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화 와 마타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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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1차대전이 끝맻을 무렵인 1917년 10월15일 프랑스 파리교외 반센느 둑에 한여인이 전라의 몸으로 처형대에 묶였다. 사형 집행인이 눈가리개를 씌여주려하자 그녀는 "필요없다"고 하자 12명의 사수들의 총에서 불을 토해 냈다. 그녀는 죽였다. 마타하리의 마지막 모습이다. 마타하리의 본명은 마가젤타 젤러 이다. 1876년 네델란드에서 태여난 그녀는 19살에 네델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 주둔軍 장교 C.맥클라우드와 결혼해 두아이의 엄마가 된다. 그러나 7년만에 이혼을 하게 된다. 이혼녀가 된 그녀는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프랑스 파리로 갔고,인도네시아식 자바춤(발리 댄스)으로 한방에 물랭루즈의 명물로 떠오른다. 그녀의 춤은 이국적인 풍광에 목말라 있던 유럽인들에게 큰 흥미거리가 됐다. 젤러는 이름도 마타하리(말레이시아어 "낮의 눈동자")로 바꿨다. 타고난 미모와 느드에 가까운 그녀의 에로틱한 춤은 숱한 고우관대작, 장교들의 가슴을 애태우게 했고 프랑스 사교계에서 '만인의 여인'으로 살아간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시들어 갈 무렵 재기를 위해 독일 베를린을 오가게 된다. 이것이 문제가 돼 추 후 프랑스에서 간첩협의로 체포되게 된다. 그녀가 죽은지 80여년이 지난 1999년 비밀유지 의무에서 벗여난 영국의 제1차세계대전 관련 문서에는 마타하리가 군사정보를 독일에 넘겼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고 기록돼 있다. 마타히리가 진짜 이중 스파이였는지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 발발후 1950년 6월 28일 한국의 마타하리로 불렸던 김수임이 총살당했다. 김씨는 남한 주둔美8軍사령부 헌병감이던 존 베어드 대령과 북한 초대외교부장 이강국 사이의 삼각관계로 세상을 흔들어 놓았다고 한다. 공산주의자 이강국의 대남공작을 위해 동거관계엿던 베어드 대령을 통해빼낸 미군정보를 넘겨줬다는것이 그 당시 검찰의 기소내용이다. 또한 이강국의 월북을 돕기위해 베어드 대령의 지프차에 모래 태워 38선 까지 데리고 협의도 받았다. 최근 AP통신은"비밀이 해제된 1950년대 자료를 분석한 결과 당시 베어드 대령은 민감한 군사정보에 대한 접군권한이 없었다. 김수임은 경찰의 고문탓에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허위자백했던 것으로 미군관계자들이 결론 내린 것이 확실하다고 보도 했다. 지난달 말 구속된 여간첩 원정화 사건은 "현대판 마타하리" "제2의 김수임"이라고 일컬어질 만 하다. 위장귀순한 후 대북 정보요원 중국유인, 대북정보요원 살해, 군사비밀 탐지 등 국,경,검찰의 발표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탈북자위장 간첩이다. 원씨의 그동안 행적에 대한 검찰의 발표내용 중 앞 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숱한데다 그녀가 북에 제공햇다는 정보가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여서 벌써 부터 논란에 휘말려 있다. MB정권에 대한 불교신도들의 반발에 맞불을 놓기 위한 "기획사건"이라는 그렇듯한 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원정화 간첩사권의 진실은 앞으로 이어질 재판을 통해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중요한것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자유의 품을 찾아 목숨걸고 탈북한 탈북자들의 삶이 위축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렇지 않아도 많은 탈북자들은 꿈에 그리던 남한땅을 밟은 감격이 잊혀지기도 전에 국민의 싸늘한 시선에 더해 사기,자녀들의 사회부적응, 가정파탄으로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 원씨는 이제라도 중국에 드나들며 보위부에 흡수되여 프라치했다고 솔찍이 자백함이 어떨가. 난 수표도 모르는 간첩이 세상에 어디있나 ?핸드폰은 프라치들이나 하는 일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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