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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N.L.L.-연평해전>, 꼭 만들어야 합니다
United States 해병들이여 1 501 2013-01-19 05:52:01

영화 <N.L.L.-연평해전>, 꼭 만들어야 합니다

   
제2연평해전을 알고 계십니까?
2002년 6월29일, 월드컵 3.4위전을 응원하기위해 전국이 붉은악마와
태극기로 뒤덮였던 그날,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는 북한의
기습 공격이 있었습니다.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침몰한 357호에서도 조타키를 꽉 잡은 채 발견된 한상국 중사
총이 아닌 약통을 들고 부상자들을 돌보다 고통속에 스러진 박동혁 병장
함포 방아쇠를 당기다 포탄을 맞고 백일된 딸을 부르며 산화한 조천형 중사
포탄이 관통했어도 방아쇠를 꼭 쥔 채 전사한 황도현 중사
엔지니어 출신 내연사임에도 기관총을 잡고 응사한 서후원 중사
그리고, 적의 정조준 사격을 몸으로 막아내고 전사한 진짜 형 윤영하 소령

 

영화 <NLL-연평해전>에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영웅도 있고
억울한 눈물도 있습니다. 이 많은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내려면 여러분들의 큰 관심이 필요합니다.

 

이 영화는 이념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언제라도
겪을 수 있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지난 11년간 제2연평해전은
여러 정치적인 이해관계에서 때론 묻히고 때론 이용되어 왔습니다.
<N.L.L.-연평해전> 제작을 앞두고 많은 투자자들과 논의 했을 때
가장 우려하는 것은 대선이었습니다. 대선 결과에 따라
제작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정치색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라를 위해 산화한 이들의
평범하지만 아름다웠던 삶을 전하고 아들과 남편과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국민의 무관심으로 더 큰 상처를 받은 11년의 고통을 알리고 싶을 뿐입니다.

 

<N.L.L.-연평해전>을 제작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힘을 모아주십시오.
애초에 제작비 30억원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으나 이 영화가 반드시 제작되어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하는 출연진들과 제작진들의 재능기부로 15억원만
마련되면 3D 전쟁영화로 탄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쟁영화는 일반 상업영화보다 더 큰 제작비가 필요합니다.
<N.L.L.-연평해전>은 국내 최초의 3D 전쟁영화로 제작됩니다.
여러분들의 참여와 관심과 의견에 따라 그 다음의 펀딩이
가능할지 여부도 결정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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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 6인과 생존자들 이야기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357호 이끈 윤영하 소령


참수리급 357 고속정의 정장인 윤영하 소령은 진중하고 과묵한 성격이었습니다. 2002년 6월14일 월드컵 열기가 하늘을 찌를 때 윤영하 소령은 뉴스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해군들의 열띤 월드컵 응원 현장을 알리는 뉴스였습니다. 당시 윤 소령은 “경기장에 갈 수는 없지만 온 국민과 함께 우리 대표팀의 16강 진출을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라고 늠름하게 전했습니다. 윤영하 소령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부대원들을 통솔했던 윤 소령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는 움직임은 그의 모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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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도 함상 응원/2함대 사령부(2002.6.16 MBC뉴스데스크)

연평해전 故윤영하 소령 스승 “그날의 아픔 되새기기를”

  


침몰해서도 조타키를 놓지 않은 조타장 한상국 중사


한상국 중사는 조타장으로서 책임감이 어느 누구보다 뛰어났습니다. 북한은 핵심이 되는 조타실을 먼저 공격했습니다. 인양된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에 있는 커다란 구멍이 당시의 처참함을 보여줍니다. 내장이 다 나오는 상황에서도 한상국 중사는 조타키를 놓지 않았습니다. 조타실 포격 후 흔히 있는 급선회나 흔들림 없이 전사자와 부상자를 무사히 다 실어나를 수 있었던 것은 한상국 중사의 공입니다. 40여일 후 심해에서 발견된 357호는 반듯이 서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 키를 잡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닷속에서도 357호의 태극기는 빠른 조류에 펄럭이고 있었고 한상국 중사 시신은 조타키를 움켜쥔 채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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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국 중사 부인의 한숨

 

 


함포 방아쇠 당기다 백일된 딸 두고 산화한 조천형 중사 


조천형 중사는 20M 함포 방아쇠를 당기다 산화한 해군의 인재였습니다. 키 183cm가 넘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체육교사가 꿈이었으나 집안을 돌보기위해 해군에 입대해 의장대 의장병을 거쳐 참수리 357호 병기장이 되었습니다. 누구보다  훤칠한 외모가 그를 해군의 상징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당시 조천형 중사에게는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는 젊은 아내와 백일이 채 안된 딸 시은이가 있었습니다. 사건이 있기 전날 조천형 중사는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화로 전했습니다. 매일 여러 번 전화 하는 남편이지만 그날따라 그 말이 가슴 아프고 오싹했다고 후에 조천형 중사 부인 강정순씨는 말합니다.  남편의 사랑 한다는 말에 “나도”라는 한마디를 못한 게 평생 후회스럽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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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남편으로 생각하면 슬퍼… 멋진 용사로 기억할게"

 

 


포탄이 머리를 관통했어도 방아쇠 꼭 쥔 채 전사한 황도현 중사 


황도현 중사는 훤칠한 외모에 재기발랄한 만능 스포츠맨이자 감수성이 풍부한 문학소년이었습니다. 숭실대 기계공학과 재학중 해군에 입대한 황도현 중사는 함상에서 행사가 열리면 사회를 도맡는 밝고 활기찬 사람이었다고 동료들은 말합니다. 참수리 357호정의 22mm 벌컨포 사수였던 황도현 중사는 북한의 포탄이 머리를 관통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하얀색 운동화로 황도현 중사임을 알아본 동료 해군들은 방아쇠를 꼭 쥔 채 전사한 황 중사 앞에서 오열을 터뜨렸습니다. 황도현 중사 부모님은 11년이 지난 지금도 아들을 놓지 않고 계십니다. 작은 컨테이너에 황 중사의 군복과 생전에 사용한 물건들을 모아 기념관을 만들어 분향하십니다. 아들의 음성이 담긴 노래 테이프를 들으며 국민 대다수가 기억 못하는 희생을 부모라도 기억해주어야 덜 억울하지 않겠냐고 눈물지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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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교전 고 황도현 중사 추모식, 숭실대서 개최


 

 

 

전도 유망한 엔지니어, 기관총 응사하다 전사한 서후원 중사 


서후원 중사는 대구기능대를 다니며 정보기기운용기능사, 전산응용가공산업기사, 수치제어밀링기능사 등 자격증을 3개나 가진 전도 유망한 엔지니어였습니다. 고교 졸업때는 상주시장의 표창장을 받기도 한 소문난 효자였다고 합니다. 내연사였던 서 중사는 당시 22세의 패기 넘치는 젋은이였습니다. 기관실에서 근무했더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던 그는 전투가 벌어지자 위로 올라가 엄폐물도 없던 M60 기관총 거치대로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서후원 중사의 부모님은 내연사인 아들이 치열한 전투에 응전하다 전사한 것이 자랑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비통하다고 하십니다.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스러진 젋은이의 희생을 나라와 국민이 수년간 외면했고 추모식이 국가 행사로 격상된 지금도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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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지나 잊을만 하다는데… 엊그제 상처처럼 항상 가슴 아파"

 

 

100여개 넘는 파편 맞고 고통속에 산화한 박동혁 병장 


어린 나이에도 성실하고 책임감 강했던 박동혁 병장은 동생이 대입을 앞두자 부모님 부담을 덜어드리려고 원광보건대 치기공과를 휴학하고 의무병으로 복무했습니다. 일명 ‘약통’이라고 불리웠던 박병장은 반창고와 소화제 뿐인 약통을 들고 함정 동료들의 건강을 챙겼습니다. 전사자가 속출하고 중한 부상자가 나왔을 때 박병장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소화제뿐인 약통을 들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박동혁 병장은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함정을 뛰어다니며 동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몸에서는 100여개가 넘는 파편이 나왔으며 온 몸이 부서져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다 겪고 84일만에 전사했습니다. 그의 유골에서는 3kg의 쇳덩이가 나왔다고 합니다. 박동혁 병장의 마지막을 진료했던 당시 군의관인 이봉기교수(강원대 의대)는 한마디로 ‘멋진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박동혁 병장은 시대를 초월해서도, 국가를 초월해서도 찾아보기 힘든 책임감 강한 청년이었습니다. 84일간 고통의 시간을 지켜본 박동혁 병장 부모님의 비통함은 말로도 글로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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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혁병장을 치료했던 군의관 이봉기 교수가 당시 상황과 박병장의 생전 모습을 쓴 글 "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에 나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단다"


수십개 파편을 몸에 담고 살아가지만 사회에서 거부당했던 부상병들


제2연평해전은 30여분간의 격렬한 전투였습니다. 당시 N.L.L을 넘어온 북한측의 도발에 대응하는 교전수칙을 그대로 따르기 위해 차단기동 후 밀어내기를 할 정도로 두 배가 밀착해 있었다고 합니다. 6명의 전사자 외에도 18명의 부상자는 대부분 중상자들이었습니다. 부상이 없었던 승조원들조차 그 전투상황을 보고 들었으므로 외상후 스트레스는 11년이 지난 지금도 극심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는 그들을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제2연평해전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그들은 지금 대부분 30대 초중반의 왕성한 활동을 해야 하는 사회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녹녹치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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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인 곽진성씨(가운데, 당시 하사), 왼쪽은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는 생존했으나

2010년 천안함 폭침때 실종된 박경수 상사. 오른쪽은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황도현 중사


"팔뚝 총상, 기업선 퇴짜놨지만 내겐 훈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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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순 감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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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들과 처음 만남을 가진 것은 6년 전이었습니다. 매년 6월이면 열리는 추모식이 지금처럼 국가 주도의 행사로 격상되기 전이어서 그들의 고통은 극심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아들들이 희생된 아픔을 공유하며 소외된 채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2002년 전사 당시 그들의 희생은 ‘공무중 사망’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당시 전사자에 대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0대 꽃다운 나이에 스러져간 6인의 전사자 유가족들은 ‘공무중 사망’에 해당하는 보상금을 수령했습니다. 문제를 인식한 정부는 2004년 전사자에 대한 규정을 추가했고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의 순국 장병들은 그 혜택을 받아 전사자 예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은 전사자 예우는 받았으나 여전히 ‘공무중 사망’에 해당하는 보상으로 그친 상태입니다. 보상금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유가족분들에 대한 결례이니 이정도로 그치겠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숭고한 희생을 나라와 국민이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연평해전이라는 말을 꺼내면 정치 논쟁으로 끌고 갑니다.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그리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정치와 연루되면 안됩니다. 유가족들이 자체적으로 하는 행사를 찾아다니면서 저는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린 것 같습니다. 외국 같으면 영웅으로 추대받아 주위의 존경 속에 자식을 추억할 노부모들이 전사한 아들에 대해 설명하려면 몇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그래도 상대방이 반신반의하는 세월을 살아온 것입니다. 평화로운 2002년 월드컵때 그런 전쟁이 있었냐고 사람들은 오히려 되묻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도 대한민국의 아들이고 월드컵을 응원했던 붉은악마입니다. <N.L.L-연평해전>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평화롭다고 생각했던 2002년 월드컵 3,4위전 때 일어난, 6.25 이후 가장 치열했던 실제 남북한 정규군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국민 여러분이 이 사실을 기억해 내고 공감하며 응원해주어야 제작이 가능한 영화입니다.  

 

이번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많은 분들이 ‘제2연평해전’에 대해 알아주길 바랍니다. 6인의 전사자와 18인의 부상병들. 같이 월드컵 4강을 응원했던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월드컵 3,4위전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 <비디오를 보는 남자>(REWIND, 장편, 2004)
-. 휴스톤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최우수신인감독상)
-. 하와이국제영화제 넷팩상
-.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 신인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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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연평해전>에 대한 논란과 관련 기사들

 

갓 100일 시은이가 어느새 초등 4학년 “아버지는 영웅” 자랑

영국 초등교서 ‘서해영웅 추모 음악회’ 잔잔한 감동

60년 만의 국지전 부활?

이희완ㆍ이철규 참전영웅 "패전이라니…목숨바쳐 지킨 명백한 승전"

"연평해전이 햇볕정책 때문이면, 천안함은 달빛정책 탓?"

"제2연평해전 전사자 일반인 조문 막던 그들… 그 정부 위해 털끝 하나 다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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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글 ;

 

우리가 열심히 일할 수 있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시각에도 지난 연평해전에서 희생되신 우리 해병들 같은 분들이 이 땅을 지켜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있어야 집도 있고, 나라가 있어야 내 돈도 있고, 나라가 있어야 미래도 있죠.

 

우리 탈북자들은 자신을 보호해줄 나라의 국적이 없을 때 어떻게 살았습니까.

 

솔직히 북한의 국적은 차라리 없는것만도 못했죠.

 

중국에서 떠돌이처럼 돌아다니고, 팔려다니고, 일해도 돈도 받을 수 없었고, 때로는 매맞고, 매일 매일 중국공안에 잡혀갈가봐 떨며 살았죠.

 

북한의 국적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비참하게 만들곤 했죠.

 

그리고 북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중국이나 다른 3국에서 갖은 멸시와 천대를 받고 살았죠.

 

그런 우리를 대한민국은 받아주고, 대한민국 국적을 줘서, 이제는 어디 외국에 나가도 대한민국 국적이 있기 때문에 숨어다니지 않아도 되고, 누구나 함부로 멸시하고 그런 일은 더군다나 없죠.

 

저희가 북한에서 살아봐서 잘 알지 않습니까. 이 남한이 북한과 같은 사회가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을. 그리고 북한은 지금도 호시탐탐 남한을 적화통일하자고 노리고 있다는것도...

만약~만약 ~~ 정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북한에 의해 남한이 적화통일 된다면 북한 정권은 탈북자들을 제일 먼저 찾아서 보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영웅적인 군인들이 자신들의 피로써 이 나라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겠죠. 

 

함께 동참하여 이제는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이 나라 대한민국을 지키다 돌아가신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됩시다.

 

그리고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국민들이 알 수 있게 하는데 동참합시다.

 

펀딩 후원하는곳 :  http://www.goodfunding.net/src/menu.php?menu_idx=9&fx_popup=&mode=project_view&flag=view&prj_code=1301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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