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광장

토론게시판

상세
김옥균 남쪽에서 어떻게 보는지요?
Korea, Republic o gkrtkeo 0 518 2010-03-15 07:44:51
3일천하 실패후 일본으로망명하여 암살
그가 개화를 위해 일본을 등에 업은건 당시로서는 현명한일
그는 선각자 로평가하고잇다 북한에서는

한국은 지금 북한의 1945 년 정치상황이다
친일파라는 소리는 북에서는 아득한 옛말 여기서는 지금까지 친일파 타령
일제식민지인가 일본을 이용하여 백년도 넘게걸려야할 산업혁명의 토대를 36 년동안 이룬 기적의 창조자들이 친일파이다 그들의 스승은 김옥균이고

일본은 건국의 도움을 준 백제의 빚을 한국산업화의 초석으로 갚은것 뿐이다
이걸 뭐 딱 일제강점기라고 일제식민지라고 구차하게 표현하는가

언제 전쟁이라도 햇단말이냐 하여 우리가 패하기라도 햇단 말인가

일본을 이용하여 산업화를 이루었다 >
일제 식민지 시절이였다.... .... > 어느게 더 자랑스러운가 어느것이 더 망신스러운가

당시 친일파 친러파 친청파 (친미는 극소수) 쇠국파 들중 친일파들이 가장 현실적이며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파였다는것을 지금의 한국이 말해주고있다
좋아하는 회원 : 0

좋아요
신고 0  게시물신고
  • 길위 2010-03-15 08:16:54
    김옥균 뿐만 아니라 친일파라 불린 자들 대부분이 개방을 통해 어떻게 민족을 살려 보자고 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다만 그 의도들이 힘의 과중한 불균형으로 인해 일본에 이용 당하고 말았으니 욕먹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고 그들도 무덤에서라도 수긍할 겁니다.

    개방을 하기엔 이미 때가 늦었었다고 봅니다.
    좀 힘이 있을 때 적극적 개방을 했다면 그런 수모는 없었을 것 같은데 그래서 민족의 비극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가 너무 변화에 소극적인 것으로 부터 파생된 어쩔 수없는 결과라 봅니다.
    개정일이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어 보이고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김옥균 2010-03-15 09:09:17
    김옥균운 지금으로 말하면 이명박이나 마찬가지 생각을 했다고 볼수 있죠
    현대는 외국과의 글버벌 네트웍시대라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는 그것을 합리화 한다는 것이 힘든 상황에서 그 시기에 김옥균처럼 개화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이 당연히 짓밟힐수 밖애 없었습니다. 김옥균의 개화 사상은 진취적이고 옳바른 것이 었지만 그것을 짓밟은 봉건제도와 그것을 이용해서 꽤한 일본의 황국식민화가 나쁜 것이 다고 볼수가 있죠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매드포갈릭 2010-03-15 13:33:42
    당시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들의 의도야 방향을 정확히 짚었다고 평가를 하지요. 단지, 이들은 조선의 개화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겠지만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개화파를 이용하려 했겠지요.
    1880년대는 이미 국운이 너무나도 기운 시기였기 때문에 개화파의 집권이 오래 갔다고 하더라도 일본의 식민지배를 견제할 만한 역량을 축적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결국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의 힘이 있을 때나 그게 가능한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남에게 이용만 당하게 되어 있다는 거지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학사대 2010-03-15 15:00:51
    이용당하면서도 할건해야하지않을가요 이용할 가치도 없어지는것보다야 ... 그당시는 친일이 정답이라 생각합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매드포갈릭 2010-03-15 19:22:19
    맞습니다. 이용당하면서도 우리도 이용할 것이 있으면 이용하는게 맞지요.
    단지 자기 것을 지킬 정도의 역량이 되지 않는다면 처음 의도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역량이 최소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만 되었어도 그 당시 친일이 대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 봅니다. 아니, 우리가 좀 더 역량이 있고 세계에 일찍 눈을 떴다면 일본처럼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과 직접 손을 잡을 수도 있었겠지요.

    일본도 미국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 이후 지속적인 친미, 친영 정책을 폈지만 스스로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이 되었길래 성공적인 근대 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시 중국이나 동남아 꼴이 났겠지요.

    조선의 실패는 1700년대 후반 정조대왕이 죽은 후 약 60년에 걸친 세도정치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개항의 시기도 중요하지만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산업화를 이룰만한 기반이 필요한데 이 시기의 세도정치로 인해 모든 기반이 파괴됩니다.

    이에 반해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아래에서도 상인들이 지속적으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고 지방 영주들도 나름 세력확장에 힘을 쏟아 이 시기에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를 아우르는 현재 일본의 영역을 확립해 갑니다.

    만약 조선에서 정조대왕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오키나와와 홋카이도가 조선에 의해 개척되고, 영일동맹이 아니라 조영동맹이 체결되어 조러 전쟁에서 러시아를 패퇴시킬 수도 있었겠지요.
    암살로 추정되는 정조대왕의 죽음 이후로 조선은 스스로를 지킬 역량을 상실해 간 겁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노란우산 2010-03-15 15:59:08
    김옥균의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댓글을 다신 길위님,매드포갈릭님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논제를 제시하신 영어아이디님의 의견에서 '친일파가 일제시대때 일본을 이용해서 한국산업화를 이루었다'라는 의견에는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북한쪽은 모르겠지만,남한쪽에는 일제시대나 해방직후 이렇다할 공업,산업시설이 존재하지 않았읍니다.

    그나마,6.25때 대부분 전소돼었구요. 아시다시피,해방직후 한반도에는 우리민족의 의사와 관계없이 두개의 정권이 수립돼었고,그나마 식민지하에서 지식인으로 분류돼는 사람들 중 많은이는 북한으로 갔었어요.

    대한민국이 공식출범하고난 직후 전문대학이상의 학력을 가진사람은 국내에 2000명이 체 돼지않았읍니다.그나마,당장 필요한 공업과 과학분야의 전문인력은 전무 하다 싶이했고요.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우리가 만약 일제에 의해 식민지 백성이 돼지않고,당시 태국과 같이 어떻게 해서라도 나라의 독립을 유지했더라면,그 나라가 아무리 다 떨어진 너절한 국가였더라도 36년동안 전문대학이상의 인재 2000명 정도도 못 길러냈겠읍니까?

    실지로,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산업,공업시설과 그것을 운영할 수있는 전문인력은 6.25전쟁이후 한국에 파견됀 미군의 기술인력과 제한적인 미국 민간단체의 원조와 교류, 60년대 중반 한.일국교 수립이후 도입됀 일본의 자본과 기술,설비등이 외부적 요소였고...

    내부적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자식교육을 위해서라면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전답이나,가족처럼 애지중지 기르던 송아지도 내다파는것도 서슴치 않았던 사회적 분위기와 다른나라의 원조로 빌어먹는 처지에서도 나름데로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혹은 그럴수 밖에 없었던) 정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일본제국주의자들 혹은 거기에 협조한 자들이 지금의 한국산업.공업화에 근간이 됐다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근대적 산업화의 근간인 철강과 석유화학시설은 물론이거니와 비료공장,설탕,제분공장,방직공장등이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갖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만들어졌느데...그게 다 일본제국주의자나 친일파 덕분이라?ㅎㅎㅎ

    일제시대 쓰던 시설물이 북한에는 남아있는지 모르겠고,그게 북한에서는 그나마 친일파덕으로 알고있는지는 모르겠지만...한국의 산업발전역사는 전혀 그런것과 관련이 없읍니다.

    포항제철 건설을 진두지휘한 박태준씨가 일제시대 와세다 공학부 출신이기는 하지만,그 건설자금과 운영인력은 일제시대 친일파에 의해서가 아니라,70년대에 스스로의 노력과 합리적인 댓가를 치루고 기술을 도입해서 만들고 운영돼 왔읍니다.

    삼성또한 6.25전쟁직후 유럽과 미국쪽에서 기술과 설비를 들여와 방직,제분,제당사업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전자산업에 눈을 돌려서 많은 비용을 들여서 기술을 사오고,필요한 인력을 길러냈어요.

    현대가의 주력사업인 건설,조선,자동차 이것도 일제시대 친일파랑은 전혀 상관이 없죠. 창업주 스스로가 일제시대때 받은 교육이라곤 초등학교교육이 전부였는데...

    이와같이 한국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기업들은 일제시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어린시절 식민지백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재능을 강제로 억눌러지게해서,그때 받은 설움때문에,이후 한국이 본격적인 산업화,공업화의 길을 걸을때 당시 한국인들의 자기발전 욕망을 폭발시켰던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일본제국주의자들이나 친일파들이 한국산업화에 한 공헌이라면 공헌이겠지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 표현자유 2010-03-16 01:05:55
    김옥균이 선각자인 것만은 분명합니다...그러나 개화와 개혁을 외세에 의존해서 하자고 한 것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안으로는 무능과 부패로 일관한 기득권 양반세력들을 개력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고, 밖으로는 외세를 막아내면서도 개화를 해야하는 이중적인 과제를 안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대원군은 국내 정치의 개혁에 앞장서 있었고, 개화파들은 국내 개혁보다는 외세에 기반한 개방과 개화를 추구하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국내 정치를 개혁함에 있어서는 대원군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그런데 안타깝게도 민비를 위시한 수구세력들에 의해서 그의 개혁이 좌절됨으로써, 조선은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생력이 없는 상태에서, 외세에 기반한 개화의 추구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앞당길 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식민지 시절에 상당한 산업기반이 형성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켤코 고마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노예에게 좋은 옷을 입혔다고 해서 노예라는 신분이 덜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더샌드맨 2010-03-16 01:08:12
    저 역시 위의 노란우산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친일파가 일제시대때 일본을 이용해서 한국산업화를 이루었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위의 노란우산님과 같은 의견을 갖습니다. 이런 주장은 현재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주장하고 있는 전형적인 '식민지 근대화론'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사실이 아닐 뿐더러 그 의도가 매우 불쾌한 논리입니다만, 불행하게도 현재 일부 보수를 자칭하는 이들이 이 논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 참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세계 어느나라 우익이 인접국 - 더구나 불행한 과거를 가졌던 - 의 극우들과 똑같은 근거와 논리를 갖고 주장을 한다는 말입니까. 상식적으로 볼 때도 전혀 있을 수 없는 상황이죠.

    그러한 엉뚱한 논리를 펴는 일부 보수나 우익 때문에 전체가 매도되는 현상이 벌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 산구 2010-03-16 06:06:15
    경제발전은 눈에 보이는 공장이나 산업시설을 지어준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국가체제에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이 발전할 수 없는 것은 한사람의 지혜로 나라를 이끌어가는데 반해 남한은 국민모두의 발언권으로 지혜를 모아 이끌어가는 것이 가능한 사회이기 때문인것 같습니다.(나라를 파괴하려는 좌익은 제외.)

    일제가 산업기반을 닦아 준 것은 북한이었지 남한은 아니었음에도 남한은 이승만이 정착시킨 자유체제가 갖자 사람들의 능력을 최대한 이글어 냄으로써 자기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애국이 되어 국가가 부흥케 된것 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일제가 없었다면 나중에 시민들이 깨우친후 전제 왕실과 시민사회사이의 동란이 있어야 지금같은 자유평등 민주의 체제가 형성될 수 있었을텐데 그런 동란을 생략해 주었다는 장점이 있는것 같습니다.

    일본에 다스림 받는 다는 꺽여진 민족적 자존심으로 속이 메스꺼웠던 것이 사실이었을텐데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산구 2010-03-16 20:15:03
    다만 1880년대의 입헌군주제의 친일파가 전제 왕조세력의 무개념 친러파 친청파보다 개념이 있었다는 것이죠!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흠흠흠 2010-03-16 19:23:43
    그 당시의 정세는 한국을 러시아가 먹느냐, 중국이 먹느냐, 일본이 먹느냐하는 초읽기 싸움이었기 때문에 개화파가 옳으냐, 척사파가 옳으냐 하는것도 큰 의미가 없었다고 봅니다.

    외세의 힘을 빌린 개화도 이미 너무 늦었고 (할려면 17세기 정도에 했어야), 아무것도 안하고 독자적인 힘으로 지키는건 더 늦었을 겁니다.
    그나마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이겨 러시아에 편입 안된것이나마 다행이라고 봅니다. 러시아에 편입되었다면 최근쯤에야 독립했겠지요.

    김옥균,박영효 등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친일적 입장을 취한 것은 아시아에서 일본이 유일한 성공모델이었다는 점과, 냉전시대나 지금이나 우리나라가 친미적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는 현실과 비추어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친일이라는 말만 나오면 모든것이 비이성적으로 덮여 버리는게 있기 때문에 뭐라 말할순 없지만, 개화의 의도는 높게 평가받아야 할거 같네요.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댓글입력
로그인   회원가입
이전글
아래 논제 769~771에 대한 저의 반론
다음글
세상에서 가장 극심한 북한의 빈부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