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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행동을 지지했어야 한다. <펌>
Korea, Republic of 영변핵 0 211 2015-05-12 09:50:10

1994년 김영삼은 미국의 北爆계획을 막지 않았어야

오히려 김영삼 대통령은 北爆을 망설이는 클린턴 행정부를 압박하여 핵개발의 禍根을 도려냈어야 옳았지 않았을까?

趙甲濟   

이렇게 말할 수 없었나?
  "핵무장한 북한과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한국에 배치되었던 미군 전술 핵무기까지 나가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핵폭탄을 가진 깡패 앞에서 벌거벗은 채 있을 수는 없습니다. 북한의 핵시설을 폭격하면 그들이 도발할지 모르지만 韓美동맹으로 대응하면 됩니다. 다소간 피해가 있다고 해도 미친 놈 같은 敵이 핵무기를 손에 넣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우리 같이 합시다."
 
 
아래는 1994년 6월 北核 위기 때 金泳三 당시 대통령이 무엇을 했는가를 본인이 스스로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는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 시설을 폭격하려고 하는 것을 막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좀 과장된 표현이다.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對北제재의 여러 방법 중 하나로 영변 폭격을 검토하고 있었지 확정된 계획은 아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때 폭격을 하였더라면 북한의 반격으로 全面戰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썼다. 이 또한 검증되지 않는 추론이다. 당시 북한은 핵무기가 없었다. 중국도 지금처럼 강력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옐친은 지금의 푸틴보다 親서방적이었다. 북한은 폭격을 당하고 가만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반격을 한다고 하더라도 局地的이었을 것이고 全面戰은 무리였다. 핵무기도 없고, 고립된 상태에서 멸망으로 갈 것이 뻔한 전면전을 일으켰을까?
  
   오히려 김영삼 대통령은 北爆을 망설이는 클린턴 행정부를 압박하여 핵개발의 禍根을 도려냈어야 옳았지 않았을까? 이렇게 말할 수 없었나?
   "핵무장한 북한과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한국에 배치되었던 미군 전술 핵무기까지 나가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핵폭탄을 가진 깡패 앞에서 벌거벗은 채 있을 수는 없습니다. 북한의 핵시설을 폭격하면 그들이 도발할지 모르지만 韓美동맹으로 대응하면 됩니다. 다소간 피해가 있다고 해도 미친 놈 같은 敵이 핵무기를 손에 넣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우리 같이 합시다."
  
   유리한 高地에 섰을 때 공격을 하지 않으면 불리한 처지에서 수비를 해야 한다. 지금 한국은 핵무기가 없고, 북한은 핵미사일을 갖고 있다. 1994년의 기회를 놓친 代價이다.
  
   <내가 러시아에 머물고 있는 순간에도 북한 핵 문제는 긴박한 대치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6월3일 오후 7시15분 크렘린宮 내 영빈관에 머물고 있던 나에게 로마를 방문중이던 클린턴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왔다. IAEA(국제원자력기구)가 막 북한과의 핵 협상 실패를 선언한 직후였다. 한스 블릭스 IAEA 사무총장은 3일 유엔안보리에 출석해 『연료봉 교체에 대한 사찰 실패로 북한의 과거 핵 물질 전용 여부에 대한 검증이 불가능해졌다』면서 국제사회의 강력한 조치를 요구했다. 金日成은 이에 대해 『완전히 벌거벗느니 전쟁을 택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와 클린턴 대통령은 35분간의 전화 통화를 통해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대응 방안을 협의했고, 현시점에서는 북한에 대한 유엔 제재 결의안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나에게 6일쯤 안보리에 對北 제재 결의안을 상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바야흐로 對北 제재 일정에 가속이 붙고 있었다. 나는 클린턴에게 북한 핵문제가 대화로 풀리지 않은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한 뒤 『한국 정부는 이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관계국들과 긴밀히 협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게도 전화를 걸어 북한 핵문제를 유엔 안보리에서 다룰 수밖에 없게 됐다는 입장을 전달하고 협력을 요청했다.
  
   북한은 IAEA와 협상을 결렬시킨 직후 『현재의 핵개발 계획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진척시킬 것』이라고 위협하며 미국과의 협상을 요구하는 등 시간을 끌어보려 했다. 하지만 클린턴 행정부는 미·북 3단계 고위급 회담을 취소하는 등 對北제재가 불가피하다는 방향으로 급선회하고 있었다.
  
   미국의 북한 선제 폭격 계획을 반대
  
   한반도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의 일이다. 6월16일 오전 안보수석으로부터 내게 이런 보고가 올라왔다. 『레이니 駐韓(주한)대사가 내일 기자회견을 합니다』
   그 내용인즉 「회견 직후 주한 미군 가족과 민간인 및 대사관 가족을 서울에서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미군 가족이나 대사관 직원들을 철수하는 것은 미국이 전쟁 일보 직전에 취하는 조치였다. 미국은 유엔 제재와 별도로 北爆(북폭)을 감행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레이니 대사도 딸과 손자·손녀에게도 한국을 떠나라고 지시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유사시 寧邊(영변)을 폭격할 계획을 세워놓았다는 것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항공모함과 순양함이 北爆에 대비해 동해안으로 접근해 있었다.
   寧邊과 平壤(평양)은 대대적인 미군 폭격기의 空襲과 함포사격의 사정권 안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미군의 폭격이 이뤄질 경우 그 즉시 북한은 휴전선 가까이 전진배치되어 있는 엄청난 규모의 화력을 남한을 향해 쏟아 부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가능성을 폭격으로 저지할 수 있겠지만 可恐(가공)할 인명 살상의 참화가 한반도를 초토화시킬 것이었다. 유엔을 통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민족의 共滅(공멸)을 가져올 「선제 북폭」(北爆)을 감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北核 제재의 이유는 핵 위협을 제거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한·미 양국軍이 비상경계에 들어간 것도 어디까지나 好戰的(호전적)인 북한 정권에 대한 억지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을 뿐 한반도에서의 戰爭(전쟁)을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클린턴 대통령, 이게 말이 됩니까』
  
   16일 오후 나는 비밀리에 집무실로 레이니 주한미국대사를 불러 단독으로 1시간 동안 요담했다. 레이니 대사는 나와 오랜 친구였으며, 클린턴 대통령이 외교관이 아닌 레이니를 주한대사로 임명한 이유도 나와 문민정부에 대한 미국의 友好(우호)를 표시하기 위한 뜻이었다.
   하지만 민족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앞에 두고 나는 레이니 대사에게 강력하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레이니 대사, 당신은 나와 오랜 친구가 아니오.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그 즉시 우리 남한도 북한의 포격에 의해 초토화됩니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있는 한 전쟁은 절대 안 되고 가족 등 미국인들의 소개도 안 됩니다. 지금 바로 클린턴 대통령에게 연락해 내 이야기를 분명히 전하세요. 나는 한국군의 통수권자로서 우리 군인 60만 중에 절대 한 사람도 동원하지 않을 겁니다.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서 전쟁을 할 수는 없어요.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내가 레이니 대사를 비밀리에 청와대로 부른 것은 너무나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재임중 외국 대사와 단 둘이 따로 만난 것은 이날 레이니 대사를 만난 것과 황장엽 망명 당시 강택민 주석에게 내 뜻을 전달토록 하기 위해 張庭延(장정연) 중국대사를 만났을 때, 단 두 번뿐이었다.
   레이니 대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사관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외교안보수석이 『미국 대사가 회견을 일단 연기했습니다』하고 보고해 왔다. 레이니 대사가 나와 만난 직후 직접 백악관의 클린턴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는 보고였다. 나는 일단 숨을 돌렸다. 그날 새벽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거세게 몰아붙였다.
   『클린턴 대통령, 이게 말이 됩니까.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이상 우리 60만 군대는 한 명도 못 움직입니다.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드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전쟁이 나면 남북에서 군인과 민간인이 수없이 죽고 경제는 완전히 파탄 나며 외국자본도 다 빠져나가게 돼요. 당신들이야 비행기로 공습하면 되지만, 그 즉시 북한은 휴전선에서 남한의 주요 도시를 일제히 포격할 겁니다. 우리가 6·25 때 수없이 죽었는데 지금은 무기도 훨씬 강력해졌어요.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나는 우리 역사와 국민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소』
   한·미 정상간 핫라인을 설치하면서 『24시간 어느 때라도 서로 원하면 통화할 것』을 약속했지만 전화를 걸어온 클린턴 대통령은 내가 잠들어 있을 새벽에 전화하는 것이 미안했는지『내 평생의 즐거움이 김영삼 대통령 각하의 목소리를 듣는 겁니다』라며 인사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 즈음은 내 재임 중 가장 고뇌했던 한 시기였다. 미국이 아니더라도 유엔 제재가 본격화되면 북한이 언제 남한을 선제 공격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북한의 핵개발을 봉쇄하면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절대 막아야 했다. 나의 강력한 추궁에 클린턴 대통령은 억지로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끝냈다.
  
   평양에 다녀온 카터
  
   6월17일 카터 前 대통령은 金日成과 평양의 대동강 요트선상에서 2차 회담을 갖고 CNN과 회견했다. 카터 대통령은 김일성에게 미국이 對北 제재 중단, 3단계 북·미회담 재개, 경수로 제공 등의 의사가 있음을 밝혔고, 김일성은 NPT복귀를 비롯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는 보도였다.
   백악관은 일단 對北 제재의 중단이 미국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밝혔고 아직은 북한의 眞意(진의)를 속단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로부터 전쟁위기로까지 치달아 가던 위급한 상황은 간신히 한 고비를 넘어가는 듯했다.
   나는 6월18일 판문점을 거쳐 서울에 온 카터 대통령 내외와 청와대에서 부부동반으로 오찬 겸 회담을 했다. 카터 대통령은 뜻밖에도 金日成의 제안을 가지고 왔다.
   『김일성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께 언제 어디서든 조건없이 만나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김일성이 남북 정상회담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대동강에서 자신과 로잘린 여사, 그리고 김일성과 부인 김성애가 뱃놀이를 하는 도중, 자신이 김일성에게 『위기를 극복하려면 남한의 김영삼 대통령과 반드시 만나셔야 합니다. 두 분이 만나시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더니 김일성이 그 자리에서 『좋습니다. 기꺼이 만나겠습니다』하고 흔쾌히 승낙을 하더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러면 김영삼 대통령하고 내가 내일 청와대에서 오찬을 하기로 돼 있는데 그때 전달해도 되겠습니까』하고 했더니 역시 좋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카터 대통령의 설명을 들은 즉시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수락했다. 나는 카터 대통령이 가지고 온 김일성 주석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런 제의였지만 남북 정상이 직접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북한 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진전, 그리고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익한 계기가 될 수 있을 터였다.
   혹시라도 김일성의 제의가 단순한 선전용 발언이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거짓말은 곧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암묵적 지원을 얻는 것조차 불가능해지는 등 국제사회에서 회복불능의 상태로까지 빠져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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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철 ip1 2015-05-13 12:28:23
    김정은 색끼 언제면 죽을까요?
    저색끼 빨리 썩어져야 인민들의 편의 살수 있을텐데요,
    하루빨리 또라이 김정은 색끼 급사 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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