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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 김철민
REPUBLIC OF KOREA 관리자 2 12386 2007-07-26 15:21:00
북한에서 태어나서 자라온 젊은이라면 또 여기 남한의 모든 젊은이들도 한번쯤은 느꼈을만한 공포가 있으니 그 것이 바로 군 입대가 아닐까 싶다.

북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의무병역제 이지만 10년이라는 살인적인 복무연한으로 세상일을 놀라게 한다. 게다가 충분한 공급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어야하는, 극심한 고통을 감수해야하는 지옥과도 같은 군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다.

북한의 모든 젊은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끌려가는 고통을 감수해야하며 10년 후에 이들은 거칠고 난폭해진 “굵직한 남자”가 되어 돌아오게 된다. 심지어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조차 알아볼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닥치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절친했던 친구의 죽음을 잊을 수가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은 자신들의 요구와 꿈과는 상관없는 군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자신들이 가는 곳이 어딘지, 어디서 어떤 앞날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끌려갔으며 조국을 보위한다는 명색으로 청춘을 허비해야 했다.

당시 너무도 몸이 약했던 이유로 군에 가지 못했던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도 있었지만 사회에서 소외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럭저럭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그렇게 절친했던 친구의 휴가소식을 듣게 되었다.
말이 휴가이지 그 친구는 부대에서 필요한 물자를 가져가기위해 고향으로 왔다고 말했다.

당시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던 군에서는 부모들의 자식의 대한 사랑과 고향집을 그리는 젊은 군인들의 마음을 이용해 며칠씩 집에 보내주는 대가로 부대에서 필요한 물자를 가져오도록 했다.

결국 집안 형편이 안 되는 친구들은 집에 올 엄두도 못 냈고 그나마 생활이 괜찮은 친구들은 몇 년에 한번이라도 집에 올수 있었다. 어떤 녀석들은 돈이 많다는 이유로 군에 입대한 것이 아니라 군에 출퇴근을 하는 그런 호화를 누리기도 했다.

사정이 어찌됐든 나는 친구를 만났으며 시꺼멓게 타고, 거칠어지고 형편없이 약해진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글썽해졌다. 또 군에 안 나가게 된 내 처지를 생각하며 안심했고 군에 나간 모든 친구들을 걱정하게 되었다.

지금도 미친 듯이 밥을 먹어대던 그 친구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천천히 먹으라고 얘기하는 나에게 친구는 씽긋 웃으면서 “습관이 됐어”라고 짧은 말을 내뱉었다. 그 한마디 속에 담겨있을 수많은 고생을 생각하니 참으로 기막히고 앞으로 남은 9년이라는 세월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고참이 되면 괜찮겠지만 그래도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할까싶어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나는 그 친구와 짧은 나날을 보냈고 그 며칠 안 되는 기간이 그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날들이 되고 말았다.

움직이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헤어지기 섭섭해 하던 친구를 배웅한지 한 달이 좀 넘은 후 나는 그 친구의 죽음이라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죽다니. 한 달 전만해도 멀쩡하던 그 친구가 죽을 이유가 어디 있어?

너무도 당혹스러운 소식에 모두 정신이 없었고 그의 부모 형제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사실이었고 참혹했으며 너무도 믿을 수없는 이유도 따랐다. 공군으로 입대를 한 그 친구는 비행장 보수공사에 동원됐고 공사도중 폭발한 폭탄 때문에 그 자리에서 절명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당시 공사장에서 쓰던 정대(드릴)가 사고로 추락한 전투기의 기총 탄이었다고 한다. 정대 대신 기총탄을 썼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그런 사실을 지휘관들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것 또한 웃지못할 희극이 아닐수 없었다.

공사장의 정대대용으로 쓴 기총탄의 폭발로 10년 만기제대를 앞둔 고참 한명과 입대한지 1년도 안 되는 나의 친구가 죽음을 맞게 되었다.

불과 한 달 전에 만났던 친구를 싸늘한 시체로 대해야 했던 상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의 첫 휴가가 마지막 휴가였고, 그와의 첫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집에 도착한 것은 달랑 전사자통지서 한 장 뿐이었고 부대장이나 지휘관들의 사과나 위로의 인사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군 생활 도중 죽을 수도 있으며 또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듯 한 북한 군부의 싸늘한 태도에 고향사람 모두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들도 자신의 친구나 자식이 그런 죽음을 당했을 때 저렇게 냉정하고 무표정할 수 있을까?
죽은 사람 하나 불쌍하다는 북한의 속담이 꼭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제명을 못산 그 친구를 잊을 수 없다. 아니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나의 친구처럼 고생하고 죽어가는 북한의 군인들을 생각하면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하루빨리 김정일 정권이 무너지고 자유롭고 민주화된 새 나라가 건설될 때 비로써 북한의 모든 군인들도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알게 될 것이며 속아 살아온 수많은 날들에 분통하고 억울해 할 것이다.

2007년 7월 26일 김철민(2006년 입국)

자료제공 : 자유북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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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까지 고담녹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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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언덕넘어 2007-07-27 16:57:14
    하루 속히 남과 북이 하나되어 군대의 존재 이유가 같은 종족 때문이 아

    니고 다른 외침에 대한 방어 때문이 되기를 고대합니다

    국민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도망 가야 하는 사회가 얼마나 버틸수 있을

    지 대충 짐작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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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남 2007-07-29 14:57:07
    북한에서 군대를 김정일군대 라부르던때가 부끄럽습니다 국토방위의 사명을지닌 군대를 정이리녀슥이 어벌좋게두 지놈 개인을 위한 군대루 만들었으니 ....원 .. 세상에...이젠 북한군두 쓰레기인 칠천만 겨레의 공공의적 김정일의 군대가아니라 한반도의 안녕을 지키는 나라의 군대, 국민의 군대로 다시 태여나기를 기대하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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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만강 2007-07-29 15:02:29
    북한의 김정일군대는 죄없는 무고한 국민에게 총을 겨누지말고 김정일 족속들에게 총부리를 돌리기를 재삼당부하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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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쁜여우 2007-09-19 19:09:48
    김철민씨 혹시 80기에 나온분 아니세요
    이렇게 글을 올린것을 보게되니 너무나 감동되네요
    지금 어디서 사는지 행복하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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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망 2008-01-24 16:34:52
    김철민씨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집은 어디신지 제 친동생 이름과 꼭 같아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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