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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김형국 교수 " 서독 방문때의 박정희를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저려 온다"
Korea, Republic of 박통세대 0 462 2014-12-27 02:40:17

김형국 교수, " 서독 방문때의 박정희를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저려 온다"


내 반생에 드리운  ‘박정희 대통령’(朴統)의 그림자

 
                 [ 김형국(金炯國)·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 ]


서독 방문 때의 박통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저려온다. 자원빈국이 가진 것이라곤 인력밖에 없을 때 간호사와 함께 광부로 보내진 우리 노동자를 찾아 탄광 현장에서 상하가 애국가를 부르며 함께 눈물을 흘리던 정경은 마치 맨 주먹으로 자수성가한 내 선친의 젊은 날에 대한 후일담을 듣는 것처럼 언제나 감동스럽다. 

우리 현대사에서 ‘朴正熙 세대’의 존재는 뚜렷하다. 한때 신문은 朴正熙 세대란 그가 집권할 즈음에 초등학교에 들어간, 인격형성기가 3공 시절이었던 사람들이라 불렀던 적이 있다.

생각하면 나야말로 ‘朴正熙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대학 2학년 때다. 군사혁명이 났다는 방송을 통해 성함을 들었고, 혁명이라는 생소한 말에 오히려 호기심을 느낀 하숙친구가 부추겨 현장을 둘러본다며 광화문으로 달려가 중앙청을 지키는 탱크를 만났던 기억이 지금도 어제 일인듯 생생하다. 스스로를 朴正熙 세대라 함은 내 직업적 생산성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할 즈음이 줄곧 그의 집권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朴正熙대통령을 먼발치에서나마 직접 바라본 것은 1963년인가 서울대학교 졸업식장이고 그게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한 번 보는 것이 백 번 듣는 것보다 낫다”하지만, 그를 마음의 깊은 울림으로 만난 것은 뜻밖에도 몇 년 전 백악관에서 멀지 않은 미국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앞에서였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글귀가 비석 전면에, “우리 참전국 젊은 남녀들은 한번도 이름을 들은 적 없는 땅에서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싸웠다“고 후면에 적혀있었다.

워싱톤은 미국정부 장학금을 받아 1970년에 유학 길에 올라 내가 난생 처음으로 만났던 미국 도시였다. 그때 한국이란 작디작은 나라를 알아준 사람은 원조담당 정부관리 그리고 어쩌다 만난 참전용사가 전부였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자못 시(詩)적인 표현은 세계의 절해고도, 아니면 외톨이 가운데 외톨이라는 말에 다름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로부터 한 세대 세월이 흐른 뒤에 참전기념비 앞에 섰을 때는 감회가 전혀 달랐다. 나를 감싸는 후광이 느껴졌던 것이다. 나라 안에 있을 때는 지역갈등, 빈부격차 같은 사회적 난제로 영일(寧日) 없는 어지러운 나날일지라도 나라 밖에 나오면 수출강국이란 국력이 내 허리를 곧추 세워주었던 것이다.

산업근대화 성공의 위력을 실감하기에 이르자 그런 치세(治世)를 가능케 했던 위정자를 다시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3공이 수출입국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던 그때, 순수했을망정 세상물정에 풋내기였던 우리 대학생 사이에 논란이 많았다. 외자를 도입한다하면 거두절미하고 나라를 팔아먹을 매판(買辦)자본이라 싸잡았고, 외국기술을 도입한다하면 우리 사회가 갖지 못한 기술을 배우는 혁신전파(innovation diffusion)이라 보지 않고 다른 나라에 기술적으로 영구 의존이 불가피한 종속(dependency)이라 매도했다.

혁신전파론 대 종속이론은 나중에 내 전공영역이 된 ‘지역개발론’에서도 핵심 논쟁 가운데 하나였다. 나라나 지역이 발전을 꾀하자면 혁신전파를 적극 수용하는 개방체제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종속의 위험을 피해 내생(內生)적 발전을 도모하는 폐쇄체제를 고집할 것인가의 논쟁이었다.

대안간의 우열은 진작 판명이 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폐쇄체제로 간 나라는 중국, 북한, 쿠바였다. 그 가운데 끝까지 고집한 나라는 북한이고, 그 대극(對極)에 선 것이 대한민국이다. 결과는 경제력에서 북한은 인천 도시경제보다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위정자의 선견지명이 이끈 3공의 선택은 지금 세계화로 치닫고 있는 문명사적 전환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기틀이 되고도 남았다.

박통의 통치술은 치밀했다. 장기적으로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당대의 희생적 헌신을 국민들에게 설득하는 한편으로, “장기적으로 사람은 죽고 만다”는 장기발전론의 설득 한계를 감안해서 실감나는 중기(中期)대책도 곁들인다. 그게 “80년대는 마이카시대”라는 ‘장밋빛’ 구호였다.

그때 마이카시대라는 슬로건에 대한 비판여론이 없지 않았다. 뜬구름 같은 미래의 제시는 현재의 정치적 난국을 돌파하려는 정치인의 상투어라 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복잡다단한 지난(至難)의 과제이기에 곧잘 나라가 앞장서야 마땅한 거대연구사업이라 공인되어 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최고통치자 산하에 국가발전목표위원회가 설치되곤 하지만, 후진국에서는 반대로 정권 목적으로 미래를 악용하기 일쑤이고 3공의 구호 또한 그런 동기에서 만들어졌다는 비판이 일었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오늘의 우리 일상이 교통혼잡에 시달릴 정도로 마이카시대가 진작 도래했다. 박통의 미래비전은 현실호도형 미래비전이 아니라 ‘자기실현(自己實現)적 미래예측’(self-fulfilling prophesy)임이 판명난 것이다. 자기실현적 미래예측이란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는 발심(發心)이 결집되면 바라는 미래상황이 마침내 실현된다는 인간사의 경험법칙에 근거한 예측방식인 것. 마이카시대는 결국 그렇게 실현된 것이다.

내가 朴正熙 세대이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내막은 외자도입의 보증창구로 이용하기 위해, 명목은 ‘라인강의 기적‘을 배우려는 행차였다는 서독 방문 때의 박통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저려온다. 자원빈국이 가진 것이라곤 인력밖에 없을 때 간호사와 함께 광부로 보내진 우리 노동자를 찾아 탄광 현장에서 상하가 애국가를 부르며 함께 눈물을 흘리던 정경은 마치 맨 주먹으로 자수성가한 내 선친의 젊은 날에 대한 후일담을 듣는 것처럼 언제나 감동스럽다.

“만절(晩節)을 보면 초지(初志)를 안다”는 말도 있다. 나중에 나타난 것을 보면 처음의 뜻을 증명하고 남는다는 말이다. 박통 시절을 생각할 때면 나는 자수성가를 위해, 우리 형제들의 고등교육을 위해 스스로를 엄격히 단련하던 내 선친의 무서운 품성도 그 공덕에 견주면 허물이 되지 않음과 견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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