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브로커였다(5) - 유상준 |
---|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나는 이번 출발 길부터 꼼꼼히 다시 생각하여 보았다. 북한에서 나오게 된 가정은 7월말인가? 8월 초인지? 북한에서 실시하는 선거에 참가하고 나오겠단다. 선거전에 나오면 자기네 가족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면 친척분들과 동료들에게 해가 된다면서 선거가 끝나서 3-4일 안으로 중국에 들어오겠으니 이번 길에 꼭 함께 한국으로 갈수 있게 도와달란다. 나는 늦어도 8월 4일까지는 중국에 들어와야 하며 그래야 나도 편안히 일을 할 수 있으니 그리 알아두라고 하니 선거가 끝나면 무조건 탈북하겠단다. 나는 그들4명과 은심이네 포함하여 7명을 계획하였고 연길을 출발하는 사간은 8월 7일로 못 박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쪽에서 이러 저러한 변동이 생기면서 그들은 약속한 날짜에 탈북할 수가 없었고 나는 그들에게 9월말까지 탈북하여 연변지방의 모 피난처에서 대기하라고 일러주었다. 내가 그들을 9월까지 오라고 한 것은 산동성 청도에 몇 명의 탈북자들이 한국 가겠다고 언제부터 도움을 요청한 것을 9월로 예정하였기에 청도 분들을 3국으로 보내고 북한에서 나오시는 분들은 10월에 탈출시키기로 하였던 것이다. 은심이와 갈량이는 잘 아는 집사님들을 통하여 성경도 가르치고 하면서 보호하여 달라고 하였고 영옥은 중국 남편과 함께 있기에 떠나기 직전에 데려 오려고 하였다. 모든 일이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서 나는 출발 날짜를 9일로 변경하고 모든 일행들에게 8월7일에 출발할 것이라고 통보하고 모 피난처에 집결시키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출발 날자와 시간은 변경하고 알려 주지 않았다. 나는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늘 언제 출발한다고 통보하여 놓고는 2-3일을 앞당기거나 뒤로 미루었으며 드물게는 불의에 출발하군 하였다. 협조공문 발급을 위한 인적사항도 별도로 메일을 만들어서 전용으로 사용하는 메일을 통하여 암호화하여 설마 해킹을 당하는 경우에도 출발 날자와 시간, 방향을 알 수가 없게 하였다. 협조공문발급을 위한 인적사항도 출발하는 날 오전 11시경에 메일로 작성하여 보냈으며 은행에서 돈을 찾아서 준비하고 저녁시간에 순조롭게 룡정을 출발하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여 가는가 싶더니 림동으로 가는 버스가 퉁료를 조금 벗어나서 고장이 발생한 것이다. 버스 뒤쪽 기관실 뚜껑을 열고 스패너로 나사를 풀고 조이고 V형 벨트를 벗겼다 맞추는 것을 보아 열차시간을 맞출 것 같지 못하여 나는 은심에게 택시를 잡으라, 목적지는 개루이고 차비는 150원을 주겠다고 하라고 말하고 나도 택시를 잡기 위하여 길가로 나갔다. 내몽고 지역의 도시 외곽인지라 다니는 택시도 드물었고 혹시 빈 택시를 보면 개루로 가자고 하니 택시가사들이 아니 가겠단다. 퉁료에서 개루까지 택시비가120-130원인데 여기서 부터 개루까지 150원의 택시비면 섭섭하지 않은 금액인데 택시기사들은 가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차 시간을 놓칠 것 같아 조급한 마음으로 안절부절 부절 못하고 있는데 차수리가 완성됐단다. 차를 수리하느라 적어도 40분이상이 소요된 것 같았다. 조급한 우리들의 마음을 외면한 채 버스는 느릿느릿하게 비포장도로를 달린다. 나는 연속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차 시간을 맞출 수가 있겟나,? 조금만 빨리 달려 10-15분의 시간만 얻으면 열차는 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들이 탄 버스는 드디어 개루에 도착하였다. 나는 열차를 타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다음 열차시간을 확인하고 열차표를 끊기 위하여 영옥과 갈량이는 버스역 근방에서 기다리고 하고 나와 은심은 삼륜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은심은 청도에서 산 경험이 있어 중국어도 괜찮게 하였고 표정이 밝고 명랑하여 함께 다니기가 좋았다. 우리가 역 근처에 갔을 때는 이미 열차는 출발하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역전 안에 들어가 다음 열차시간을 알아보고 열차표를 끊은 다음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 왔다. 약속된 장소에서 갈량이와 영옥이가 초조한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반갑게 웃으면서 잘 됐는가고 물으면서 마주오고 있었다. 나와 은심이 한조, 영옥과 갈량이가 한조로 둘씩 짝을 지어 우리는 주변의 광장과 상업거리를 돌아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열차에서 먹을 샘물과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가지고 삼륜차로 역전을 향하여 떠났다. 역전에 도착하여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다른 때보다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였다. 출입문에서 손 짐을 검사하는 역무일군도 없고 대기실을 돌아다니는 경찰관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들은 개찰구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고 나는 영옥이에게 손 짐을 똑바로 건사하라고 말하고 있을 때 영옥이와 가까이 앉은 한 청년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였다. 나도 그를 쳐다보니 18세가 되나 마나 한 청년인데 잘 생긴 것이 한족 (중국의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같지는 않아보였다. 오늘은 역전 안에 사람이 적어 휑한 감을 준다. 얼마 후 우리가 개찰구를 벗어나 역전 홈으로 나가는데 몇 명의 차림새가 눈길을 끌었다. 대기실에서 보았던 잘 생긴 어린청년과 그 앞에 걷고 있는 뚱뚱한 여자는 바지가 무릎 위에 오는 것을 입고 있었는데 첫눈에도 다른 곳에서 온 사람 같았다. 그들과 조금 떨어져서 키가 작고 허약해 보이는 여자가 검은색 작은 배낭을 메고 뚱보 여인과 청년을 따라간다는 것을 첫눈에 알아 볼 수가 있었다. 그녀가 메고 있는 배낭은 연변에서 학생들이 메고 다니는 책가방 같아보였다. 내가 늘 이용하던 역전이라 열차가 설 위치 쪽으로 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청년과 뚱보가 우리 쪽을 살펴보더니 배낭을 멘 여자도 우리 쪽을 향하여 뒤돌아 보는 것이였다. 은심이와 영옥이가 '선생님. 저 사람들이 탈북자 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들은 분명히 탈북자들이 였다. 중국사람들은 자기와 관련 없는 일들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않고 관심이 없다. 그런데 저들은 행동거지도 이상한데 순번대로 우리 쪽을 뒤돌아 보는 것이다. 아마 잘 생긴 청년이 뚱보에게 우리가 조선말을 한다고 말했을 것이고 그의 눈에 우리들의 행동이 어데인가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우리가 열차에 올라 막 자리를 잡고 있는데 뒤쪽에서 차에 오르던 뚱보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픽 웃고는 돌아서서 일행을 뒤로 물러나게 한 다음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나는 순간적으로 저 여자가 2006년 12월25일에 이련호특에서 잠깐만나본적이 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들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나는 이제 열차에서 어느 경우에는 어떻게 하고 등 열차에서 조심해야 할 것 들을 일러주고 뚱보에게로 갔다. 뚱보네는 우리와 두 칸 건너 창문 쪽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모두들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엿보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내가 불쑥 나타나자 청년의 눈이 커다랗게 되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병색이 도는 여자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머리를 창가 쪽으로 돌리며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모른 체를 하고 있었다. 뚱보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 머리를 약간 숙여 인사를 하면서 웃는다. 나는 뚱보 옆에 있는 자리에 스스럼없이 앉아서 어떻게 되여 떠나는가? 이제 가다가 어느 차편을 이용하려고 하는가? 등을 물어 보았다. 뚱보는 열차가 아침에 도착하면 곧장 버스로 이련에 가겠다고 말하자 나는 그에게 만약에 버스로 들어가다가 일이 잘못될 수 있으니 반드시 차를 갈아타라고 말하여 주었다. 뚱보는 앞에 앉아 있는 탈북자들을 안정시키고 자기를 믿게 하려고 그랬는지 자기에게 사람들을 데려가도 좋다는 연변주 공안국장의 소개신이 있고 이련호특의 변방대대장이 자기 친구란다. 그래서 자기네는 가다가 단속 되여도 아무 일 없다고 큰소리 친다. 나는 탈북자들을 안정시키고 자기를 믿게 하려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뚱보가 얄미웠으며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따라나선 탈북자들이 가엾고 불쌍해 보이였다. 나는 뚱보에게 조심히 잘 하여 보라고 인사를 한 뒤 우리 일행들에게로 되돌아 왔다. 뚱보는 이련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단, 내가 그의 우두머리 되는 자에게 가르쳐준 것을 그대로 따르면서 돈을 절약하고 쉽게 해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일한 것이다. 뚱보에 대한 아니 좋은 소식을 들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엉터리 없는 거짓말로 큰 소리 치는 여자인줄을 몰랐었다. 내가 아침식사를 사다가 일행들에게 먹여야 하지 않는 가고 하니 자기네 일행은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한단다. 나만 혼자 열차 카운터에 가서 부탁을 하여 밥을 가져다 우리 일행들에 식사를 공급하였다. 왜서인지 뚱보를 만난 다음부터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기분이 아니 좋았다. 열차가 집녕에 도착하자 뚱보는 자기네 일행을 이끌고 버스 역으로 가고 나는 늘 이용하던 형제 컴퓨터 방으로 우리 일행들을 이끌고 갔다. 형제 컴퓨터 방은 내몽고 지역에서 보기 드물게 잘 꾸려져 있었고 이용하는 손님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컴퓨터 두개를 신청하여 컴퓨터 한 개에 두 명씩 앉아 컴퓨터를 이용하게 하였다. 10시까지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식사로 빵과 과자, 바나나, 음료만 조금 사가지고 버스에 오르면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말 한마디도 조심하여야 하고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버스에서는 목적지를 말하고 표를 사는 것은 내가 현지인들처럼 말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일행들에게 이제 부터는 특별히 조심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처럼 서로 도우며 잘 해보자고 이야기 하여 주었다.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달리고 달려 우리는 국경도시 이련호특에 까지 갈수가 있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이렇다 할 흠잡을 것이 없었는데 누군가 우리를 고발했단다. 우리를 아는 것은 뚱보여인이었으며 그만이 우리가 갈아 탈 열차와 시간을 알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2008년 5월 11일 유상준 자료제공 : 자유북한방송
신고 0명
게시물신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