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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국경을 넘을 때 심정 수기 전
Korea, Republic o 민복 0 549 2012-02-23 23:40:58

나는 한국에서 홀로 힘들 때마다 긴장과 공포로 숨 가빴던 탈북 순간들을 생각해보곤 한다. 국적을 버릴 자유까지 허용돼 있는 자유민주주의 사고로는 탈북이란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결단인지 가늠조차 힘들 것이다. 자기는 이미 목숨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탈출할 수 없는 것이 북한 땅이다. 때문에 탈북, 그것은 체제의 탈출만이 아니라 목숨의 탈출이기도 하다. 남한의 젊은이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목숨 걸고 왔지만 당신들은 이 땅에서 공짜로 태어났음을, 조국이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죽어서도 묻히고 싶은 곳이라는 것을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      장진성

 

내가 친구와 함께 국경연선 무산 역에 도착한 날은 2004년 1월 25일 아침 6시 경이었다. 원래 정상 도착 시간은 1월 22일 오후 7시 15분이다. 3일이나 늦은 셈인 것이다. 그러나 그 3일 연착도 열차 안의 모든 여객들은 희한한 일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산이 너무 많아 개발 엄두도 못내는 북한의 반 이상 지역은 지금도 일제 때 놓았던 단선 레일을 그대로 쓰고 있다. 견인기 부족과 고장은 문제도 아니다. 정전까지 잦아 평양에서 무산까지 하루 급행 길이 이렇게 3일이나 늦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북방 특유의 사투리로 전번 달 여행은 열흘 넘게 걸렸다는 누군가의 욕질이 들리자 나와 친구는 마주보며 피씩 웃었다. 이게 정상 국가이냐? 하는 무언의 대화였다.

 

 

함북도의 1월이라면 오줌 쌀 때 얼어서 떨어진다고 할 만큼 매우 춥다. 실제로 기차에서 내린 평양내기 우리는 확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지방의 기운이 이런 것인가 싶어 잠시 벙벙해 있었다. 날씨부터 사나워선지 기차표와 국경통행증을 보여야 통과할 수 있는 역 검문소로 다가갈 땐 나와 친구는 바짝 긴장하기까지 했다. 북한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이 작은 시골 역에도 어김없이 인간의 등급을 정하는 줄이 있었다. 수령 신격화로 김씨 일가가 나라의 첫 번째인 북한에는 특권층, 권력층의 순서대로 인격이 줄을 서는 나라이다. 그 사람의 순서는 지위와 계층의 신분으로 정해지는데 배급과 우대공급이란 특혜질서에 합법적으로 반영돼 있다. 그래서 북한의 모든 역전들이 그러하듯 무장한 보안원과 군인들이 지켜선 이 무산역 출구에도 간부 줄, 군인 줄, 일반 주민 줄, 이렇게 세 개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불과 세 명뿐인 텅 빈 간부 줄로 갔다. 그 이유는 상급침대 대상자였기 때문이다. 역전 출구의 인간 줄처럼 기차표에도 등급이 있다. 전국 역전의 매표소들에선 기차표를 살 땐 반드시 기관명과 직함이 적힌 신분증도 함께 제시해야만 한다. 그 신분 등급에 따라 기차표를 팔아주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북한의 여객열차들엔 상급침대, 상급객실, 일반객실이 분류돼 있다. 중앙당 신분증을 가진 우리에겐 그 특혜를 누릴 권한이 당당했던 것이다. 길게 늘어진 다른 줄과 달리 적은 인원에 대한 검열이어선지 보안원들은 우리 앞의 세 명 통행증을 꼼꼼히도 체크하고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조금 거만한 얼굴로 가죽케이스에 조선노동당 당 마크가 금박으로 새겨진 신분증부터 건넸다. 그 당 마크는 북한 최고의 권력기관인 중앙당 신분을 의미한다. 때문에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보안원은 30살에 불과한 나에게 일단 황급히 거수경례를 했다. “국경통행증을 보여주십시오.” 말의 예의도 깍듯이 갖추었다. 나는 국경지역 허가를 뜻하는 빨간 두 줄이 가로 지른 신분증 크기의 국경통행증을 품속에서 꺼냈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그 보안원의 허리에 매달린 권총케이스를 보며 저 안에 실탄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어 머리를 쳐든 대위 계급의 보안원은 처음부터 다시 확인하려는 듯 신분증 사진과 내 얼굴을 연신 번갈아 보았다. 마치도 국경통행증은 통행증일 뿐, 심장에서 쿵 쿵 뛰는 감춰진 나의 탈북 본심을 엿보기라도 한 듯 말이다. 그렇게 나와 친구는 5분 정도 검열을 받고서야 무산역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우리는 안도할 새도 없이 곧바로 중국과 북한을 양옆에 끼고 있는 두만강 쪽으로 갔다. 물론 도중에 지나치던 어떤 주민에게 두만강 방향을 물어가며 말이다. 나와 친구의 초기 탈북계획은 이러했다. 먼저 두만강을 찾아 맞춤한 탈북 장소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 옆의 산 속 수림에 숨어 있다가 순찰하는 국경 경비대원들이 지나가고 나면 얼어붙은 두만강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강변에 도착하고 보니 우리가 철없이 순진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국경 경계는 그 다음 걱정이었다. 일단 산은 높은데 몸을 숨길 나무가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다. 먹을 게 없어 사람들이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땔감으로 삭정이까지 샅샅이 주어간 탓에 산도 가난에 헐벗은 것이다. 국경사정을 전혀 모르는 평양내기 우리는 신분증의 특권만 믿고 국경의 공포는 계산할 줄 몰랐다. 그래서 친구와 나는 일단 강을 따라 가노라면 단 한 곳이라도 울창한 수림이 나오겠지, 하는 희망으로 무작정 걸었다. 도중에 국경경비대원들과 현지 주민들로 구성된 규찰대와도 몇 번 마주쳤다. 우리는 그때마다 신분증과 국경통행증으로 자기들의 존재를 과시했고, 어디로 가는 길인가고 꼬치꼬치 따져 묻는 귀찮은 군인들에겐 담배를 줘서 시간을 단축했다. 평양 밖을 벗어나 본적이 별루 없는 나와 친구는 수 천리 떨어진 국경지역에선 정말 거의 눈 뜬 소경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두만강연선을 따라 온종일 걸은 길이 백리쯤은 되는 것 같다. 밤 열시 경, 한치 앞도 헤아리지 못할 캄캄칠야는 우리를 더 이상 비겁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하여 겁도 없이 고요한 강기슭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는데 “손 들엇!”하며 풀숲에서 병사가 불쑥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때 반사적으로 내 팔을 꽉 잡는 친구의 손이 나를 더 전율케 했다. 때려눕힐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 그 병사가 이번엔 호각을 불었다. 그러자 의외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여럿의 손전등들이 켜지며 우릴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우리는 총구들에 떠밀려 국경경비총국 6중대 병실에 들어섰다. 내 눈에 제일 먼저 보였던 것은 쇠살창으로 가려진 작은 감옥과 매달린 수갑들이었다.

“어떻게 이 밤에 국경으로 접근하신겁니까? 신분증과 통행증을 봅시다.”

 

북한 특권층의 아들이었던 친구는 생전 처음 당해보는 총구 앞에서 누가 봐도 탈북 용의자로 확신할 만큼 온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우선 이 친구가 너무 추워하니깐 몸 좀 녹이게 해주시오”

그러면서 나는 신분증을 꺼내려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쿵쿵 뛰는 심장이 만져졌다. 그 손이 더 떨렸던 이유는 바로 그 품속에 절대로 발각 되선 안 될 물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길을 떠날 때 고이 간수했던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원본이었다. 북한의 대량아사 현장을 그대로 시에 담은 그 작은 노트 안의 내용들은 누가 봐도 반체제 선전물이었던 것이다. 만약 불법 도강자로 확인되어 군인들에게 몸수색을 당할 경우 그 하나의 증거만으로도 즉석 체포는 불 보듯 뻔했다. 창백해진 나의 손에서 당 마크가 새겨진 나의 신분증을 받아 쥔 중대장은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국경 연선에서 오랜 중대장 경험을 가진 그 군관도 아마 당 마크와 빨간 색깔의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도장이 박힌 신분증을 처음 보는 듯싶었다. 북한의 최고위 신분증은 금박으로 당 마크가 새겨진 당 신분증과 국장이 새겨진 내각 신분증이 있다. 그 중에서도 당 마크는 북한의 절대권력 기관인 조선노동당 신분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총구도 공손해지기 마련이다. 더욱이 당 대남공작부서인 통일전선사업부란 파란 기관도장이 발산하는 특수성은 적화통일의 무기를 쥔 병사들에겐 신비감을 조성한다.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왜 국경에 접근했습니까?”

중대장은 신분증의 무게와 달리 너무 어려보이는 내 나이를 의심하는지 아래위를 흩어보았다. 마치 그 시선은 당신 몸 어딘가에 있어선 안 될 물건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대놓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나는 널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대답했다.

 

“무산 시당에 간부사업(인사업무) 가던 중 너무 밤이 깊었고 춥기도 해서 군인병실이라도 찾아서 하루 밤 자고 가려했을 뿐인데”

“아닙니다, 강에 발을 짚었습니다!”

우리를 단속했던 그 재수 없는 병사가 막 소리 질렀다.

나는 이럴 땐 무엇보다 배짱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멍청한 놈! 너 어디 감히 총을 들이대고 그래? 아까 널 한 대 쥐어박으려다 참았어!”

중대장이 내 욕질이 끝나기도 전에 짧게 지시했다.

“무산 시당에 전화해봐, 통전부에서 간부사업 약속 있었는지”

나는 온 몸이 무너져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난로 앞에서 손을 비비고 있던 친구도 나를 쳐다보는 눈이 끝장이라고 말하는 듯싶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이!

“중대장동지, 정전이어서 무산 시당에 전화가 연결 안 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살수 있다는 희망이 내 발밑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달아 올랐다.

그리고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 내일 확인하기로 하고 일단 좀 자게 해줘! 어 중대장? 우린 피곤해!”

 

도강자라면 보내달라고 해야 할 텐데 잠을 재워달라고 부탁하니 중대장도 조금 어리둥절한지 중앙당 신분증을 다시 들여다보고는 내게 의자를 권했다. 

그때 순찰교대를 마친 한 개 분대가 쓸어 들어왔다. 누군가고 서로 물어보던 병사들 중 소위 계급을 단 군인이 유심히 들여다보던 나의 신분증을 흔들며 소리쳤다.

“어따, 여기 근무하면 혹시 오광일이라고 알아요?”

오광일? 전혀 기억에도 없는 그 이름에 일부러 우릴 떠보는 것 같아 바짝 긴장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반색하는 것이 아닌가.

“김책시에 사는 오광일이? 아버지가 김책시당 책임비서 하는 그 애?”

 소대장의 얼굴에 금시 화색이 돌았다.

“네 맞아요, 맞아요, 중대장동지 그 시당 책임비서 아들이 내 친구예요”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사실일까. 이런 기적도 있을까? 하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중대장은 의심과 신뢰가 반반 섞인 얼굴로 벌써 친구인양 마주서 쉼 없이 지껄이는 소대장과 내 친구를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하늘이 준 기회다 싶어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오광일이가 정말 친구 맞어?”

“네 제 친구입니다.”

“친구의 친구를 여기서 보다니, 그럼 우리 여기서 좀 재워줄 수 있어?”

나는 중대장이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얼른 배낭에서 고급술과 외국 던힐 담배 6갑을 꺼냈다. 북한 군인들에겐 술과 담배보다 더 값진 재산은 없다. 오히려 그것이 때론 국경통행증보다 더 믿음직한 신변보호를 담보하기도 한다. 그날 나는 일부러 못 먹는 술을 세잔이나 마셨고, 소대장 이불을 쓰고 누웠지만 취하지도, 잠도 오지 않았다. 순찰근무 교대는 한 시간에 한 번씩 하는데 초소로 나갈 때마다 병사들은 실탄과 심지어는 수류탄으로 무장하곤 했다. 그 예리한 쇠 소리들이 국경의 빈틈없는 경계와 배신자에 대한 준엄한 처단을 암시하는 것만 같아서 기가 눌렸다. 우리가 너무 천진난만했음을 통감하게 되는 긴 밤이기도 하였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소대장이 쓴 우정의 편지를 받고 다시 길을 떠났다. 처음엔 지옥을 벗어나는 기분으로 나도 친구도 약속이나 한 듯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했던 은밀한 밤과 6중대 병실에서 본 경계의 밤과는 너무 차이가 난다는 현실 앞에 점점 걸음이 무거워졌다. 친구가 불쑥 물었다.

“우리 다시 평양으로 들어갈까?”

우리는 하얗게 얼어 있는 두만강을 옆에 두고 쭉 뻗어간 레일위에 맥없이 마주 앉았다.

“우리가 직장에 출근하지 않은지 벌써 며칠이 됐어. 지금쯤 평양에선 비상이 걸렸을거야. 알잖아, 당 규정을! 이젠 돌아설 수 없어”

“강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은?” 친구는 마치도 포기하는 방법을 묻는 듯 했다.

“방법은 기상천외야, 군인들이 우릴 보는 밤이 아니라 우리가 역으로 그들을 볼 수 있는 대낮이야, 지금 뛰자!”

지금 뛰자! 그 말에 나 스스로도 놀랐다.

갑자기 전혀 다른 세상에 뛰어든 주인공인양 심장이 막 울렁거렸다. 

우린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나는 재빨리 본능적으로 중국 땅을 살폈고, 친구는 북한 땅을 흩었다.

“군인들이 안보이니 셋까지 세고 뛰자”

“하나, 둘, 셋!”

우린 서로를 마주보며 비장하게 셋까지 합창했지만 일어서는데는 똑같이 실패했다.

군인들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문제라는 사실 앞에서 친구와 나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말없이 십 분이란 시간이 흐르자 국경의 고요로부터 서서히 충전되는 새로운 담력이 심장을 달구었다. 우린 말없이 손을 맞잡았다.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는 순간 운명의 끝에 함께 섰음을 느끼게 되었다. 아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린 동시에 힘 있게 솟구쳤다. 그리고 돌처럼 단단한 두만강 얼음위로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소원의 순간이었고 실행의 순간인 것이다. 뛰어가는 발걸음마다 운명을 두드리는 듯 요란했다. 드디어 중국 쪽 강기슭에 붙었는데 그때 뒤에서 누군가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저 것들 뭐야! 저 새끼들 잡아라!”

반사적으로 돌아보던 나는 아연했다. 우리가 뛰어 온 그 몇 미터 굽이돌이에 바로 병사들 한 무리가 총 들고 서있는 곳이었다. 격발장치를 당기며 총구를 겨누는 것까지 보고 뛰자니 갑자기 뒤통수가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죽었구나! 아니 죽지 않으리라! 우리는 멀리 보이는 중국의 이름 모를 산만 노려보며 서로에게 의지한 채 뛰고 또 뛰었다. 한 발을 짚을 때마다 뼈 없는 살처럼 주저앉았고 또 다른 발을 내 밀어도 마찬가지였다. 산이 가까워질수록 따라오는 주먹들도 가까워지는 것만 같아 차마 돌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는 동안 이상하게도 나는 공포를 초월하는 분통함이 치솟았다. 이 몇 미터 강을 넘지 못해 이때껏 북한에서 짐승처럼 살았는가! 아니 이 몇 미터를 넘었을 뿐인데 나는 왜 죽는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이 글을 쓰는 지금에도 그 긴박했던 탈북순간들이 현재 상황처럼 내 온 몸의 혈관으로 세차게 흐른다.

 

 

손들엇! 하던 병사의 야무진 외침, 군인들이 우리 주위를 에워쌌던 병실, 오광일이가 자기 친구라고 흥분하던 소대장, 두만강을 넘을 때 돌아봤던 무서운 총구들, 그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한국에 온지 6년이 됐지만 아직도 꿈에서 나를 소스라쳐 일어나게 한다. 훗날 무산출신 탈북자들을 만나거나 또 다른 여러 경로를 통해 그 6중대 지휘관들의 처벌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6중대를 빠져나와 국경과 최대한 가까운 초소들을 골라 이동했다. 그때마다 까다롭게 구는 초병들에게 오광일 친구였던 6중대 소대장의 편지를 보여주며 통과하곤 했다. 아마 그 편지가 발단이 되어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 검열대가 6중대를 들이치게 된 것 같다. 겸열 총화에서 6중대 분대장 이상 지휘관들이 모두 군복을 벗었다고 한다. 특히 소대장과 중대장은 경비대원이 체포한 전국 수배 대상자들을 풀어주었다는 죄명으로 출당 구속됐다고 한다. 나는 그들이 이 수기를 통일 후에라도 볼 수 있다는 전제로 한 마디 적고 싶다. 참으로 미안하다고, 그리고 용서해달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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