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브로커였다(3) - 유상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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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태운 버스는 점심시간도 없이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 시린궈러멍 변방공안총대(변방대 사령부격) 였다. 총대는 넒은 부지에 여러 개의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정원수도 잘 구비되어 규모 있게 느껴졌다. 우리가 총대 본관 앞에 도착하자 많은 장교들이 건물 현관 앞에서 서성대다가 우리 일행 한사람에게 장교 3명씩 따라붙어 주변부속 건물 쪽으로 제각기 흩어져 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어느 곳으로 가는지? 또 그들과의 만남이 마지막인 것처럼 느껴져 두려움마저 들었다. 이어 몇 명의 장교들이 나를 에워싸고 현관 안으로 들어가 어느 한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방안은 널찍하고 두개의 양수책상을 마주 붙여놓은 것과 소파가 있고 그 밑에는 철궤가 달린 책장이 있었다. 맞은편에는 일반 책상이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에 컴퓨터와 서류인 듯 한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책장 옆 옷걸이에는 남녀 경관 정복이 모자와 함께 걸려 있었는데 장식으로 보아 급이 높은 자의 옷 같아 보였다. 나를 호송하고 온 책임자와 5명의 장교가 나를 에워싸고 무엇이라고 말을 주고받더니 젊은 장교 한명이 1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나의 옷을 일일이 흩어보며 검사를 시작하였다. 겉옷은 물론 속옷과 허리띠 재봉솔 까지 샅샅이 흩어본 다음 신발깔창을 뽑아내고 들여다보고 손으로 문질러 보고 신발 밑바닥도 깐깐하게 들여다보며 검사를 하였다. 모든 소지품 검사가 끝난 다음 화장지 한 장과 소개신을 나의 앞에 가져다 놓으며 무엇이라고 쓰여 있는가 고 물어본다. 화장지는 내가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 '내가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하여 다오, 희망을 잃지 말고 끝까지 살아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라는 글을 썼던 것을 오늘 낮 차에서 은심이가 소리를 내지 못하고 계속 울음을 울기에 내가 글이 씌여져 있는 화장지를 은심이에게 주었던 것을 군인들이 빼앗아서 가져온 것이다. 소개신에는 몽고어로"우리는 난민입니다.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고 대한민국 대사간으로 보내주세요"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내가 그전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개신 하나씩 주었지만 지금은 한 팀에 한 장씩만 준다. 그것도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 있고 빠져나갈 통로를 확실하게 습득하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에게 주면서 조를 이끌도록 하며 전화기도 통화키만 누르면 서로 연결되도록 준비시켜 떠나 보내군 하였다. 이번에는 영옥에게 소개신을 주면서 어떤 경우에도 소개신이 중국군인들 손에 들어가면 아니되니 먹어서 없애든가, 아니면 비비서 던져버리라고 하였다. 다른 팀들에서 여자책임자에게 소개신을 주면 그것을 꼬깃꼬깃 접어서 가슴이나 허리춤 어디에다 숨기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영옥이가 소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지 못하였다. 그것이 지금 군인들의 손에 들어가서 나의 앞에 와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내용을 서툰 중국어로 설명하여 주었고 통역이 오면 확인하여 보라고 하였다. 일차적인 것이 끝났는지 그때야 점심이라고 가져온 것이 밥을 미역국에 말아서 커다란 그릇에 담아 나의 앞에 내놓으면서 밥을 먹으란다. 나는 “밥 먹을 생각이 없다, 우리사람들이 어제 저녁도 못 먹고 아침도 굶었으니 그들에게 식사를 공급하여 달라”고 하였다. 아마 한국인이 처음으로 개죽처럼 밥을 만들어 가져다주면서 먹으라니 심술을 부려서 안 먹는다고 판단하였던지 이번에는 제대로 밥 따로 국 따로 담아다 빨리 식사하란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지금은 밥 먹을 정신이 전혀 없으니 괜찮다고 하였다. 소지품 검사를 하던 젊은 장교가 가고 이번에는 덜 익은 것 같은 여자가 들어왔는데 그가 통역이란다. 질문은 어젯밤에 있었던 것과 똑같이 한국 어느 곳에 살고 언제 중국에 왔고, 무슨 차편으로 중국에 오고 등 일반적인 것에 대하여 질문을 한 다음 군인 두 명만 남고 다 어디론가 가버린다. 나는 함께 있는 장교들에게 그들은 죽음을 피하여 중국에 온 난민이며 그들은 반드시 저와 함께 한국에 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만약 그들이 저와 함께 한국에 가지 못한다면 나도 북한에서 나서 자랐으니 북한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던 장교는 황당하다는 듯 아니 된다고 잘라 말한다. 그들의 말하는 품을 보아서는 탈북자들을 상당히 많이 대상하여 본 것 같은 느낌이 육감적으로 느껴지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나는 장교에게 나의 가방 안에 성경책이 있으니 볼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니 군말 없이 성경을 가져다준다. 나는 소파에 앉아 성경책을 펼쳐들고 보려고 하였지만 도무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열차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많은 시간을 무료히 보낼 수는 없고 하여 나는 늘 자그마한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보군하였다. 성경을 보고는 싶지만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볼 수도 없고 하여 가만히 앉아 있는데 조사국장 수잉지(소영길)가 들어와 장교에게 상점에 가서 무엇을 사오라고 한다. 이번에는 음료두병과 그릇에 포장한 라면을 한 그릇 가져다주면서 먹으라고 한다. 나는 먹고 싶지 않으니 탈북자들에게 가져다주라고 하니 이번에는 뭐라 욕설을 퍼붓는다. 수잉지는 한참동안 무엇을 생각하는 듯 하더니 내려가자고 하여 따라가니 이미 갈량와 영옥이. 은심이 모두다 있었다. 수잉지는 통역관에게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들과 두서너 달 구류장에서 함께 생활하면 한국갈수도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하면 좋다고 하면서 반드시 우리일행이 모두 한국에 함께 갈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우리는 다시 족쇄와 수갑에 묶이어 차를 타고 이송을 하여 시린호터시 간수소로 가게 되었다. 시린호터는 내몽고 자치구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자그마한 도시로서 도시외곽에 간수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정말 그들이 바라는 한국으로 함께 갈 수 있기를 바라며 가벼워진 마음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수감자 옷을 갈아입었다. 모두들 옷을 갈아입고 각자 다른 방으로 나뉘어져 가면서 언제인가는 반드시 좋은날을 만나 우리 모두 함께 할 수 있기만을 바라고 바랬다. 나는 간수소 2구역 12호 감방에 배치 받았다. 감방은 출입문이 있고 철창문이 있는 형식으로 이중문 이였으며 6명의 수용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감방 안에 들어서자 머리를 박박 깎은 수감자들이 출입문 쪽으로 우르르 밀려와 웬놈인가? 하는 호기심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중국어로 나는 한국 사람이고 중국어를 잘 못하니 잘 도와달라고 말하자 몸집이 뚱뚱한자가 한국어로 한국에서 왔는가고 묻는다. 그러면서 왜 여기에 오게 되였는가? 등 여러 가지 줄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탈북자들을 몽고에 보내다가 잡혀서 여기에 왔다고 하니 자기도 탈북자들을 한국에 많이 보냈다고 하면서 지금 이 간수소에도 장미숙이라는 탈북자 출신 한국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임철이 그리고 누구누구를 아는가? 한국 간 탈북자들이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단다. 나는 임철이는 내가 알고 그 사람이 부탁한 탈북자들을 몇 차례 한국에 보낸 경험이 있다고 응답하여 주었다. 2006년 말경에 나에게 누군가 전화로 자기가 탈북자들을 도와주는데 한국에 데려다 달라고 하게에 내가 한국 가서 열심히 살겠다는 분들은 내가 도와드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데려온 사람들에게서 몇 백만씩 돈을 받으면 나는 도와드릴 수가 없다고 하니 자기도 탈북자 지원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1월에는 전화로만 연결하여 몇 명을 몽고에 보내고 2월에는 22살짜리 아가씨가 있는데 영구에서 혼자 떠나보내겠다고 하여 나는 아가시를 반드시 보호자를 붙여서 보내며 보호자 없이 혼자 보내는 경우에는 내가 받지 않겠다고 하니 그때 임철이가 성순이를 데리고 연길에 와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본 성순은 22살 아가시인데 얼마나 키가 작은지, 꿰진 들 가방을 들고 내가 80리를 걸어가야 한다고 하니 자기는 150리도 걸어봤단다. 키는 작아도 담찬 것이 마음에 들었다. 실은 40리만 걸으면 되지만 나는 그녀의 정신적 준비상태가 어떠한가 알아보려고 80리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나는 성순을 데리고 시장에 가서 신발과 가방을 사주고 생활비를 주면서 먹고 싶은 것은 자체로 사다가 식생활을 하되 이제부터는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우리 함께 승리하는 날까지 늘 기도하라고 일러주었다. 성순은 피난처에서 훌륭하신 분의 도움으로 성경공부도 하게 되였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내가 북한 민주화를 주제로 한 노래들을 자체로 편집하여 중국에서 복사를 한 다음 탈북자들에게 공급하고 북한에도 공급하였는데 이때 성순이는 피난처에서 북한민주화를 주제로 한 노래 테이프를 온밤 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성순이가 테이프의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안겨온다. 성순이만 아니었다. 피난처에 있던 4명의 모든 여성들이 눈믈을 흘리면서 아마 고향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두고 떠난 부모형제와 그리운 고향을, 다시 돌아갈래야 갈수 없는 이 처절한 모습에서 그들은 김정일 독재에 대한 증오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렇게 시린호터 간수소에서 탈북자 이야기로 첫 밤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하였다. "주여,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이 땅의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저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다음에 계속) 2008년 5월 8일 유상준 자료제공 : 자유북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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