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자살을 택한 북한군 대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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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버이 날이다. 저저마다 카네이션을 들고 다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눈 굽이 저려온다. 문득 북에 두고 온 부모님생각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부모님들도 같이 오셨더라면 카네이션을 달아 드릴 텐데... 어버이날이란 말은 북한에서는 듣지도 못했던 말이다. 북한에서는 경제난과 식량난이 혹심해 지면서 부모들에 대한 존경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조상제도 돈이 없으면 못한다고 하는 속담이 북한에 맞는 말이다. 내가 인민무력부에서 근무할 당시 대좌로 복무하시다가 복무연한이 다 되어 제대된 분이 계셨다. 제대될 때 그 분은 훈장도 많고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는 공로자대우를 받는 계층이었다. 1년 후인가 거리에서 그분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누구인가 나를 찾는 소리에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내가 알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길 맞은편에서 웬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 아는 분인가 해서 나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누구인지 알 수 가 없는 것이다. 내가 “저를 아십니까?”라고 하자 그분이 “유동무, 나 강연과 박과장일세.”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1년 사이에 너무도 변한 그분의 모습에 깜짝 놀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하얗게 서리가 내린 머리칼과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 살이 빠지고 여윈 얼굴, 정말 대좌 견장을 달고 바리톤 목소리로 연탁을 두드리며 강연을 하던 늠름한 대좌는 어디로 갔는가? “과장동지,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디 아프십니까?” 놀란 내 물음에 박과장님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얼굴에 굶주림이 가득 실렸다. 나는 그분을 모시고 군인식당으로 갔다. 그런데 그분이 그곳에 안 들어가시겠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들을 보기가 민망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합의제식당(일반식당보다 가격이 비싸고 좋은 식당)으로 가 그분께 술과 육개장을 사드렸다. 워낙에 술을 좋아 하셨던 분이라 맥주컵에 술을 부어 단숨에 들이키신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식사를 하시는 모습에 어느 정도 그분의 생활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허기졌던 탓이라 쉽게 취기가 오른 그분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유동무, 내가 창피해도 이 말만은 꼭 해야겠네.”라고 서두를 떼고 박과장님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분은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둔 가장이었다. 아버지 덕에 자식들도 사회에서 한 자리씩을 맡아 생활도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박과장이 제대하고 무력부에서 받아오던 식량이나 기타 생필품공급을 받지 못하자 저마다 부모를 모시지 않겠다고 발뺌을 했다. 그래서 과장 내외는 쌀을 사기 위해 가장 집물을 팔기 시작했다. 북한의 군관생활이래야 아무 것도 없다. 대한민국 국군대령이 제대된다면 퇴직금도 많으련만 북한군에서는 대좌라 해봤자 돈이 얼마 안 된다. 공로자들에게 공급하는 식량마저 끊기자 굶는 것은 예사 일로 되어 버렸다. 그러다 부인까지 병을 만나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부모를 외면하는 자식들을 한탄하며 박과장은 눈물을 멈출 줄 모른다. 나는 부대로 돌아와 박과장이 근무하던 강연과로 찾아가 좀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강연과 사람들도 여러 차례도와 주었고 자기들도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몇 사람이 주머니를 털어 한 달분 식량을 해결해 주었다. 박과장은 내 손을 붙잡고 자식들보다 낫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다. 몇 달 후 나는 그분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내가 보내준 식량을 다 먹고 더는 먹을 것이 없자 그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좋은 사회인가 다시금 느낀다. 북한도 하루 빨리 인민이 잘살수 있는 그런날이 오기를 오늘도 기대해 본다. 탈북자 유용남 (전 인민무력부 총정치국 상좌) 출처 자유북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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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분도 기가 막혀서-
빨리 끝장내야 할 세상입니다.
잘 읽었구요
일생을 바쳐 충성한 사람들을 굶겨죽이고 잡아 죽이고 나중에는 자살까지 하게 만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