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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회사의 탈북여성, 더 높은 곳 향하여
Korea, Republic o sfffdsff 0 420 2013-07-03 13:40:35

 미국의 서부 로스엔젤스의 한 의류회사에서 옷 견본품을 만드는, 샘플메이커인 탈북여성 기억하세요? 단계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밟아 나가면서 성공적인 미국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다시 그 다음 높은 단계인 패턴 사, 즉 재단사에 도전장을 냈는데요,

최: 패턴 배우느라 정신없어요. 샘플 메이커, 옷 견본품을 만드는 직종에는 한계가 있어요. 직급이 올라 갈 수 없죠. 그래서 패턴 사가 되려고 지금 두 달째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연말에는 샘플 메이커로 최고의 노임을 받고 있다고 전했던 가명의 최한나 씨, 이제는 옷을 만드는 설계사에 비유하는 재단사 꿈을 안고 밤늦게 까지 학원에서 공부하는 40대 중반의 늦깍이 학원생의 소식을 전합니다.

의류 업계에서는 디자이너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직업이 패턴사라고 하는데요, 디자이너가 그린 그림을 가지고 실제로 옷을 만들 수 있도록 패턴, 그러니까 옷 본을 뜨는 중요한 역할입니다. 최한나 씨께 직접 들어보죠.

최: 디자이너가 옷을 그림을 그려줘요, 그러면 패턴 사는 그것을 가지고 본을 뜨는 거죠 옷 설계를 만드는 거죠. 앞 본, 소매 등을 천에다 놓고 자를 수 있도록 각을 뜹니다. 패던 사가 견본을 소잉 하는 사람, 재봉하는 사람에게 주면 그 사람이 천에다가 설계한 것을 올려놓고 잘라서 똑같이 만드는 거죠. 저는 지금 견본 품 옷을 만드는 일을 해요. 그런데 한 단계 올라가면 패턴사가 되는 거죠.

패턴사, 여성들이 하기에 좋은 직종으로 우선 전문 기술직으로 다른 직종에 비해 안정적이라 여러 종류의 학원 과정이 있는데 등록금은 비싸지만 기간이 짧은 과정에서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전합니다.

최: 다른 사람들은 1년 과정으로 하는데 한 달에 600달러 내면 1년 정도 배워야 패턴사로 일할 수 있는데 저는 지금 한 달에 1.000달러 내고 6개월 과정으로 나가고 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샘플, 견본품을 만들 줄 알기 때문에 옷에 대해서는 한 30% 알고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600달러 내는 1년 과정은 너무 오래 걸리고 배우는 것도 쉽고 그래서 1,000달러씩 내고 6개월 과정으로 해서 공부시작 했습니다.

이러한 재단사가 되기 위해서는 최한나 씨는 거의 4년 경력의 견본품을 제작했기 때문에 시험을 본다거나 자격증을 딸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최: 라이센스, 자격증도 필요 없고 시험도 필요 없어요. 자기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해요. 회사에 취직하려면 테스트를 하는데 테스트해서 되면 취직 하는 거죠.

최한나 씨가 지금하고 있는 견본품 제작일과 앞으로 되려고 하는 패턴 사 와의 차이는 아주 큰 데요, 특히 장점은 디자이너는 보통 수명이 1-3년 정도인데 패턴 사는 수명이 길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앞으로 의류업계에 패턴사의 역할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꼽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것은 봉급이 샘플메이커 보다 훨씬 높다는군요.

최: 절반 차이가 납니다. 패턴사가 보통 잘한다고 하면 제일 잘하는 사람 말고 보통 한 1,500달러 주에, 한 주에 1500달러인데 샘플 메이커, 견본품 제작자는 최고 많이 받아야 850달러입니다.

한주에 1,500달러면 한 달이 4주니까 6.000달러, 연봉 7만2천 달러가 되는데 하지만 시작단계부터 주급 1,500달러는 아닌 거죠. 그런데 샘플메이커 봉급은 한계에 다다르면 더 오르지 못한다는 군요.

최: 처음에는 1,000달러나 850달러 정도부터 자기 수준에 따라 시작하기도 하고 페턴 사의 초봉이 샘플메이커가 받은 최고 노임입니다. 그리고 계속 노임이 올라 갈 수 있지만 샘플 메이커는 그 이상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재단사가 된다면 디자인과 함께 병행 할 수도 있는지 궁금한데요,

최: 아뇨, 재단사하고 디자인하고는 달라요. 다 그것이 견본품 제작자는 제단을 해서 옷을 만들 수 있지만 디자인 까지 한다면 자기가 일하는 분야가 3 사람의 몫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범위가 너무 크고 이를 다 담당할 수 없습니다.

패턴 사는 일이 끊이지 않고 훨씬 재미있고 보람도 느낀다는데요,

소잉 하는 것 보다. 즉 재단사가 주는 견본을 재봉틀로 옷을 제작하는 일을 하는 샘플 메이커는 육체적으로 하는 일이고 재단사는 우선 정신적으로 하는 일이죠. 머리로 하는 일이고 그런 것은 둘째 치고 월급이 높죠.

서부 로스엔젤스 지역에는 한국 사람들도 물론 많고 탈북자들도 비교적 많은 편인데 탈북자중에 재단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네요. 최초의 재단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거죠?

최: 그렇죠, 지금 샘플메이커도 없어요. 한국 사람으로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있어도 탈북자가 샘플메이커가 된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아요 일하는 것을 보면 그런데 제가 여기서 또 재단사까지 되려고 하니까 (웃음)

이제 교육이 끝나 재단사가 되면 앞으로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탈북자들에게 이런 일을 가르쳐주며 많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최한나 씨, 샘플 메이커, 견본품 제작을 오래했고 현장에서 일하다 보니 설명도 자세하고 쉽게 할 수 있다는 데요.

최: 제가 이제 알면 패런은 배워 줄 수 있어요. 지금 선생님도 저를 선생님 후보로 키우겠대요. 제가 아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도 가르쳐 주지 못하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는 것만큼 가르쳐 주는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같이 배워도 모르는 사람에게 제가 아는 것을 알기 쉽게 가르쳐 주니까 옆 사람도 그래요,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내가 가르쳐주는 것이 이해가 더 잘 된데요.

아직은 견본품 제작 일을 하고 있지만 이제 앞으로 재단사가 된다면 이 두 가지 일은 병행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최: 재단사 하면서 견본품 제작 일까지 하는 직업도 있고 샘플 메이커 하면 패턴을 하기가 쉬워요. 그 부분에 대해서 아니까. 쏘잉, 견본품을 만드는 재봉 일을 할 수 있으면 패턴하기가 쉬워요. 옷의 위치를 아니까 그런데 옷을 전혀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좀 바쁘죠. 저는 설계하면서 이론과 실험은 꼭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왜 필요한지 모르고 맹목적으로 하는데 거기에 대해 조목조목 알려주니까 더 이해하기 쉽죠.

샘플메이커는 이제 4년의 경력이 쌓였다는 최 씨는 충분히 낮은 반을 가르칠 수가 있어 선생님도 안심하고 선생님 후보로서의 활동을 격려 하고 있습니다.

최: 저는 원래 낮은 반인 화요일과 목요일은 안 나가는 날인데 낮은 반을 가르쳐 주라고 해서 나오는 겁니다. 선생님이 시간적으로 모자라는 것을 제가 보충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자기 후보로 양성 하겠다고 해요.

이렇게 미국 정착에서 꿈을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 가니 어떠세요?

최: (웃음) 너무 좋죠.

앞으로 패턴 사가 된 다음 단계는 어디로 오를 건가요?

최: 아직 재단사가 된 것은 아니니까 재단사가 된 다음에 또 생각해 볼 거예요. 지금은 재단사를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생활에 충실하며 운동도 열심히 한다는 최한나 씨는 이제 샘플 메이커 일을 가르치며 재단사 공부를 하면서 시간을 쪼개어 쓰고 있습니다.

최: 정말 시간이 없어요. 저는 밤 12시 한시 되어서야 잡니다. 일 끝나고 학원가서 공부해야 되니까

가족들의 굶주림 때문에 중국으로 가서 식량을 구해 오기 위해 탈 북한 것이 미국까지 오게 된 사연이 있어 이렇게 바쁘고 열심히 살아도 항상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 떠나지 않죠?

최: 두말하면 잔소리죠, 고향을 위해서 재단사가 되는 것이 꿈이니까요.

지난번 북한이 남한정부에 제의 했던 남북회담에서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마음이 설렜지만 그 회담이 시작도 못하고 무산되어 실망을 했습니다. 하지만 최한나 씨는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최: 희망을 가지고 반드시 좋은 날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고향을 위해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저희를 불러서 이곳으로 보내주시고 북한에서 벌면 이만큼 벌 수 있나요? 그래서 그만한 돈이 고향으로 가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금 버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저희가 돈을 벌려고 고향을 떠났잖아요.

최한나 씨는 앞으로 남북통일이 이루어져 가족을 꼭 만날 수 있다는 신념과 확신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최: 1보 전진 2보 후퇴를 했다가도 목적지 까지 오르는 데는 끝까지 오르겠죠.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시간적인 문제지 앞으로 남북이 통일되는 날도 있고 또 가족이 서로 만나는 날이 꼭 있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미국 생활도 이제는 자신과 여유가 생겨 마음이 편하다고 하네요.

최: 차도 있고 시민아파트 원 배드 룸 받아서 혜택도 받으면서 남들만큼 살고 있고 미국생활에서 저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금년 중으로 재단사로 일하는 것을 희망하면서 지금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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