈련을 벌였다. 그때마다 길옆에는 종대 안에서 자식이나 형제들을 찾아보려는 사람들 때문에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훈련을 할 때 마다 김일성광장을 봉쇄했기 때문에 누구도 그 자리에서 찾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행사 당일이 다가오자 훈련 참가자 전체에게 행사복과 신발, 허리띠가 배급됐다. ‘열병식 기념메달’도 수여됐다. 그리고 “이러한 장군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행사를 성과적으로 보장하자”는 안건으로 각 종대 별 결의모임을 진행했다. 최종 실전훈련이 시작되면서 훈련생의 고생은 더욱 커졌다. 발 찍는 소리를 더욱 크게 하려고 신발 바닥에 말발굽처럼 징을 박았는데 국가에 나누어준 신발이 어찌나 형편없던지 징을 고정하는 못 끝이 솟아올라 훈련생들의 발바닥을 찌른 것이었다. 우리 횡대 25명 중에 못 끝이 발을 괴롭히지 않은 사람이 불과 두 명뿐이었다. 드디어 행사 당일이 다가왔다. 행사 당일에는 허리띠의 버클과 단추를 비롯한 금속제품을 닦지 못하게 했다. 금속제품에 광이 날 경우 햇빛에 반사되어 장군님의 시력에 해를 주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행사 전날 밤에 김일성 광장에서 훈련으로 밤을 보내고 새벽 3시 주먹밥으로 아침을 때웠다. 아침이 되자 5호총국 일꾼들이 와서 행사 참가증을 확인했다. 군악단 입장식과 함께 행사장에 진출하고 나서 오전 9시까지 행사개시를 기다렸다. 마이크로 증폭되어 들려오는 초침 소리 때문에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었다. 행사 전에 안정제 주사를 놔주고, 구심환도 세 알씩 입안에 넣어 주었지만 기절하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1분 40초를 위해 1년을 다 바쳐 드디어 정각 9시, 1호 환영곡(김정일이 등장할 때 나오는 음악) 소리가 울리자 온 종대가 목청껏 만세를 외치며 울었다. 필자는 그 당시 잠깐 몇 분 동안이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필자 머리 속은 하얗게 변했고, 나도 모르게 발과 손이 올라갔던 느낌이다. 필자가 정말 주석단 앞을 지난 것이 사실인지, 꿈을 꾸었는지 지금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당시 필자는 속으로 “일생에 한번뿐일지도 모르는데, 장군님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리라”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행사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단 1분 40초였다. 그 1분 40초를 위해 1년을 다 받쳤는데도 필자의 머리 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4.25여관으로 되돌아오는 열차에서는 모든 훈련생들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들도 나처럼 허망한 1분 40초를 위해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강박관념에 시달려야 했던 지난 1년의 시간이 서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행사가 끝나고 우리 대학생들은 평양시민들의 연도환영을 받으며 금수산기념궁전으로 향했다. 금수산기념궁전에 있는 광장의 길이는 총 415m이다. 이것은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을 기념해서 설계된 것이다. 죽은 김일성 시신을 위해서도 열병식 가져 우리 대학생 종대들은 금수산기념궁전에서 또 한번 열병식을 진행하고 나서야 완전히 해방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1분 40초 동안 한 사람의 관객을 위해 수 만 명이 광적인 행사를 벌였다는 것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죽은 사람의 무덤을 찾아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만세를 외치는 것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그때 정말로 훈련이 끝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열병식 훈련기간 누구나 다 “충성의 일기”를 써서 검열을 받아야 한다. 필자가 나중에 그 일기장을 정리해보니 4.25여관에 입소한 후 6개월 동안 김일성 광장을 관통한 연습 횟수가 무려 556번이었다. 결국 우리는 1분 40초를 위해 1년의 시간을 바쳤으며, 1번의 행진을 위해 556번 관통을 연습을 벌였던 것이다. 열병식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오니 학교에서는 열병식 참가 학생들에게 표창휴가를 주고 고향집에 가서 쉴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한때 공화국 정부에서 집단체조 ‘아리랑’에 참가 했던 사람들에게 천연색 텔레비전을 한 대씩 나누어 준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열병식이 열리게 되면 온 나라 사람들이 열병식 참가자들이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열병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을 때 동네사람들이 부모님께 “그 집 아들은 무슨 선물을 받아왔나?”고 캐묻는 난처한 상황이 이어졌다. 열병식에 참가하고 국가에서 받은 선물이라고는 열병식 행사복과 허리띠, 발바닥을 찌르던 신발 정도였다. 그 외에 무릎 관절염과 소화불량 증세를 덤으로 얻었다. 필자는 지금도 대학 신입생 시절의 추억이 하나도 없다. 1년간의 열병식 훈련은 건강하고 튼튼했던 몸과 마음을 병들게 만들었다. 건강했던 몸이 굳어가고, 남들보다 우수했던 두뇌는 기계처럼 움직이다가 바보가 되어버렸다. 춥다는 것, 덥다는 것, 배고프다는 것, 몸이 아프다는 것, 졸린다는 것, 오직 몸으로 느끼는 본능에 대한 반응만 남게 되었다. 결국 나에 남은 것은 수치심뿐이었다. 집단체조 보고 박수치지 말라 그러나 그 때 1년간 열병식 훈련을 통해 필자는 사람을 장난감 도구처럼 생각하는 조선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게 되었으며, 썩어빠진 간부집단의 구린내 나는 뒷모습도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 필자가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그 열병식 때문에 지금의 필자가 있게 된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외국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만약 조선의 열병식이나 집단체조나 군중예술 행사를 볼 기회가 생긴다면, 웃고 박수치는 것만은 하지 말아달라. 그 장면은 조선 사람의 피와 눈물을 쥐어짜서 만든 형상이다. 그 장면을 보고 박수를 치는 것은 재주를 부리는 짐승들의 묘기를 보고 박수를 치는 것과 똑 같은 것이며, 그 장면을 보고 웃음이 나온다면 조선 사람을 더 이상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지금은 김정일 독재 때문에 사람구실을 못하고 살지만 우리 조선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남조선에서 선군정치 토론회요? 참… - 조선 속담 '민충이 쑥대 올라갔다'는 말 그대로 한국사람들 사이에서 조선의 선군정치에 대한 토론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조선의 정치에 대해 토론회를 벌일 만큼 조선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도대체 한국 사람들이 선군정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기에 거창한 토론회까지 벌이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한국 사람들이 선군정치에 대해 뭘 안다고 토론회를 벌이는가?’ 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선군정치라는 것이 학자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논쟁할 만큼 특별한 사상이나, 이론적 배경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1995년 김정일의 다박솔 초소 방문 조선에서 ‘선군’이라는 말이 정식으로 등장한 때는 1998년이다. 선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다박솔 초소’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에서는 “1995년 1월 1일, 온 나라 인민들이 장군님의 모습을 보기 위해 TV 앞에 모여 앉았고, 설 맞이 공연 무대위에서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장군님을 뵙기위해 안타까이 기다리고 있을 때 장군님께서는 다박솔 초소를 찾으셨다”고 말한다. 다박솔 초소는 평양시 만경대 구역 교외에 위치한 군 부대다. 당시 해마다 1월 1일이면 신년사 발표와 설맞이 공연 등 국가적 연례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김정일은 온 인민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행사장에는 나타나지 않고 중대급 규모밖에 안되는 평범한 군대초소를 전격적으로 방문함으로써 ‘군대를 중요하게 생각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선의 혁명역사에서는 다박솔 초소에 대한 김정일의 현지지도를 선군정치의 시작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조선노동당출판사에서 발간한 [붉은기를 지켜 준엄한 6년]에 매우 상세히 선군정치에 대해서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1995년부터 6년간을 언급하고 있는데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1994년 7월 수령님을 잃고, 유례없이 악랄해진 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의 경제봉쇄 책동과 고립압살 정책 - 한마디로 나라가 처한 엄혹한 환경속에서 우리가 사회주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인민군대를 강화하고 인민군대를 앞세워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는 길임을 확신하셨다”고 주장한다. 김정일의 혁명역사를 다룬 시리즈 [불멸의 향도] 중 작가 송상은이 쓴 ‘총대를 들고’에서도 선군의 시작을 1995년 다박솔 초소 방문으로 묘사한다. ‘총대를 들고서’는 조선의 혁명역사 서적 중 선군정치에 대한 묘사가 가장 정확한 것으로 평가 받았던 소설이다. 선군정치 = 일당독재+군사독재 어쨌든 김정일이 자주적 인민으로 사는가, 아니면 제국주의의 노예가 되느냐 하는 준엄한 갈림길에서 결연히 총대를 높이 들었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부분에서 김정일의 ‘말씀’까지 인용되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내가 선군정치를 결심했을 때 인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민들이 이해하고 나를 따르리라 생각하고 선군정치를 결심했습니다. 사탕알이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총알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인민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처음에 선군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선군이라고 하면 군사독재가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선군의 위력이 만방에 과시되고 있으므로 정식으로 ‘선군정치’라고 명하고, 우리 당의 기본 정치방식으로 앞세워야 합니다” 이때부터 온 나라에 군사중시, 총대중시 기풍이 퍼지기 시작했고, 온 나라 전체 인민들이 선군정치에 관한 문답식 답안을 베껴 외우느라고 소동이 일어났다. 2000년부터 선군정치의 정당성, 우월성이 크게 발휘되고 있다고 강조하며 본격적으로 ‘선군정치’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만 발행되는 외국인용 영어신문 와 에서는 선군정치를 원래 ‘Army-first police’로 번역했었는데, 2002년 후 부터는 ‘Sungun policy’로 바꾸어 번역했다. 조선중앙TV에는 김정일이 현지지도 했던 당시 다박솔 초소의 중대장이 출연하여 선군을 외치기도 했다. 2002년부터 선군정치를 독창적인 사상이론처럼 부풀리고 미화하는 작업들이 이어졌다. 솔직히 선군정치라는 것이 별다른 사상이나 이론에 의해서 뒷받침될 만한 내용이 전혀 없다. 더군다나 군대에 대한 통솔권이 장군님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조선의 정치현실에서 ‘군대를 앞세운다’는 것은 ‘장군님께서는 일당독재뿐만 아니라 군사독재까지 병행하신다’는 뜻일 뿐이다. 하지만 조선의 선전일꾼들과 혁명역사 교원들은 ‘장군님의 군사독재’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을 감추기 위해 경쟁적으로 선군정치에 대해 혁명전통과 사상이론적 근거를 갖다 붙이기 시작했다. 1932년 VS 1962년 원래 혁명역사 과목 교원들이 학생들 수업에서 제일 강조하는 것이 ‘선군정치의 시작’이다. 2002년까지 학생들은 혁명역사 시험지에 선군정치의 시작을 ‘1995년 1월 1일 다박솔 초소 현지지도’ 라고 쓰면 무난히 5점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02년 말부터 시험지의 정답이 바뀌기 시작했다. 혁명역사 교원들은 “원래 수령님께서도 군대를 중요시하셨고, 그 때문에 장군님께도 군대를 체계적으로 넘겨주셨지요? 오늘의 선군정치는 위대한 수령님의 총대중시, 군사중시 사상을 그대로 계승해서 변화된 현실에 맞게 발전시킨 것입니다”라고 설명하며 김일성 노작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선군정치의 시작은 수령님께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신 1932년 4월 25일부터로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2003년 평양의 각 대학에서 펼쳐진 ‘김정일 혁명역사 학과경연대회’에서는 선군정치의 시작에 대해 ‘1962년 설(說)’이 등장하며 교원들간에 말싸움이 시작됐다. 1962년 2월 5일은 김정일이 ‘일당백’의 고향 대덕산 초소를 방문한 날인데, 이 날이 김정일에 있어서는 인민군대에 대한 첫 현지지도였으므로 이때를 선군정치의 시작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 것이다. 결국 ‘1932년 설(說)’을 주장하는 교원이 채점한 시험지에는 1932년이 정답이고, ‘1962년 설(說)’을 주장하는 교원들이 채점한 시험지에서는 1962년이 정답으로 인정되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같은 답을 놓고서 최우등과 낙제생이 갈라지는 희극이 연출된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선군정치와 관련된 모든 노작들, 저서들, 노동신문 사설들, 문답식 학습자료들에서 선군정치의 시작에 대한 부분이 모두 삭제되기 시작했으며 ‘다박솔 초소’도 소리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학생들과 인민들 사이에서 빈번히 진행되는 문답식 학습에서도 선군정치의 본질, 정당성, 위대성에 대해 언급할 뿐 선군정치의 시작에 대한 부분은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1960년 류경수 탱크사단 방문 그러던 중 2006년 8월 25일 갑자기 선군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중대보도로 조선이 시끄러워졌다. 1960년 8월 25일 김정일이 ‘류경수 105 탱크사단’을 방문했는데, 이때부터가 선군정치의 시작이라며 8월 25일을 공식 휴일로 정했으며, 선군정치 46주년을 경축한다는 선전 포스터들이 평양거리 곳곳에 설치되었다. 조선중앙TV도 연일 선군정치를 찬양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때 입장이 난처해진 사람들은 학생들에게 혁명역사를 가르치는 교원들과 각급 단위의 선전일꾼들이었다. 그들은 대학 5년간 전문적으로 혁명역사만 공부했으며, 그 혁명역사로 박사칭호까지 받은 실력가들이었지만 학생들과 인민들 사이에서 망신을 당한 셈이었다. 우리대학의 혁명역사 교원은 강의 중에 “위에서 이 날이다 하면 이 날이고, 저 날이다 하면 저 날이다”면서 “학생들에게 자꾸 거짓말 강의를 하는 것 같아 부끄럽다”고 실토한 적도 있었다. 민충이 쑥대 올라간 듯 김정일의 선군정치 기간이 10년이든, 반세기든 간에 남은 것은 핵무기와 미사일 몇 개뿐이다. 선군정치의 성과로 조선이 국방에서 자주권을 완성했다고 떠드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미국은 선군정치가 없이도 세계에서 핵무기가 가장 많은 군사강국이 되었고, 일본은 선군정치나 핵무기가 없어도 세계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부러워하는 경제강국이 되었다. 선군정치는 커녕 군인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조차 반대하고 투쟁했던 남조선은 분단 반세기 만에 조선과 비교도 안 되는 선진국이 되지 않았나? 조선의 선군정치 10년은 UN과 외국정부를 향한 구걸과 동냥의 10년이었을 뿐이다. 선군정치는 그저 단순한 군사독재다. 일당독재로도 양이 차지 않아 군대까지 앞세워 백성들 위에 군림하려는 낙후된 정치체제에 불과한 것이다. 김정일의 군사독재의 총부리는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괴뢰정권만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김정일의 선군정치 기간 동안 가난한 평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쓰러져갔으며, 군인들조차 ‘강도질 아니면 허약병’이라는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다. 선군정치라는 빛깔조차 나쁜 개살구를 가지고 남조선 사람들이 무슨 토론을 벌였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조선의 혁명역사 전문가들이 한국의 선군정치 토론회 소식을 들었다면 모두 웃음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에는 “민충이 쑥대 올라간 듯하다”는 말이 있다. 쑥 줄기 위에 올라간 벌레가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올라온 것처럼 거드름을 피운다는 뜻이다. 조선을 제대로 알려면 백성들의 생활을 먼저 고찰해야 옳다. 김정일을 찬양하는 정치구호에는 백성들의 진실이 담겨 있지 않다. 선군정치는 조선사람들을 그저 생으로 잡는 군사독재일 뿐이다. 그런 선군정치를 무슨 학자들까지 모여 토론했다니, 그저 자다가도 웃을 일이다. “농촌지원전투, 머리카락 곤두선다”- 밥숟갈 드는 사람은 모두 나가야 '농촌지원전투'는 말 그대로 노동자, 사무원, 학생, 군인,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농사일을 돕는 것이다. 물론 농장의 주인이라고 하는 농장원들이 있기는 하지만 변변한 농기계가 없는 조선의 현실에서는 인력으로 모든 농사일을 하다 보니 일손이 부족해서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조선에서 농촌지원활동은 1년 내내 항시적으로 진행된다. 외국사람들은 조선의 ‘농촌지원활동’과 ‘농촌지원전투’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활동’은 1년 4계절 내내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사업이고, ‘전투’는 봄과 가을철에 ‘밥숟가락 들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농촌으로’ 내몰리는 국가적 집중사업이다. ‘전투’ 때는 소속단위의 출장증명서가 없으면 다른 지방에 여행을 다닐 수 없고, 장마당에 나가 물건을 사거나 파는 일도 할 수 없다. 내 집 변소에 자물쇠를 채워야 하는 이유 먼저 농촌지원활동에 대해 알아보자. 농촌의 1년을 살펴보면 우선 겨울철은 거름생산에 총집중이다. 1월 1일~2일 공휴일을 보내고 1월 3일부터 전국의 모든 공장, 기업소, 군부대에서는 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충성의 선서모임’이 끝나자마자 거름생산에 나선다. 평양이든 지방이든,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동시에 시작된다. 거름량은 기업소, 학교, 인민반 등 각급 단위마다 계획량이 정해진다. 노동자의 경우 내가 속한 기업소에도 거름을 바쳐야 하고 인민반에서 제기되는 세대별 정량을 또 바쳐 한다. 거름생산도 경쟁을 조직하여 바치는 거름량에 따라 평가사업을 진행하는데, 꼴찌를 차지한 단위에서는 그에 따른 비판과 제재가 가해지기 때문에 길 바닥에 떨어진 개똥 한 덩어리도 귀한 것이 된다. 농촌지역이나 소도시 외곽에 위치한 세대들에게는 자기 집 변소에 쌓은 인분도 적지 않은 값어치를 하게 된다. 아파트가 농촌지역 가구들은 자기변소에 쌓인 인분을 거름으로 쓰기 때문에 집집마다 인분을 모아 놓는다. 조선에는 ‘인분도둑’도 있다. 모아둔 인분은 여름철 채소농사는 그 인분을 흙과 섞어서 말린 다음 비료 대용으로 사용하거나 돼지먹이로 사용하기 때문에 인분을 도둑 맞지 않으려고 자기집 변소에 열쇠를 채우는 극성스러운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집 변소에 열쇠까지 채우면서 모아둔 인분만 갖고는 바쳐야 할 책임량을 채울 수 없다. 소나 돼지를 키우는 집들도 형편은 똑같다. 그래서 한겨울에 얼어붙은 땅을 파서 니탄(泥炭)을 캐내기도 하고, 톱밥무지에 소변을 재워 퇴비를 만들기도 한다. 보통 농촌 지방의 1개 세대에서는 1년에 약 1톤 정도의 퇴비를 바쳐야 한다. 결국 1월 초부터 2월 16일 김정일 생일까지는 거름생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길가의 밭에서는 기업소별, 단위별로 거름더미를 만들어 경쟁을 부추키는 것이 겨울철 농촌 풍경이다. 인분을 얻으러 다니는 평양시민들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도 거름생산 전투는 진행된다. 평양에서는 1월 3일 ‘충성의 선서모임’이 끝나고 나면 ‘퇴비생산전투’와 ‘화력발전소지원전투’가 동시에 시작된다. 평양 시민들은 거름을 등에 짊어지고 평양시 주변 농장에 나가는 일과 지정 받은 날짜에 평양화력발전소(평양시 평천구역에 위치)에 나가 발전소 노동자들을 도와 석탄을 나르는 일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화력발전소지원전투’는 자기 몸으로 떼우면 되지만, ‘퇴비생산전투’는 평양시민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통일거리나 광복거리, 특히 중구역 고층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동대원구역 같은 단층집이 많은 곳에 사는 친지나 지인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 텃밭이 없는 동대원구역 사람들에게 변소에 쌓이는 인분은 거추장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인분을 흙과 섞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퍼주곤 한다. ‘퇴비생산전투’와 관련해서 조선민주여성동맹 조직이 제일 극성스럽게 가두여성들을 괴롭힌다. 가두여성이란 직장에 출근하고 집에서 살림만 하며 여맹조직생활을 하는 여성들을 말한다. 할당된 거름을 바치지 못한 가두여성들에게는 주민들에게 모아진 거름을 농촌으로 옮기는 과업이 부여된다. 농촌으로 거름을 보낼 때 버스나 무궤도전차를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단위 별로 줄을 지어 농촌까지 수레를 끌고 가야 하는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가두여성들이 여기에 동원된다. 하루 종일 수레를 끌고 가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그 옆에서 꽹가리를 치거나 붉은 깃발을 흔들면서 농촌까지 다녀와야 하는 여성들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물 한 모금 얻어먹기도 힘들어 봄철에는 벼 모판 만들기, 강냉이 영양단지 만들기, 모내기 등이 진행된다. 특히 일요일에는 무조건 점심을 싸들고 농촌지원에 나가야 한다. 배정 받은 농장의 작업반 분조에 도착하면 현지 농장의 농민 중 한 사람을 ‘지도농민’으로 붙여준다. 그 농민을 따라 지시를 받고 그 날 과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식이다. 평양 시민들은 새벽에 열차를 타고 평안남도 일대의 농촌에 나가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에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가두여성들은 보통 3일에 한번씩 농촌지원에 동원된다. 농촌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나가기는 하지만 실제로 보면 물 한 모금도 공짜로 얻어먹기 힘들다. 농촌인심이 야박해서가 아니라 실제 농민들의 생활처지가 그만큼 한심하기 때문이다. 인민학교 학생과 중학교 1~3학년 학생들은 보통 ‘모뜨기’에 동원된다. 또한 강냉이 영양단지를 옮기는 것도 어린 학생들의 몫이라, 강냉이 영양단지를 ‘학생단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농장에 나가면 각계 각층에서 지원 나온 사람들이 모두 모이게 되는데 현지 농장의 농민들은 이 사람들의 소조를 한 개씩 맡아 농사일을 지도하게 된다. 여름철에는 봄철 모내기 전투보다 농촌지원활동이 뜸해진다. 여맹조직에 소속된 가두여성들은 자주 나가는 편이지만 학생, 노동자, 사무원들은 주로 일요일에 나간다. 논에 들어가 잡초를 뽑는 김매기가 기본이고 풀베기도 많이 하는 일이다. 풀을 베어서 쌓아 놓고 다음해에 거름으로 쓰기 때문이다. 이때 중학교 학생들은 옥수수 밭, 감자 밭의 김매기에 동원되고 소학교 학생들은 ‘딱정벌레 잡기’ 같은 벌레잡이에 동원된다. 농약이 부족해 벌레가 생기면 어린 학생들의 손을 이용하는 것이다. 가을걷이 역시 전국적으로 총집중하는 전투다. 우선 옥수수를 베고 이삭을 따고 옥수수 대를 모아두는 옥수수 수확을 끝내고 벼를 벤다. 이때도 군인, 학생, 노동자 할 것 없이 온 백성이 다 동원된다. 소학교 학생들과 중학교 1~3학년 학생들은 이삭줍기에 동원된다. 농촌지원전투는 온 백성에게 악몽 대략 이 정도가 조선에서 통칭되는 ‘농촌지원활동’이다. 조선 사람 입장에서는 해마다 전국적으로, 전사회적으로 진행되는 평범한 활동이다. 조선 사람 입장에서 이런 농촌지원활동은 크게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농촌지원에 나가 하루 하루 채워야 할 ‘공수’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새벽에 집을 나서도 집합하여 작업분 분조를 배정받고 해당 작업지에 들어서면 최소한 오전 8시 30분이다. 오후 1시까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1시간 점심시간을 갖고 오후 5~6시면 작업시간이 끝나기 때문에 노동에 단련된 조선백성의 입장에서는 큰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솔직히 배나온 간부들에게 조차도 일정한 운동도 되고, 상쾌한 농촌 바람이나 쐬다가 작업반장이나 분조장과 앉아서 담배나 피우면서 빈둥거릴 수 있으니 농촌지원활동에 큰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백성들은 ‘농촌지원’이라는 말만 들으면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된다. 그것은 봄철과 가을철에 진행되는 ‘농촌지원전투’에 대한 고생스러운 기억 때문이다. 조선사람이라면 중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대학생인 경우 대학시절 전기간 ‘농촌지원전투’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다. 조선에서 군대에 안간 사람은 있어도 ‘농촌지원전투’를 안간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 악몽 같은 기억은 인민학교부터 시작된다. 인민학교 학생들, 고사리 손으로 벌레잡기 국가적으로 ‘농촌지원전투’가 선포되면 인민학교 학생들도 동원된다. 물론 도시에 사는 인민학교 학생들은 농촌 학생보다 낫다. 하지만 평양시에서는 집단체조를 비롯하여 각종 국가행사 훈련에 동원되어야 하니 농촌지역 학생보다 반드시 낫다고 보기 힘들다. 지방도시의 인민학교 학생들은 수업을 마치고 주변 농장에 나가 모뜨기를 돕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대를 한 대씩 뽑아야 한다. 한 모판에 한 개 학급이 모여 앉아 담임교원과 지도 농민의 지도 밑에 모를 뽑는다. 내가 소학교 시절에 우리 담임선생님이 “모대 한 개를 끊어 놓으면 벌금 5전씩 물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와 동무들은 모대가 끊어지지 않게 뽑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우리가 모대를 뽑아 흙을 털어 놓으면 지도 농민들과 교원들이 단으로 묶어 놓았다. 인민학교 학생들은 논밭에 나가 일하는 것 외에 예술공연을 준비하여 휴식시간에 농장원들과 지원 나온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벌여야 했다. 그러니 학생들에게는 휴식시간도 잘 보장되지 않는 셈이었다. 벌레잡이도 인민학교 학생들의 중요 과업 중 하나다. 털벌레, 딱정벌레, 메뚜기 등을 잡는 일이었는데 여자 아이들은 징그럽고 무섭다고 울먹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벌레 통을 갖고 다녔다. 벌레잡이가 끝나면 누가 많이 잡고 누가 적게 잡았는지 총화를 짓는데 꼴찌는 항상 담임교원의 지적을 받는다. 조선은 1등에게 차려지는 특혜보다 꼴찌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더 크다. 다른 나라 아동들은 1등을 위해 노력하는 법을 배우지만, 조선의 아동들은 꼴찌를 면하기 위해 눈치 보는 법부터 배운다. 꼴찌한 동무의 자기비판을 바라보며 은연중에 그런 사상이 싹트는 것 같다. 내가 인민학교 학생이던 시절, 최고의 악몽은 단연 구더기 잡이였다. 한여름에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농촌의 변소에서 구더기를 나무막대기로 잡으려면 무섭고 징그러워 진땀을 흘려야 했다. 구더기만 보면 울음을 터트리던 사촌 여동생은 삼촌이 미리 구더기 몇 마리를 비닐에 싸서 농장에 나가기 전에 챙겨주기도 했다. 구더기도 할당량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가을철 농촌지원전투에서 인민학교 학생들은 이삭줍기에 나서야 한다. 벼 베기를 마친 논에 들어가서 벼 이삭을 주워 담임 교원에게 바치는 것이다. 물이 채 안 빠진 논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 어린 학생들이 넘어져서 옷을 버리는 일도 자주 있었다. 매정한 교원들은 이삭줍기 총화를 할 때 어린 학생들의 바지주머니를 뒤지기도 한다. 물론 어린 아이들을 다그쳐서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교원의 입장도 딱하지만, 벼 이삭 몇 알을 바지주머니에 감추었다는 이유로 큰 잘못을 지은 것 마냥 눈가에 눈물이 맺혀 고개를 떨구어야 했던 내 동무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 때는 ‘재수가 없는 놈이구나’하고 지나쳤는데, 지금 다시 생각하니 화가 나서 심장이 터질 것 같다. 2007년 2월 23일 박철용/평양 K대 출신 자료제공 : 데일리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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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후손들이 현시대 지구에서 제일 낙후한 사회에서 살다니!
방글라데슈는 가난한 나라지만 행복지수는 세계1위라더만 북한동포들은 세계에서 제일 가난할뿐더러 제일 불행한 사람들이군
하시고저 하는 일들도 잘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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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어처구니 없어 웃음밖에 안 나간다
그런데 역시 북한 사람들도 생각은 다들 있었군요.
그래도 이해가 안 갑니다. 한 사람을 두고 그렇게 당하고만 있다는게.. 김정일이 숨어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인민들 앞에 그렇게 행차도 꼬박꼬박 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 나와있는 사람들이 김정일을 다독거리기만 해도 그깟 한 사람 물리칠 수 있을 텐데요. 그럴 생각조차 못하다니, 그 많은 사람들을 세뇌시킨 김정일은 한편으로는 히틀러보다 더 놀라운 사람인 것 같군요.
남한도 독재정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한 때는 나라 안의 지식인들, 대학교수나 언론인들은 쥐도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사형절차도 밟지 않고 죽었던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 많은 지식인들이 죽으면서도 남한 쪽 지식인들은 끝까지 불의에 저항했고, 지도자의 말이라면 그저 옳은 줄로만 알고 당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이 정도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북한의 지식인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더라도, 자신이 살기 위해 불의에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광신도 집단 같은 기이한 북한을 만든 것 같구요.
그래서 저는 통일을 반대합니다. 저는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북한 국민들이 먼저 자신의 나라를 위해 잘못된 점을 고쳐나가고 발전시켜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지경까지 만들어 놓은 김정일도 참 무서운 놈이지만, 고쳐나갈 시도도 없이 그 체제에 순응하던 주민들과는 같은 국민이 되고 싶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