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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총리의 회고 (6)
Korea, Republic of 역사가 0 466 2015-07-20 10:51:40

월남서 발 빼려는 닉슨 “5년 뒤엔 주한미군 완전철수” 통보 … 박정희 집념 “미군 언제 떠날지 몰라, 우리도 핵무기 가져보자”

[중앙일보] 입력 2015.07.08 01:23 / 수정 2015.07.08 01:59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54> 자주국방 시대 개막

<IFRAME style="BORDER-BOTTOM: medium none; BORDER-LEFT: medium none; HEIGHT: 21px; OVERFLOW: hidden; BORDER-TOP: medium none; BORDER-RIGHT: medium none" src="//www.facebook.com/plugins/like.php?href=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8191960&width&layout=button_count&action=like&show_faces=true&share=true&height=21"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 scrolling=no></IFRAME>종합 1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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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7월 24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수원 공군기지를 방문해 F-86 세이버 제트 전투기에 올라타 포즈를 취했다. F-86 세이버는 6·25전쟁 때 미 공군이 사용했으며 북한 미그기를 상대로 큰 공을 세웠다. 일명 쌕쌕이로 불렸다. 한국 공군은 이 기종을 전쟁 뒤 도입했다. 미국은 한국군의 전력이 강해지면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신예 전투기 공급을 꺼리기도 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약자는 강자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강자를 활용할 수는 있다.
한국과 월남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공산주의와 싸웠다. 세월이 흘러 월남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한국은 세계사의 주역이 되었다.
 
두 나라의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 월남은 미국에 의존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렸지만 한국은 미국을 활용해 자신을 키워갔다. 미국은 허약한 나라에서 철수했으나 스스로를 돕는 나라에선 철수하지 않았다. 강자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이 대체로 이렇다.

 1973년 1월 8일 파리에선 키신저 미 대통령 안보담당보좌관과 레둑토 월맹(越盟·북베트남) 정치국원이 12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의 휴전에 합의했다. 평화협정(1월 27일)은 그럴듯하게 보였지만 월남(남베트남)을 패망(75년 4월 30일)으로 안내하는 신호였다.
헨리 키신저는 인도차이나에 평화를 가져온 공으로 레둑토와 함께 73년 노벨평화상의 주인공이 됐다.
 
 레둑토는 수상을 거부했지만 키신저는 순진하게도 협정을 전쟁의 끝이라고 믿었다. 한때 50만 명의 전투병력을 자랑하던 미군은 평화협정에 따라 3월 29일 완전 철수하고 말았다. 반면에 월맹엔 진짜 전쟁이 시작됐다. 베트콩(Viet Cong·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말뜻은 베트남 공산주의자)으로 위장해 월남에 침투해 있던 월맹 정규군 14만 명은 미군 없는 월남을 마음껏 요리했다.
 
월남의 티우 대통령은 속수무책이었다. 허약한 군사력에 분열된 사회, 불신 받는 정치와 흔들리는 리더십의 나라를 미국은 더 이상 도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도 변했다. 72년은 대선의 해였는데 반전(反戰) 데모가 휩쓸었고 의회와 언론은 경쟁적으로 월남에서 손을 떼라고 행정부를 몰아세웠다.

 미군 철수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미국은 71년 3월 27일 한국에서도 주한 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제7사단·2만2000명)을 철수시켰다. 그해 가을 유엔총회는 대만(자유중국)을 축출하고 중공(中共·중화인민공화국)의 가입을 허용했다.
 
72년 2월 닉슨과 마오쩌둥의 베이징 회담은 냉전질서의 해체, 데탕트(긴장 완화)의 서곡으로 간주됐지만 우리에겐 적과 아군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혼돈의 시작을 상징하기도 했다.
72년 9월엔 일본이 발 빠르게 중공과 국교를 텄다. 한국의 오랜 외교지침이었던 할슈타인 원칙(북한을 승인하는 나라와는 단교하거나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은 수정이 필요했다.

1973년 6월 5일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오른쪽)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JP) 총리. 김 총리는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을 반대하지 않고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와 수교할 수 있다”는 대북정책의 전환 방침을 밝히고 프랑스의 협조를 구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73년 1월의 한국으로 돌아가자. 위기와 혼돈의 국제정세 앞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안보·경제·외교 분야의 일대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정치에선 유신(72년 10월 17일)을 통해 한시적으로 국민을 누르더라도 일사불란하게 국가 조직을 총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갖췄다(본지 7월 3일자 12, 13면).
 
 박정희 대통령은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국내외에 ‘한국의 중화학공업 시대 선언’을 하고 31일엔 국무총리인 나를 비롯한 안보·경제 장관 회의를 소집했다. 장소는 청와대 국산병기 진열실이었다.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오 수석의 브리핑이 4시간 동안 진행됐다. 그는 방위산업 따로, 중화학공업 따로 여겨온 기존의 발상을 뒤집어 둘을 하나의 울타리,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해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의 일환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때 오 수석이 했던 말을 되살려 본다.

 “중화학공업이나 방위산업이나 똑같은 하나의 사업입니다. 후진국은 돈과 기술이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가장 큰 애로는 수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1978년 9월 충남 서산 안흥 종합시험장에서 있은 한국 최초의 지대지(地對地) 미사일 백곰 발사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대전차 로켓포를 만져보고 있다. 오른쪽은 심문택 국방과학연구소장 . [중앙포토]
 
 오 수석의 얘기는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기회가 온다는 발상법으로 참석자들의 공감을 샀다. 그는 이어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선 수요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산업기계 쪽에서도 생겨났고, 방위산업 쪽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 이런 의미에서 안보 문제가 초긴장 상태에 이르고 있는 최근의 상황이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해서 확정된 중화학공업 분야가 철강(포항), 종합화학(울산·여천), 조선(거제도 일대), 전자(구미), 기계(창원), 비철금속(온산) 등이다. 문제는 돈이었다. 박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10년간 100억 달러가 들 것으로 추산했다.
 
 대통령이 남덕우 재무장관에게 “돈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남 장관은 “액수가 너무 커서…”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박 대통령은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며 반드시 재원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고는 나를 불렀다. “김 총리! 내각에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구성토록 하시오.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외자 도입을 조치하시오.”

 이로써 60년대 식량과 경공업으로 극빈의 문제를 해결한 조국 근대화의 여정(旅程)은 70년대 자주국방과 중화학공업 시대로 방향을 틀었다. 이 시대를 잘 헤쳐 나가면 북한과 체제 경쟁을 끝낼 수 있는 길이 될 것이었다. 실제로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이 계획은 착실하게 추진됐고 완수됐다.
 
모두들 열심히 했다. 어려움과 희생을 참아가며 때론 묵묵히, 때론 신바람나게 일한 국민들 덕분이다. 가난은 나랏님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숙명론이 한번 깨지자 우리 국민은 놀라운 힘과 지혜와 희망을 발휘했다. 지금 나라에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주요 기업들 대부분이 당시에 위험하고 모험적인 중화학공업 정책을 잘 따라줬다.
이병철(삼성)·정주영(현대)·구자경(LG)·최종현(SK)·조중훈(한진)·김종희(한화)·박두병(두산) 같은 분들은 부국강병의 공로자다.

 그 즈음 박 대통령은 극히 제한된 주변 사람들을 시켜 핵무기 개발 능력을 갖추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우리도 핵 좀 가져 보자’는 생각을 한 건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이 맡아라”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1969년 7월부터다.
 
 70년 들어 ‘주한미군 감축 계획’ ‘5년 후 주한미군 완전 철수’라는 미국의 입장이 잇따라 통보되던 어느 날 박 대통령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원자폭탄을 연구해야겠어. 미군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우리를 지켜줄 무기가 필요해. ” 나도 대통령의 집념에 동의했다.
 
국방력이든 외교력이든 언제까지 미국에 의존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더구나 미국 자체가 변하고 있는 점도 염두에 둬야 했다. 핵무기 보유가 어렵다면 최소한 핵개발 능력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핵개발 능력의 추구는 사실 70년대 시작한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시대의 중요한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73년 5월 19일부터 6월 16일까지 나는 거의 한 달간 유럽(스페인·이탈리아·벨기에) 및 일본 등 7개국을 순방했다. 냉전에서 데탕트로 변화하는 국제질서에 적응하기 위해 대북·대유엔 정책을 180도 전환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순방 이틀 전인 5월 17일 북한이 사상 처음으로 유엔 기구인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했다. 국제사회에 급부상한 중국과 신생 중립국들의 지지를 받은 것이다.
 
이처럼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쓸데없이 외교무대에서 남북 표 대결이나 하며 국력을 낭비할 순 없었다. 유럽 순방 중에는 예정에 없던 서독을 단신으로 비밀 방문해 브란트 총리의 외교적 협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순방국 중에 가장 중요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원자폭탄 실험으로 ‘위대한 프랑스’의 자부심을 세운 샤를 드골 대통령의 묘한 배짱이 숨쉬는 나라다.
 
항공기 경쟁에서도 프랑스의 에어버스사가 미국의 보잉사를 눌렀다. 프랑스의 독자적인 외교정책이 종종 미국의 옆구리를 아프게 하지만 미국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퐁피두 대통령을 만나 한국 외교정책의 대전환 계획을 설명하고 유엔에서 이 안을 제안해 줄 것을 부탁했다.
 
 내가 7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뒤 나의 판단과 건의를 토대로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적인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특별선언’을 했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을 반대하지 않으며 사회주의 국가와도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나는 프랑스에서 퐁피두 대통령뿐 아니라 지스카르데스탱 재무장관과도 면담했다. 그와는 한국의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건설을 위한 프랑스의 투자 문제를 논의했는데, 자연스럽게 우리의 핵 기술 확보를 위한 얘기들도 오갔다. 핵과 미사일 얘기는 다음에 좀 더 얘기하겠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조르주 퐁피두(Georges Jean Raymond Pompidou, 1911~74)=프랑스의 19대(1969~74) 대통령. 파리에서 교사를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중위로 참전, 독일군과 싸웠다. 44년 말 프랑스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샤를 드골을 만나 정치에 입문했다. 드골 정부에서 6년여간(62~68) 총리를 지냈고, 드골에 이어 대통령에 올랐다. 초고속열차 테제베(TGV) 개통과 대대적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회보장정책 개선 등의 업적을 남긴 실용주의자였다. 대통령 재임 시절인 74년 희귀질환인 매크로글로브린혈증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지스카르데스탱(Valery Giscard dEstaing, 89)=조르주 퐁피두에 이어 프랑스의 대통령(1974~81)에 올랐다. 독일 코블렌츠에서 태어나 파리의 명문 국립행정대학원(ENA)을 졸업했다. 62년 36세 때 샤를 드골 대통령에 의해 재무장관으로 발탁됐다. 69년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 밑에서 다시 재무장관에 올랐다. 74년 대통령선거에서 ‘점진적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해 당선됐다. 재임 중 유럽 경제공동체(EEC)를 강화해 뒤에 유럽연합(EU)으로 발전하게 하는 초석을 닦았다. 서방7개국 정상회담(G7) 창설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 인물 소사전 오원철(87)=박정희 정부의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 박 대통령이 그를 위해 청와대 경제2수석(1971~79) 자리를 신설해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육성을 전담케 했다. 박 대통령이 ‘오 국보(國寶)’라 부를 정도로 신임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시발자동차 공장장을 지내다 5·16 직후 박정희 정권에 영입됐다.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 조사과장을 시작으로 상공부 화학과장·공업1국장·기획관리실장·차관보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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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복 ip1 2015-07-20 16:25:27
    좋은 글 연속 감사히 읽었습니다.
    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 만능석사 ip2 2015-07-23 17:35:20
    우리나라도 핵을 가지고 있어야했는데 말이죠. 물론 북한처럼 여러저기 협박용이 아닌 자국과 자국민을 위한 무기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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