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꿔준 극과 극의 두 사회 - 박명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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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초.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어느덧 만물의 새싹이 움트는 이른 봄 어느 날, 사람들이 분주히 붐비는 작은 시장 통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핼쑥한 얼굴의 18살 처녀애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애걸의 시선을 보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쳐본다. “떡 사세요, 떡이요. 쫄깃쫄깃하고 맛있는 떡이요” 엄마는 언니가 보내준 3kg도 채 안 되는 횐 쌀을 깡그리 털어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것으로 떡을 만드셨고 몸이 안 좋은 엄마를 대신하여 나는 장마당 한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몇 년 째 계속되는 ‘고난의 행군’이 가져다 준 불행은 모든 사람들에게 굶주림과 함께 삶의 희망마저 빼앗아 갔다.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커다란 포부를 안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장래의 희망을 꿈꾸던 나는 모든 것이 변해버린 지금의 현실을 한탄하며 배움의 꿈을 포기하고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시장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기름이 반지르르하게 도는 떡을 바라보는 나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는 사이 군침이 맴돌았지만 그 떡에는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떡 한 개를 팔아 얻은 수익은 겨우 50전, 그 떡을 다 팔아야 국수 반 사리, 또는 밀가루 500g을 사가지고 들어가 죽이라도 써서 가족의 끼니를 에울 수 있었다. 학교 동창이나 아는 사람의 시선을 피해 시장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나는 구루마를 끌고 여기저기 다니며 작은 통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팔고 있는 한 여인과 눈이 부딪쳤다. 그는 다름 아닌 중학시절 담임선생님이었고 교단이 아닌 시장을 누비며 1원짜리 얼음과자를 팔고계시는 그의 모습에는 그 옛날의 카리스마가 넘치고 다정하신 스승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는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에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60세이 넘으신 아버지는 영양실조로 누워계셨고 안 좋은 몸으로 밤낮 따로 없이 고생하시는 엄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어 나는 대학의 꿈을 접고 장사의 길에 나섰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아버지의 생신이지만 멀건 죽 세끼도 먹기 힘든 가정형편을 너무나도 잘 아는 나는 입던 운동복을 엄마 몰래 시장에 들고 나가 판 돈 으로 흰 쌀밥 한 그릇과 두부 한 모를 사드렸다. 부잣집 자식이나 간부 집 자식들이 매일 먹는 그 한 끼 식사, 하지만 오랜만에 막내가 차려준 평범한 생일상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가에는 딸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서러움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 해 영양실조로 몸조차 가누지 못하시던 아버지는 한 많은 세상을 한탄하시면서 조용히 눈을 감으셨고 그 충격에 앓던 엄마마저 하늘나라로 가셨다. 배움의 꿈을 접고 학교동창들과 아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장마당에서 생계유지에 나섰던 나는 이 세상에 단 혼자뿐인 불우한 인생을 한탄하며 아무런 삶의 희망도 미련도 없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대신 평생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아픈 상처만 남긴 채 나는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중국 공안당국은 북한정권과 협력하여 탈북자 색출에 나섰고 그것이 두려워 신분을 숨긴 채 여기 저기 떠돌이 생활을 하던 나는 세계 여러 나라 정보를 접하게 되었고 대한민국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북한의 독제정권의 발판아래 속으며 살아온 그 세월. 나 혼자뿐이 아닌 북한 인민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북한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 대하여 알 수 없었고 대한민국에 대하여서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나는 위험을 무릎 쓰고 8년간의 기나긴 이국땅에서의 고생 끝에 꿈에도 그리던 자유의 땅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내가 알고 있었던 한국은 사람 못살 사회였지만 내가 보고 느낀 한국은 그야말로 지상천국이었다. 혈육 하나 없는 나를 처음으로 맞이해주신 분은 다름 아닌 담당형사님이었고 그 분을 비롯하여 수많은 분들이 한국정착의 첫 걸음을 내딛는 나를 도와주셨다. 맑은 햇살이 밝게 비치는 아담한 집에서 하루 세끼 흰쌀밥에 먹고 싶은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자신의 꿈과 희망을 마음껏 펼쳐 갈 수 있는 사회, 여기가 바로 내가 태여 난 제2의 고향이다. 내가 선택한 길, 내가 택한 대한민국, 나는 지금 여기서 너무 너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여기서는 누구나 평범하게 접할 수 있는 한 끼 식사, 하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던 그 시절의 북한에서는 그 한 끼 식사를 마련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품을 팔아야 했고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을 버리고 이국땅에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길거리에 하나둘 늘어나는 꽃제비들, 시장의 음식 매대 앞에서 손님들이 먹다 남은 국물이라도 얻어먹기 위해 “제발 국물만이라도 남겨 주세요” 속으로 몇 백번 외쳐보는 듯한 10대 이하의 어린이들, 점점 형태 없는 벌거숭이로 변해가는 산과 들... 그러나 더 가슴 아픈 현실은 10여년이 지난 오늘도 북한 땅은 아직도 변함없이 독재정권의 통치하에 무고한 인민들은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과 관련된 가슴 아픈 소식들은 접할 때마다 한 하늘 아래에서 어떻게 이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의 비극을 하루빨리 없애고 북한 땅에 사는 우리 부모형제들도 빼앗겼던 꿈과 희망을 되찾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11년 5월 박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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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2013-03-05 08:48:12
지금도 그들은 안보문제보다..
복지타령에 여념이 없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차별하고 또 자기 자식이 불구자라 해도 차별하는 부모가 어디 있더냐. 또한 어느 부모가 시집간 딸이 당장 먹을것이 없어 친정집에 먹을것을 얻으려 왔을때 그저 맨손으로 돌려보낸 부모가 어디 있더냐. 하다 못해 끓는 죽에 맹물이라도 한사발 더무어 량을 불구어 먹이고 보낸 부모는 이세상 부모들의 모성애다.
허나 닉 허웅도 야 탈북은 하지 말라고. 탈북하는 자체가 (90%)가 그렇게 잘산다고 하는 대한민국에 입국하기 위해서다. 너 같은 쓰레기들의 법에는 북한도 대한민국이라고 줴치고 있지 않느냐. 근데 뭐 탈북하지 말라고. 그럼 아예 북한도 대한민국 국민 이라고 씨벌 되지 말아라. 아직도 너네 좃국 법에는 잉크가 마르지 않았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지워버려라. 책임도 못지는 병신같은 법 . 친정집에 죽이라도 먹으려 오는 자식들 받아 들이지도 못하는 인간들. 다 너같은 ㅇ인간 종말들이 정치를 하기때문에 우리 불쌍한 탈북자들이 고생하는기야. 탈북자들을 위해서 하겟으면 제대로 하여라 쓰레기들이 자기 더러운 이름이나 내색할려고 지랄하지 말고. 흥흥 ( 이제 탈북은 그.만 하세요 ) 하기사 우리 탈북자들이 그 더러운 나라는 왜 가는지 몰라. 다른 나라도 잘살고 잘 대해주고 모든것 보장해주는데 . 생색하지도 않고. 의무감으로, 더러운 좃국 쓰레기. 그래서 내가 좆국이라고 하는거야.
아주 욕을 싸질러 놨구나-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