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란 삶의 전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명이 발달 되지 않았을 때는 조가비, 짐승의 가죽, 보석, 옷감, 농산물 들이 돈의 가치로 활용되었다.
요즘은 금이나 은, 그리고 동 같은 금속으로도 돈의 가치를 인정해준다. 하지만 종이의 크기나 모양, 액수 등으로 만든 것을 돈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재산 축적의 대상으로도 사용되는 물건이 바로 돈이다. 어쨌건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은 누구나 필요하다.
그래서 돈의 위력은 대단하다.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6년 2월 16일은 북한의 최고 통치자인 김정일의 생일이다. 그날이 오면 경비가 여간 심한 것이 아니다.
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다시피 주민들의 충성심도 최고도에 올라있다. 하지만 세천동 5가두의 총 반장으로 사업하던 나의 통제가 강하지 못한 탓에 내가 사는 마을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 여파로 나는 주민들을 잘 관리하지 못한 죄로 평생 동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고 있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세천동 23반에 살고 있는 박영세씨의 집이다.
그날 나는 바삐 세대마다 2월 16일 명절공급표를 나누어 주며 온 동네를 돌아 다녔다.
해원이집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주춤 발걸음을 멈추었다. 원래부터 그 집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집이였다. 하지만 그날은 웬일인지 여러 컬래의 신발이 현관에 놓여 있었다.
내가 인기척을 내자 빠끔히 열린 방 문틈으로 담배 연기가 한꺼번에 새어나왔다. 연기가 가득차서 사람의 형체를 가려보기 힘 들 정도였다.
순간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고 있던 나는 명절공급표를 건네주고는 곧바로 그 집을 나와 다음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결국 그날이 불씨가 되고야 말았다. 그날 집에서 역적모의를 하던 해원이 아버지가 중국으로 야반도주를 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탈북이 아니라 망명이 유행되고 있던 때여서 문제가 더 엄중한 때였다.
동네사람 그 누구도 모든 것이 부족하지 않는 해원이 아빠가 중국으로 도망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그 문제로 안전부와 보위부에서 나에게 호출이 떨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일단은 가볼 수밖에 없었다. 가면서도 나는 혹시 해원이 집에 모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궁리를 하면서 보위부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설마가 끝내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던 것이다.
중국으로 건너간 해원이 아빠가 같이 갔던 사람들과 같이 중국 공안에 잡혔는데 그만 해원이 아빠만 자살을 했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국경인 개산툰으로 건너간 그들은 연길시내까지 들어가려면 택시로 한 시간 넘게 가야 했는데 그들이 택시 기사에게 자기들을 미국대사관으로 데려다 달라고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사실 미국대사관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허술한 차림으로 봐서는 북한 사람들 같은데 감히 미국대사관으로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불행을 자초 한 것이었다.
북한 탈북자에 대한 경각성이 높았던 택시 기사가 그들을 태우고 직접 공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해원이 아빠 일행은 공안국에서 문초를 받고 연길 감옥에 감금 되었다.
북한으로 후송되면 개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해원이 아빠가 감옥에서 내어준 이불의 솜을 마구 뜯어 자기 목에 쑤셔 넣고 숨구멍을 막아 자살을 한 것이었다.
그러자 외국인 대우를 한다고 하면서 중국 측에서는 박영세씨의 시체를 차에 싣고 회령교두를 통하여 북한으로 내보내 주었다.
하루아침에 하늘같은 남편과 이 세상에 한분밖에 없는 아빠를 나라의 반역자로 잃은 해원이 집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현실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박영세씨의 시체를 넘겨받으러 가는 안전부와 보위부 담당관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덜그렁 덜그렁 소리 내며 굴러가는 소달구지만이 아츠러운 소리를 질러댔다.
회령교두에서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박영세씨의 시체를 넘겨받자마자 소달구지에 가마니짝을 깔고 눕혀 놓고는 그대로 둘둘 말아 싣고 가서 석탄 기관차의 재를 털어버리는 회령시의 철도역에 그대로 던져 버리고 석탄재로 묻어 버였다.
죽어서도 최고의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박영세씨는 그렇게 반역자의 꼬리표를 달고 한 많은 죽음을 당하였다.
하지만 일의 발단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딱 1년후인 2월 14일이였다.
일이 안될 때라 그 집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인 해원이가 친구들에 의하여 사살 당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그날도 역시 명절공급표를 나누어주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였다.
나의 큰 딸의 말에 의하면 해원이 오빠가 다른 오빠들과 함께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딸아이의 말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가서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아마 우리 딸이 잘못 보았나 생각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애아빠가 퇴근하여 집으로 들어온 것은 새벽 한시 경이였다.
남편의 밥상을 차려주고 이부자리를 펴주려고 윗방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밖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 왔다. 낌새가 하도 이상하여 바깥으로 나가보니 해원이네 집이 불에 타고 있었다.
그 옆집들에도 불씨가 튀여 불기둥이 솟고 있었다. 탄광 마을이다 보니 집을 모두 문화주택처럼 길게 지었기 때문에 한 줄에 5~6세대씩 살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난 불은 해원이 집만이 아닌 다른 집들에까지 사정없이 번져갔던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앞뒤를 가릴 새도 없이 무작정 방방 뛰며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불이야 불 불”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한참 단잠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잠옷차림으로 뛰어나왔다가 자기 집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울고불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집으로 다시 들어가 아무 것이라도 건지겠다며 악을 썼다.
나의 연락을 받고 안전부와 보위부 그리고 노동적위대와 교도대사람 들이 달려왔다.
하지만 해원이 집은 다 타서 한쪽 기둥이 내려앉았다.
나는 불길을 피해 아직 타다만 해원이 집의 문을 열어보았지만 원래 집의 잠금장치가 잘되어 있던 그 집의 문을 좀처럼 열수가 없었고 불길은 점점 퍼져만 갔다.
창문의 칸막이 창을 억지로 뜯어내고 문을 열어 제치는 순간 구들에 새파란 불길이 번져가는 속에 해원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무작정 내가 뛰어 들어가 해원이를 구해야 한다고 하자 다른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마구 잡아끌었다.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집이 무너졌고 해원이의 시체도 형체도 없이 잿더미 속에 묻어버렸다.
밤새도록 사람 타는 누린내가 온 마을을 진동시켰다.
한참 아까운 나이의 해원이가 원인도 모른 채 불에 타서 죽는 것을 보고 온 동네 사람들은 자기 자식 같은 심정에 온 가슴을 쓸어 내렸다.
추운 겨울에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잠옷차림으로 떨거지가 된 마을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원망스러워 피눈물을 흘렸다.
나는 집이 불에 탄 사람들을 이웃집에서 함께 지내게 배치를 하여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나 큰 충격에 잠도 오지 않아 뜬 눈으로 온밤을 밝힌 나는 날이 밝자 마자 다시 해원이 집으로 갔다.
불에 타서 흔적만 남은 집에서 시체라도 찾겠다며 달려온 예비군들이 죽은 해원이의 뼈마디를 찾고 있었다.
불에 타고 끄슬러서 회색스레한 뼈마디를 하나하나 주어내며 사람의 모형을 보면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여러 개의 뼈는 찾았지만 끝내 오른쪽 팔목과 오른쪽 발목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그로부터 몇 일후 해원이를 살해한 일당을 잡았다.
그들의 진상에 따르면 배가 너무 고픈데 먹을 것도 없고 돈도 없고 해서 자기들보다 생활형편이 나은 해원이 집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왜냐면 그 집에 "딸라 돈"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해원이도 죽일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후환이 두려워서 불을 지르고 돈을 훔쳐 갔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금수만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개는 돈을 주면 먹지 않는다. 개도 안 먹는 돈을 사람은 일평생 살아가면서 생명보다 더 귀중히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돈은 없다가도 다시 생기고 생겼다가도 없어지는 것이 돈이니 너무 돈에 집착을 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험난한 인생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오직 한 글자 밖에 안 되는 그 돈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내가 안전부와 보위부를 개처럼 끌려 다니면서 비판서를 써야하고 대중들의 비판무대에 올라가서 투쟁의 대상이 되여야 하고 오늘날 바람처럼 여기저기 떠돌며 사랑하는 두 딸과 부모형제와 갈라져 생이별을 당하고 여기 저기 떠돌며 대한민국에 오게 된 계기는 바로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북한에서 제일 경사스러운 정치적인 명절에 그것도 한 번도 아닌 2년 연속 두 차례에 걸쳐 내가 사는 세천동 5가두에서 이런 일이 초래 되였으니 말이다.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는 오늘 이전의 일은 파란 만장과 우여곡절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있고 모든 것이 자유로운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나는 항상 생각한다. 내가 살던 시절의 북한 땅에서 오늘은 또 어떤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이 나와 같은 애매한 사실에 매달려 모든 제제를 받고 살아가고 있을지 말이다.
하루빨리 남과 북이 통일되고 다 함께 모여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날을 그려보며 내가 사는 이 세상 대한민국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 하면서 지금 배우고 있는 학업에 모든 정열을 쏟아 붇고 있다 북한의 독재 정권이 하루빨리 무너져 버리고 모든 인민들이 잘살게 되는 그날까지 화이팅 할 것이다.
2011년 5월 김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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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사람 이민복 통일한반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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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3-03-05 08:46:53
여기 미친놈 하나 추가요
한국에 잘 정착하셔서 꿈꾸는 일이 잘 되길 바라고 행복하시길...
여기 이상한 글 남기는 사람들 댓글 신경쓰지마세요.
참으로 비통하고 애잔하네요.
여기 한국에서 못다한 공부하셔서 더욱 힘내시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