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탈북자의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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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1997년도에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 풍인구에서 살다가 중국 도문시 량수진에 와서 살고 있는 최보금입니다. 북한에서 식량사정으로 살기 힘들어 중국에 와서 돈을 좀 벌어서 살아보려고 오긴 했는데 중국에 와서의 생활도 생각보다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와서 말도 모르고 사는 생활풍습도 다르고 또 신분증도 없으니 몇일에 한번씩 하는 호구검사를 피하는 일도 보통이 아니였습니다. 밤에 누워 자지도 옷도 바로 벗지 못하고 어느 순간에라도 변방대 파출소사람들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 이불장에 숨던지 아니면 뒤 문으로 달아나가고 언제 어느 순간 다리를 펴고 마음놓고 잔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신경을 쓰고 산 탓에 밥을 먹어도 소화가 안되고 사는 것이 겨우 목숨이나 이어가는 정도였습니다. 하루 자고 일어나면 오늘은 무사했구나 하는 생각으로 안도의 숨이 나가고 낮에는 산과들도 다니면서 산나물과 달래를 캐서 돈을 조금이라도 벌어보려고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농사일도 하면서 돈을 좀 벌어 북한에 가서 생활해 보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했지만 마음과 뜻대로 되지않았습니다. 일하는 것이 힘든 것보다는 남의 눈을 피해가며 일하자니 그것이 더 몇곱절이나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2002년도에 변방대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는 북송되여도 지금처럼 감옥까지는 보내지 않고 자기 군내안에서 로동단련대를 만들어놓고 로동단련대 처벌을 몇 달씩 시켰습니다. 로동단련대라고 해도 아침5시에 기상하여 식전에 한10리 되는 곳에 가서 자갈, 모래를 담아들고 십여리길을 달리게 합니다. 갔다와서는 30분 식사시간인데 뜨고, 썩은 강냉이를 막 갈아서 밥인지 뭔지 모르게 모래가 막 씹히고 껍질이 씹히는 것을 한줌도 안되게 소금물에 넣어서 주는 것을 먹고 8시부터는 일을 시작하면 저녁에 어두워서 보이지 않아야 일을 끝내고 들어옵니다. 들어와서는 전기불도 없는 새까만 칸에 200~300명 정도 들어가는 칸에 남녀 관계없이 꽉박아 앉혀놓고 밤11~12시까지 학습을 시킵니다. 땅바닥은 콩크리트가 다 깨여져 나가서 흙먼지가 풀석 풀석 일어나는 밖이나 다름이 없는 그런 바닦에 누울 자리도 비좁아서 앉아서 날을 밝히는 때가 많았습니다. 물도 없어 세수도 몇일에 한번씩 한종지씩 공급되는 물로 겨우 얼굴을 문대고 몇 달씩 거기서 끝내고 나올 때까지 옷 한벌 갈아 못입고 살다보니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머리나 옷에는 이들이 득실거리고 방바닦에는 앉으면 이들이 줄지어 다닙니다. 배는 고프다 말할 형편도 못되고... 이렇게 고생하다가 몇 달을 마치고 나와서 몸이 쇠약해지고 마땅이 있을 곳도 없고 해서 다시 중국으로 들어왔습니다. 남편과 하나밖에 없는 자식은 돈을 벌러 중국에 들어와 헤메는 사이에 다 사망되고 나가니 형편이 이런판이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였습니다. 남편과 자식을 다 잃고 어떻게 살아가랴하고 죽을 생각까지 다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죽을 순 없다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살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중국으로 건너와 살았는데 훈춘에서 일하다 어떤 자의 밀고로 1년후 다시 붙잡혀 나갔습니다. 그때는 그전보다 탈북자들이 수도 많고 처벌도 엄하게 처리되였습니다. 하여 4달동안 습기가 가득한 구류장에 앉아 강냉이껍질을 씹으며 쇠약해진 몸으로 재판을 받고 평안남도에 있는 증산감옥으로 2년 판결을 받고 옮겨가게 되였다. 처음으로 증산감옥에 가서 본 것은 첫모습에 지금 눈감아도 눈앞에 악몽으로 나타나군 합니다. 사람이 사람 모습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고 골은 해골같고 몸은 뼈에 가죽만 씌여놓은 사람들로 꽉 차있었습니다. 무어라고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내모습도 한심한데 거기서 본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끔찍하였습니다. 나도 인제 저런 모양이 되겠구나하고 생각하니 기가 막혀 눈물도 나지 않았습니다. 저렇게 사느리 차라리 죽어버리려고 시도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사람 목숨 끊는다는 것이 사는 것도 힘들지만 죽는 것조차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거기서 몇일에 한번씩 죽어가는 사람을 볼때면 무덤조차도 조구마한 구멍을 파놓고 마구 쑤셔넣어서 묻어버리는 것을 볼 때면 오히려 반발심에 나도 죽으면 저렇게 되겠구나하고 생각해 보니 어떻게 하나 악심을 먹고 살아 나가는 것이 내가 이기는것이다 라고 생각하니 이를 악물고 살았습니다. 짐승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다가 죽어서까지 그런 대접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쪽에서는 너무도 쇠약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숨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느라고 한곳에 모아놓았는데 죽기 전에 설사를 하고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하니까 아랫도리는 다 벗겨서 눞혀놓았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짐승인지 사람인지 분간 못할 정도였습니다. 저도 그 정도의 사람들과 흡사하게 되었던 것을 이제는 더는 살 가망이 없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하나님이 도우셨는지 기적적으로 살아나 결국 제 날자를 다 마치고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도 오늘날에 이 글을 쓰게 되였습니다. 꼭 지옥에서 살아나온 기분이였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살 얼음이 있을 때 들어가서 삽으로 논받을 뚜지고 저녘에 늦어까지 논밭을 뚜지고 발목이 다 얼어 떨어지는것 같고 제대로 못하고 그에 대한 처벌이 따르기때문에 입술 깨물고 자기앞에 맡겨진 하루과제를 무조건 수행하여야 했습니다. 밤늦게까지 논밭에 일을 하다가 지친 몸을 겨우 끌고 들어오면 한줌도 안되는 강냉이죽을 먹어도 어디에가서 붙었는지 배고파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밭에 나가 일할때는 너무도 배가고파 뛰여다니는 개구리를 잡아 생것으로 막 씹어먹고 메뜨기를잡아먹고 벼 탈곡할 때는 몰래 한줌씩 벼껍질채로 씹어먹군했습니다. 어떻게하나 이 안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기에 무서운 것도 더러운 것도 모르고 정말 인간이 상상할수없는 모든 것을 다 뜯어먹고 잡아먹었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는 변소조차 제대로 보내지않아 소변을 참다보면 잠을 제대로 못자고 새벽에 일어나 일하러 나가면 정말 그런 고통에 어디 다 말하겠습니까? 끝내는 명인지 탓인지 하나님의 도움이였는지 이런 지옥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눈물 훌렸는지 모릅니다. 집으로 나오니 동네사람들이 너무도 내모습이 사람같지 않아 누구인지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집도 없으니 사촌언니집도 생활이 어려운데 그 집에 좀 있다가 몸을 좀 추스려가지고 다시 중국으로 넘어왔습니다. 언제 다시 붙잡히면 저도 목숨이 끝나는 날입니다. 이런 고비를 넘어넘어 오늘날에까지 살아왔는데 이제 다시 붙잡혀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목사님 저의 이 불행한 사연을 편지로 담아올리니 도와주십시오. 간단히 적어보냅니다. 어떻게 하나 꼭 도와주십시오. 한국으로 나가게 되면 열심히 일하여 꼭 은혜에 보답하겠으니 한국으로 갈수있게끔 꼭 도와주세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자료 출처 :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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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탈북자들중에 이 같이 겪은 사람들이 많을것입니다
도와드리지 못하는것이 안타 깝습니다
억세게 살아서 좋은날 꼭 보시기를 기원합니다 ....
퍼갑니다
http://cafe.naver.com/rosesong334.cafe ....
너도 나도 입을 모아서 기막힌사연을 알려야 할것입니다
열심하시는 라온제나님 감사합니다
한주 도 놓은 출발 하시기를 ...^^^^^^^^^++
정말 주님은 잘사는 한국에만 있는지요???저의 슬픈모국
북한에도 희망을 주시고 떠도는 우리 탈북자들에게 희망을 주실수는 없는지요?
정말 기다리다 지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